대학 입학 전쟁, 그리고 죄수의 딜레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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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인가 2007년에 자연대 출판부에서 발행하는 잡지에 투고한 글이다.


(기존에 썼던 글들의 짜집기성 글임.)


우리나라 수능 시험은 매년 문제를 새로 만들어서 내고 있으며, 매년 난이도 조절에 실패하는 시험이다. 어째서 매년 난이도 조절이 실패하는 걸까? 문제 내는 선생님들이 바보일까? “명문 대학”이라고 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 위한 공부만을 해 온 애들이 전부 바보인가? 아니면 명문대학은 그런 어려운 문제를 풀 수 있는 천재나 행운아들만이 가는 곳인가? 그 본질을 파헤쳐 보기 전에, 잠시 사설을 풀어보도록 하겠다.


얼마 전에 겪은 일이다. 난 학교 옆에서 자취를 하고 있는데, 주인집 할머니가 수도 요금이 나왔다고 해서 돈을 내러 갔다. 다른 요금과는 달리 수도요금은 주인집에만 계량기가 달려있고 각 자취방에서 쓰는 물값이 합쳐지므로 개별적으로 누가 얼마나 썼는지 알 수가 없다. 따라서 사람 수대로 나눠서 내게 되며 나 역시 이 방법이 대체로 공평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수도요금 체계를 가진 상황에서 각 자취방 사람들의 생각을 한번 생각해보자. 이 문제의 경우 자취방이 2명이고 수도요금을 절반씩 나눠내는 상황이라고 가정해 보자. 예를들어, 수도요금이 10000원이 나왔다면 나는 5000원을 내게 될 것이다. 문제는, 저쪽이 실제로 5천원어치 이상을 썼는데 저쪽은 5천원만 내고 내가 나머지 부분을 낸다면, 이건 억울한 일 아닌가? 확실히 억울하다. 그럼 내가 억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하면 될까?



정답 : 저쪽보다 많이 쓰면 된다.


문제는 이 생각을 나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저쪽이 나보다 멍청하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이제 경쟁이 시작된다. 서로 상대방보다 더 많이 써야만 내가 사용한 요금을 상대방이 내 주는 폭이 커지기 때문에 경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수도요금은 끝도 없이 많이 나오게 된다. 이런 상황을 방지하려면 서로가 이것을 미리 생각하고, 서로 협력해서 어느정도 이상을 쓰지 않기로 자제하는 것이 가장 좋다. 하지만 상대방을 믿을 수 있을까? 서로 협력하면 둘 다 같은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배신하면 배신을 한 쪽은 큰 이익을 얻고 배신 당한쪽은 손해를 본다. 그리고 둘 다 배신하면 둘 다 손해를 본다. 그리고



나만 손해를 보는 것은 싫기 때문에



둘의 선택은 둘 다 배신하는 쪽으로 결론이 난다. 이 결과는 죄수의 딜레마의 결론으로부터 유도된다.


문제의 난이도는 어떻게 하면 적절히 조절될까? 우선 출제위원-수험생 한명 사이의 딜레마를 고려해 보자. 출제위원이 문제를 쉽게 내면 수험생의 점수는 높을 것이고 어렵게 내면 점수는 낮아진다. 출제위원의 고민은 그 사이에서 적절한 문제를 내는 것이다. 즉, 출제위원은 점수가 너무 높아도 고민이고 너무 낮아도 고민인 것이다. 예를들어, 100점 만점인 시험에서 자신이 낸 문제를 푼 학생이 50점을 받아야 자신이 낸 문제가 잘 출제된 문제라는 평가를 받는다면, 50점에서 멀어질수록 괴로워진다. 수험생은 100점에 가까울수록 좋고 멀어지면 괴롭다. 이 문제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는 어렵겠지만 개념적인 이해를 해볼 수는 있다. 수험생이 0점 근처의 점수를 받는 것은 양쪽 모두에게 손해이다. 따라서, 이렇게 되는 일은 모두 막기 위해서 노력한다. 즉, 출제위원이 너무 어려운 문제를 내는 일도 없고 수험생이 너무 공부를 안하는 경우도 없다. 이 협력은 수험생의 점수가 50점을 넘어가는 순간 깨진다. 수험생은 여전히 점수가 높을수록 좋지만 출제위원은 이제 수험생이 점수가 높아지는 것을 막아야 하는 것이다. 당연히 문제는 어려워진다. 하지만 그런다고 수험생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수험생은 낮아지는 점수를 막기 위해서 더욱 공부를 많이 하게 된다. 이것은 양의 되먹임(Positive feedback) 과정이므로 수험생이 노력을 하면 할수록 문제는 어려워지고, 문제가 어려워지면 어려워질수록 수험생은 공부를 더 많이 하게 된다. 결국 피터지는 수험 전쟁은 단 한명의 학생이 있어도 발생하는 것이다.


본론으로 돌아와서, 이번엔 3명의 딜레마를 고려해 보자. 한명은 출제위원이고, 두명은 수험생이다. 두 학생의 평균 점수가 50점에 가까울수록 출제위원은 좋다. 두 수험생은 자신의 점수가 높을수록 좋다. 그렇다면 일이 일어날까?


두 수험생의 점수가 둘 다 50점을 넘지 않는다면 출제위원은 수험생의 점수를 끌어올리기 위해서 노력할 것이고, 수험생들은 굳이 포기하지 않는 한 적당히 공부해서 50점까지는 쉽게 도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만약 어느 한쪽이 50점을 넘었다면 어떻게 될까? 출제위원은 평균점수가 50점근처에 있는 한 결코 난이도를 조절하지 않을 것이다. 잘 내고 있는데 뭐하러 괜히 수고스럽게 난이도를 바꾸겠는가.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 두 수험생은 피말리는 경쟁을 하게 된다. 내가 쉽게 점수를 올리려면 난이도가 쉽게 나와야 하는데, 상대방이 나와 마찬가지로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점수를 올리게 된다면 난이도는 어려워진다. 그럼 나 역시 피터지게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 따라서, 나만 공부하고 저쪽이 공부를 하지 않는다면 평균점수는 50점에 가까울 것이므로 난 손쉽게 성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당연한 결론이다.


중요한건, 상대방 역시 바보가 아니므로 나와 같은 생각을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내가 공부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상대방은 공부한다. 이제는 문제가 쉽더라도 상대방이 공부를 하고 있기 때문에 내가 공부하는 것은 더 어려워진다. 따라서 문제가 쉽건 어렵건 내가 공부하기는 힘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서로 공부를 열심히 하기로 연합하는 것도 문제다. 그럼 성적이 서로 잘 올라가서 문제가 어려워지므로 공부는 점점 더 힘들어진다. 반대로, 서로 공부를 안하기로 연합하는 것은 어떨까? 이 경우 최소한 50점까지는 성적이 떨어질 것이므로 각자 손해다. 또한 한쪽이 배신할 경우 반대쪽은 탈락이다. 따라서 이런 연합도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적절한 난이도 수준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상대방과의 경쟁이 심해지게 된다. 심지어 문제가 어렵지 않아도 대학가기는 힘들다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만약, 출제위원이 문제를 어렵게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는 평균점수가 내려가게 될 것이므로, 서로가 방해하는 시간보다는 공부하는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물론 공부하기는 더 어려워졌다. 반대로, 출제위원이 괜히 문제를 쉽게 낸다면 어떻게 될까? 이때는 서로를 방해하는 시간이 더 늘어나게 될 것이다. 당연히 공부하기는 상대방의 방해때문에 어렵다. 따라서, 문제가 쉽게 나오건 어렵게 나오건 대학가기는 힘들고 공부하기는 어려우며 매년 수능 난이도 조절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경우는 100만명의 수험생이 죄수의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서로의 합의에 의해서 균형을 이뤄서 모두가 잘 되는 길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모두가 공부를 똑같이 해서 잘 되기로 합의했다면 단 한명이 배신해서 더 좋은 대학에 가는 것이 너무나 쉽기 때문에 모두가 배신하고 자기 공부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수능만을 분석했지만, 수능뿐만이 아니라 수험생들이 경쟁하는 모든 종류의 시험에 같은 분석을 적용할 수 있다. 대학가기가 힘들고 수험생들이 고생하는건 대학교 입시 제도가 자주 바뀌어서도 아니고, 논술 비중이 커져서도 아니며, 학생부 위주의 선발이 이루어지지 않아서도 아니다. 그들은 무죄다. 대학에 가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린 수험생들이 고생하고, 점점 더 힘들게 공부하고 있는 건 당연한 결과다. 그들은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상황에 내몰려야만 한다. 수험생들의 피터지는 경쟁은



대학에 가야만 성공할 수 있다



고 생각하는 고정관념의 결과물이며, 동시에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대학 졸업장 필수”로 한정해 버린 우리 사회의 책임이다.


피그말리온 까대기

2002년 4월 14일 작성했다고 전해지는 발굴 글이다.

내가 도대체 2002년에 무슨 생각을 했던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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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최고의 작품과 결혼했다. 그래서 아들까지 두었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피그말리온이 ‘인간’이 된 상아 여인을 과연 끝까지 사랑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이다.

첫째로, 상아 여인은 인간이 되는 순간 그 자체로서의 완결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피그말리온은 상아 여인을 조각 할 때 완벽한 모습을 조각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조각할 수 있었던 것은 상아 여인의 겉 모습이었을 뿐, 그 마음까지 완벽하게 조각한 것은 아니다. 이런 상황에서, 즉 상아 여인에게 인간으로서의 마음이 결여된 상태에서 신에 의해 강제로 인간이 되었다면 그 인격은 인간으로서의 인격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그가 사랑한 것은 인간일까, 아니면 인간이 아니었을까. 여자처럼 생겼으니까 여성의 인격을 갖는다는 것은 고정관념이다.

둘째로, 여자의 결점을 너무 많이 보았다고 하는데, 피그말리온은 그럼 여자들의 결점만 보고 그 결점을 커버할 수 있는 장점은 하나도 보지 않았다는 뜻일까? 하지만 그건 아닌듯 싶다. 그가 결점만 보아왔다면 그는 여자의 장점을 알 수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완벽한 모습의 상아 여인을 조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면, 혐오할 정도로 결점을 많이 보았다는 것은 그가 살던 시대, 또는 그가 살던 동네에 사는 여자들은 혐오스러울 정도로 결점을 많이 갖고 있었다는 뜻이다. 아니면, 다른 남자들은 그냥 잘 결혼해서 사는데 비해 그의 성격이 결벽증에 가까워서 완벽함이 아니면 전부 결점으로 보였을 가능성도 있다. 여기서 이 신화의 한계가 드러난다. 피그말리온은 여자의 모든 것이 결점으로만 보였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여자를 혐오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그는 상아를 이용해서 여자를 조각했다. 자신만의 완벽한 여인을. 그리고 그는 여기에 만족하지 못하고 궁극적인 상태인 ‘생명’까지 원하게 된다. 그런데 상아 여인은 상아인 상태일 때는 누군가 부수지 않는 한 그 모습을 영원히 간직한다. 하지만 인간이 된다는 것은 그 영원함이 깨진다는 것이고 필연적으로 완벽함은 사라진다.

셋째로, 아프로디테 신은 그의 속마음을 알아차려서 상아 여인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었지만, 이것은 실은 변명이다. 피그말리온의 소원은 속마음이 어떻든간에 분명 “상아처녀와 같은 여인”을 원했었고, 아프로디테는 그의 소원을 정확하게 들어주지 않은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 그가 원하는 것처럼 완벽한 사람은 없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과 같다.

그는 상아 속에서 완벽한 여인을 찾아냈지만 결국 인간이 아니었고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원래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다.

마지막으로, 인간이 된 상아 여인과 사는 피그말리온은, 상아 여인에게 푹 빠져서 그 상아 여인이 갖고 있었을지도 모르는 결점을 보지 못한 채 그냥 같이 살았을까. 아니면 끝내 보통의 세속 여인과 같아진 그녀에게 싫증을 느끼고 그녀를 떠났을까. 그리고 그 상아 여인은 나중에 살도 두툼하게 찌고 남편에게 잔소리하는 아줌마가 되지 않았을까.

피그말리온 신화는 세상의 결점 투성이인 여자들보다는 자신이 직접 만든 여자가 더 좋다는 한 남자가 꿈을 이룬 이야기이다. 누구나 머릿속에 이상형의 모습은 가지고 있다. 그리고 대부분은 그 이상형에 가장 가까운 사람을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 이상형이 서로가 서로가 아니라면, 즉 너는 나의 이상형인데 나는 너의 이상형이 아니라면, 이 경우 어떤 사람들의 사랑은 깨지고 슬픈 일이 일어나기도 한다. 하지만 피그말리온은 그런 것을 초월해서 직접 만들어 버렸다. 이제 앞으로 생명공학이 발전하면 사람을 직접 디자인해서 만드는 시대가 올 수도 있다. 사람들에게 묻고 싶다. 그런 시대에서, 자신이 직접 만든 완벽한 이상형과 함께 사는 것이 과연 진정한 행복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경우에 겉모습은 완벽하다고 해도 속마음까지 이상적인 마음씨를 갖게 할 수 있을까? 나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마음이란 성장하면서 주변사람들과의 관계에서 형성되는 것이지 어떤 임의의 조작으로 만들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인류를 위한 미래에너지 – 핵융합

왜 썼는지 잘 모르는 핵융합 레포트. 2002년 4월 5일 작성으로 되어 있다.

하드디스크 정리중 발굴하여 올려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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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류를 위한 미래에너지 – 핵융합

각종 산업이 고도로 발전되고 있는 현대사회에서는 새로운 대체에너지의 개발이 필수불가결한 문제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우리가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에너지자원인 석유, 석탄, 천연가스 등은 모두 화석에너지로, 1990년을 기준으로 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석유는 43년, 천연가스는 58년, 석탄은 230년간 더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이들은 모두 매장량이 한정되어 있는데 반해, 에너지자원의 소비량은 급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또한 이들을 이용한 에너지발전은 환경파괴를 일으키기 때문에, 미래에너지로는 부적합하므로 이를 대신할 대체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최근 많이 사용되고 있는 발전방식인 원자력발전도 우라늄을 이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원고갈의 문제가 생기게 된다. 특히 원자력발전은 발전 후의 핵폐기물 처리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으며, 그 안전성여부의 문제도 사실상 보장받지 못한 상태이다.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던 러시아의 체르노빌 원전 사고, 미국의 드리마일 원전 사고 등이 그 좋은 예이다.

미래에너지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그 에너지가 재생에너지여야 한다는 점이다. 재생에너지는 말 그대로 고갈되지 않고, 계속해서 다시 쓸 수 있는 에너지자원을 말한다. 대표적인 재생에너지로는 태양에너지, 지열에너지, 조력, 풍력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모두 깨끗하고 고갈될 염려가 없다는 큰 장점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에너지가 많이 집약되어 있지 않아 개발비용이 많이 들고, 현대 문명사회와 같이 많은 양의 에너지를 필요로 하는 사회에서는 그 실용성이 적다는 점이 한계로 지적되고 있다.

그리고 태양열이나 풍력은 기후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에, 보조발전설비를 갖추어야 하며, 아직은 경제성이 없고 대규모 발전에는 그리 유망하지 못하다는 점들 때문에 여러 제약을 받고 있다. 그밖의 재생에너지들도 비슷한 사정이며, 효율성이나 경제성 측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 아직은 많이 남아있다.

장기간에 걸쳐 대량으로 사용가능하고, 채취와 수송에 있어 환경과 인체에 주는 피해가 적고, 사용하는데 있어 깨끗하고 안전한 미래에너지의 개발에 우리는 힘을 쏟아야 할 것이다. 현재 이러한 조건을 만족시키는 미래 에너지로 관심을 모으고 있는 것이 바로 수소핵융합 에너지이다.

핵융합이란 가벼운 원자핵이 융합하여 보다 무거운 원자핵이 되는 과정에서 에너지를 창출해내는 방법이다. 보통 수소원자의 핵은 하나로 되어 있고, 헬륨 원자의 핵은 양성자 2개와 중성자 2개로 되어있으며, 중성자는 양성자와 전자를 합쳐서 만들 수 있다. 따라서 헬륨은 수소원자 4개를 합쳐 만들 수 있다는 말인데, 그것은 사실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좀 더 효율적인 면에서 수소 중에서도 “중수소”를 쓰는데, 중수소는 일반 수소보다 두 배가 무겁다. 그러나 중수소도 분명 수소는 수소이다. 수소와 성질은 똑같지만, 무겁기 때문에 느리기 움직이므로 다른 보통 수소들과 분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중수소의 원자핵은 양성자 1개와 중성자 1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중수소 2개를 합쳐서 헬륨을 만들게 된다. 여기서의 반응식은 중수소 + 중수소 → 헬륨, 즉 원자핵으로 풀이해보자면 양성자, 중성자 + 양성자, 중성자 → 양성자 2개, 중성자 2개라는 식이 나오게 되는데, 분명 양쪽의 수는 똑같다. 그러나 양성자 2개, 중성자 2개, 이런 식으로 뭉치게 되면 좀 더 가벼워지게 된다. 매우 조금이지만 가벼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만큼의 질량이 에너지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 합쳐서 만들 수 있는 것은 원자번호가 철, Fe가 될 때까지이다. 즉, 철 앞부분의 원소들은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이 철이 가진 양성자와 중성자의 질량보다 무겁다. 그리고 그 뒤, 철 뒷부분의 원소들은 핵융합이 아니라 핵분열을 하게 된다. 여기서는 핵분열 하기 전보다 핵분열 한 후의 질량이 조금 더 가벼운데, 이 경우에도 엄청난 에너지가 나오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런데 핵융합은 1억˚이상 2억~3억˚정도 되는 온도에서 일어나는 현상이다. 이정도 온도를 견딜 수 있는 재료는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았으며, 견딜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전자기력을 이용해서 전기를 띤 입자를 가두는 것인데, 예컨대 1초 이상만 가둘 수만 있다면 핵융합 반응을 일으킬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효과적으로 에너지를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비용과 뛰어난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에, 아직 수소핵융합을 이용한 발전이 보편화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최근 상온핵융합이라고 해서 20˚C정도(즉, 실온상태)에서 핵융합현상이 일어난다는 이론이 있는데, 그 연구에 우리나라 연구원이 관련되어 있다. 그 연구나 실험을 직접 한 것은 아니지만, 상온핵융합을 연구하는 미국 연구원이 쓴 결정적인 논문에 우리나라 연구원의 논문이 인용되었다는 것이다. 논문 인용은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런데 상온핵융합에 대한 실험장치는 의외로 간단하다. 비커에 물을 붓고, 니크롬선 하나를 넣어놓는다. 그리고 그 니크롬선을 순간적으로 가열하여 기포를 딱 하나만 만든다.(딱 한 개만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하다.) 이 기포에 초음파를 발사하면 기포가 빛을 내게 되는데, 이 현상을 초음파발광이라고 한다. 바로 여기에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 안에서 핵융합이 일어난 게 아니냐하고… 그래서 핵융합이 일어났느냐, 일어나지 않았느냐, 실험을 했는데, 핵융합이 일어나면 반드시 2.5MeV의 에너지를 가지는 중성자가 튀어나온다. 이 중성자를 검출했느냐, 다른 입자인데 착각한거냐. 이 문제로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핵융합이 일어났다는 확실한 증거만 잡으면 노벨상 수상감이니, 잘만 하면 노벨상 수상자가 논문을 이용한 연구원이 우리나라 연구원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어쨌든 수소핵융합은 핵분열을 비롯한 다른 에너지 발전방식에 비해 장점이 많다. 원료가 풍부하고, 지구상의 분포율이 풍부하다는 점, 이산화탄소를 배출하지 않기 때문에 환경오염과 지구온난화문제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점, 유해한 방사능이 적고 사고시의 위험성이 적다는 점, 연료가 비싸지 않다는 점(중요한 융합원료인 중수소의 가격은 같은 열량을 가지는 석탄가격보다 월등히 낮다), 핵융합에 쓰이는 중수소와 삼중수소는 보통의 바닷물에도 무한정 들어있어, 전기분해를 통해 언제나 얻을 수 있기 때문에 계속해서 다시 쓸 수 있는, 고갈될 염려가 없는 재생가능에너지라는 점이 그것이다.

그러나 현재, 한국에서 소위 ‘미래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0.71%에 불과하며, 2006년까지 2%로 확대할 계획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계획의 소극성도 문제지만 현재의 대체에너지 중에는 폐기물 에너지가 90%를 차지하고 있어, 실제 재생가능에너지의 역할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재생가능에너지는 장기적인 에너지 대안의 핵심적인 요소로, 훨씬 적극적인 역할이 부여되어야한다. 현재 세계적으로 재생가능에너지의 생산비용은 계속 낮아지고 있으며, 가까운 시일 내에 완전한 가격 경쟁력을 갖게 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더구나 현재 많이 쓰이는 화력발전소와 핵발전소의 비용이 환경적 이유 때문에 계속 상승한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최근 UN에 의해 지원된 한 연구에 따르면 2050년경에는 재생가능에너지가 전세계 전력생산의 60%를 담당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이 미래에너지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추진이 필요하다. 특히 수소핵융합에 대한 연구를 더욱 더 지원하게 된다면, 어쩌면 우리는 예상외의 또 다른 결과를 발견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온핵융합의 예처럼)

태양은 엄청난 규모의 핵융합로라고 할 수 있다. 우리 지구에서도 수소핵융합을 이용한 발전을 효과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다면 더욱 더 발전한 미래사회를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깨끗하고 엄청난 힘을 가지고 있는 수소핵융합발전. 가까운 시일 내에 수소핵융합을 이용한 발전이 보편화되기를 기대해 본다.

공각기동대 (극장판)

2002년 철학의 이해 레포트.

공각기동대 극장판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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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은 기억에 의존하지 않으면 개인일 수 없다.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은 인간의 육신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의체(body)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몸을 의체로 바꾸면서부터 이전의 자신은 죽어버리고 여기 남아 있는 자신은 기억장치에 저장된 기억과 프로그램으로 된 고스트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계가 아닌가 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 빠지게 된다.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면, 그때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존재함을 믿어야 하는가. 이 의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인형사는 타인의 고스트와 기억을 조작하여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치 사람을 인형처럼 갖고놀 수 있다는 해커이다. 그래서 인형사이다. 그 인형사는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 후, 쿠사나기 소령이 있는 9과에 스스로 잡혀들어와서 쿠사나기 소령이 갖고 있는 고스트와 융합을 시도한다. 결국 성공한다. 그의 실체는 단지 프로그램이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생명체로 규정하고 일본국에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그러면서, 현대 과학은 아직 생명을 정의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자신은 단지 글자의 나열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 역시 DNA 속에 담겨진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일 뿐이므로, 마찬가지로 자신도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스스로도 지적했듯이, 그는 프로그램이므로 자신의 복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스스로 변이를 일으켜서 자손을 남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생명체로서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종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고, 완벽한 생명체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쿠사나기 소령의 고스트와 융합하고, 마침내 “둘”이라는 개념에서 “하나”라는 개념으로 바뀐, 전혀 다른 개체가 된다.

그 둘은 죽음에 대하여 비슷한 사고를 갖고 있는데, 쿠사나기 소령은 죽으면 그 뿐, 사라지는 것,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인형사 역시 인간은 죽음으로 인한 기억과 정보의 단절이 진화의 원천이 될 뿐, 죽음 자체는 자료의 삭제에 불과하다고 한다. 융합된 후의 쿠사나기 소령(사실 양쪽의 어느쪽도 아니지만, 편의상 그렇게 호칭한다)은 어디론가로 떠나면서 “net는 넓다”고 말한다. 그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현실과 일부분의 네트에 불과했던 상태에서 인형사의 능력으로써 더 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인식가능한 세계가 네트 전체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즉, 그는 모든 형태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만큼 정보의 바다 어딘가에 있을 “진리”에 더 가까워 진 것이다.

2.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 추상적인 개념이던지, 아니면 구체적인 물질이던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함을 인시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위의 논리는 맞다. 그러나 만약, “예”라고 한다면 위의 논리는 기초부터 무너진다. 인식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명제에 대한 예는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했던 “청소부”가 있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별거중인 마누라와 딸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이것은 인형사가 고스트 해킹을 통하여 그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작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간이 인간의 기억체계(system)에 직접적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기술” 때문이다. 인형사는 이 점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믿을 수 없고, 기억에 의존하여 사고하는 형태로서는 마찬가지로 자아를 믿을 수 없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설령, 기술이 기억을 조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기억은 망각되면서 사라지고 경험하면서 새롭게 기록된다. 또, 어떤 기억은 그 내용이 뒤바뀌어서 기억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외부의 저장장치를 이용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기록해 둔다 하더라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 의하여 변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즉, 기억은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기억에 의존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자아를 정확히 특정지을 수 없다는 것일까.

기억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고방식을 기억을 통한 이성적 판단 중심이 아닌 감정과 본능 중심의 사고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과거의 기억에 의한 행동방식보다는 현재의 입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므로 기억의 조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원시시대의 본능적 생활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된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면, 기억은 조작되어야만 한다. 만약 기억이 조작되지 않은 채, 실재했던 과거 그대로 저장이 된다면 기쁜일은 물론이고 싫은 기억, 나쁜 추억마저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잊고싶어도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망각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예 알지 못하게 되는 것 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억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정보조작은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기억된 존재로서의 주체성,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위하여 결국은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남지 않는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로부터 발전해 온 현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곡되고 망각되어서 변질된 기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 보자. 그렇게 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해서 그 기억이 현실과는 전혀 틀리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이 실재임을 믿는다면, 그것으로서 자신이 존재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다시 살아나면 되지 않을가. 아까 예로 등장했던 청소부의 경우, 기억이 조작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그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여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자아상실로 인하여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좌절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렇게 속편하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을 알고 나면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폐인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해결방법은, 스스로의 자아를 절대적인 고정적인 실체로 놔두려고 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화해 나가는 유동적, 능동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자아 그 자체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정할 수는 있다. 틀린 설정이라면 괴로울 테니, 틀린 자아 설정으로 괴로워 하기 보다는 변화를 주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내자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유행 따위에 휩쓸니는 것과는 다르다.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갖고 그 주관에 의해서 자신의 자아 설정을 진짜 자아에 맞도록 바꿔가는 것이다. 자신이 설정한 틀린 자아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면 된다.

3.자아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몇가지의 예를 들어보자면, 신경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신체의 각 부분, 생각하는 것으로 실재한다고 느껴지는 정신 또는 영혼,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의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주체는 주체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체는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기억과 사고만이 남게 된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쿠사나기 소령은 융합 후에 다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 융합 전의 각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융합 후에도 자아가 어디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단지 떠났다. 적어도, 자아에 대해서 찾아가다보면 그 근방, 자신의 실제 자아에 가까운 여러 가지로 다른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자아 설정을 결정할 수 있다.

자아란,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형태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열정적이다, 축구를 좋아한다, 20살이다. 등등.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아주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이 나의 본질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나의 모습을 이루고 나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생명은 인형사의 말대로 DNA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이를 만들어내고 차츰 다양화되면서 그렇게 진화해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기억이 정보의 집합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결론을 유도하는 사고 작용이 연산이라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작동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이 유사성은 극도로 접근하여 아예 일치하여 버렸다. 인형사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그 프로그램에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정보를 입력받아서 지정된 연산을 거쳐 결과값을 출력한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자신 자체에 대한 입력을 받아서 “나”라는 결과를 출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형사의 경우는, 고도로 잘 짜여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어서 그것이 가능했고, 그러므로 쿠사나기 소령과의 융합은 쿠사나기 소령의 고스트에 대하여 기능의 추가가 아닌 자아와 자아와의 완벽한 통합이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어디까지를 “나”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쿠사나기 소령은 융합전에는 인형사를 자신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그럴수 조차 없었다. 물론, 융합 후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ghost)이 되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놓고 보면, 이건 자아와 비자아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적으로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즉, 자아와 비자아 사이의 구별이 확실해서 어디까지가 자아, 어디서부터 비자아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통은 자신의 신체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나”, 즉 자아로 인정한다. 그런데 기억은 경험에 의해 저장되고, 경험은 신체가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것인데, 신체는 정신이 아니라 세계에 속해 있는 부분이므로 엄밀히 말한다면 자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체가 없다면 절대 정신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도대체 “자아”인가.

존재하고 있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자아의 위치를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자아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알 수 있는데, 자아는 나의 몸 전체와 나의 사고방식을 총괄한다. 즉, 이 두가지 영역에 대해서만 직접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은 나의 구성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자아가 신체에 작용하여 나타난 행동 양식에 의한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이런 영향으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자아와 자아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나 교감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자아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므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끝없는 자기 합리화만이 있을 뿐이다.

4.결론

인간은 불확실한 기억을 더듬어 사고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자아의 실체는 찾아낼 수 없으며 다만 그 근처에 있는 자아의 성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기억과 기록은 조작될 가능성이 있고, 현실은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따지다보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아 자체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름대로의 주관을 갖고 진실과 거짓을 분리하여 받아들이면서 불안한 정신적 기반 위에 서 있긴 하지만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에서는 자아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점들은 결국 자아를 확인하려하고, 규정하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집착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말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 논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이지만 사람으로 되기에는 어린아이인 것을 버리도다.

지금 우리들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보는 곳 어렴풋하도다.

꿈 중




<br />

언제 꾼 꿈인지 모르겠다. -_-;

자료 복구하다가 발견하여 올려둠.

—-

언제나 공항에 도착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언제나 도망자의 신세.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공항 밖으로 뛰쳐나가야만 했다.

열나게 뛰었다.

이곳에는 내가 잘 알고있는 정보통이 하나 있다.

그의 집까지 가지 못한다면 말짱 꽝이다.

저쪽에 그의 차가 보였지만 내 뒤를 봤는지 모르는체 지나가 버린다.

참고로 뒤에서 날 ?고 있는 놈들은 CIA인지 FBI인지 안기부인지 모르겠지만…셋중 하나.

어느새 차 안이다.

난 조수석 바로 뒤에 앉아있고 앞에는 남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양쪽으로 여자가 앉았다.

그 남자도 나처럼 ?기는 신세인 모양으로 나랑 마음이 맞는 것 같았다.

하지만…그 행동이…

갑자기 그가 내가 봤을때의 왼쪽에 있는 여자의 가슴을 움켜쥐었다.

“헉…”

“가만있어,죽고싶지 않으면”

칼을 들이대면서 그러다니…

그러더니 옷을 찢어버리고는…완벽 성희롱을…–;

검문소가 나왔다.

“걸릴만한 위치가 아냐,그냥 통과해”

칼을 시트에 꽂으면서 험악하게 말했다.

이래저래 어찌어찌하여 그 정보통 집 앞에 도착하긴 했다.

저쪽에서 맞바로 질주하는 차.

“멈춰!!!”

끼이이이익!!!

두 대의 차는 들이받기 직전에 1센티의 공간을 남겨두고 멈췄다.

“뭐야?”

우린 내려서 그 차를 바라봤다.

“어?”

그 정보통 차였다.

거기서 내리는 사람은 당연히 정보통.

“여어!! 이거 오랜만인데! 어서 안으로 들어가자구”

그때 눈치를 보고있던,앞에 앉았던 운전사와 조수가 튀었다.

“이런…”

하지만 여자가 남아있었다.

집은 굉장히 고풍스런 분위기로 보인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안쪽은 굉장히 미래지향적인 분위기로 보인다.

하지만…

딩동!

“계십니까?”

“이런…놈들이다”

정보통은 정보가 빨랐다. –;

“올라가!”

엘리베이터가 있었지만 포기하고 올라갔다.

있는 힘껏 뛰었지만 왜 그렇게 안뛰어 지던지…

3층인가 4층인가까지 올라갔다.

여자를 데리고 있던 그놈이 여자랑 같이 창문 밖으로 뛰어내렸다.

“어?”

정보통도 그쪽으로 뛰어내렸다.

난…자신이 없다.

계속 위로 올라갔다.

“으앗!”

저쪽에서도 오고 있었다.

“이런!”

난 아까 그 창문으로 달려갔다.

아래쪽은 까마득하고 밑에는 하얀게 널려있고 그 위에 아까 떨어진 애들이 퍼질러져 있다.

어쩔까 어쩔까 고민을 했다.

저쪽에선 놈들이 달려오고 있다.

잠깐의 틈.

선택의 기로에 선 나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햄릿의 의식과 동화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뭐…이제 선택을 해야만 한다.

1일째

뛰어내렸다.

바닥은 빠른 속도로 날 향해 다가왔다.

커다란 충격을 느끼는 것 같았다.

꿈에서 깨보니… 등에 식은땀이…

2일째

뛰어내려야만 했지만 뛰어내릴수 없었다.

결국 붙잡혔다.

그리고 꿈에서 깼다.

등에는 역시 식은땀이…

P.S.<참고>이 꿈은 이틀동안 같은 내용을 연속으로 꾸었죠. 엔딩만 약간 다르고요.


명키호테

원전 :

http://ko.wikipedia.org/wiki/%EB%8F%88_%ED%82%A4%ED%98%B8%ED%85%8C

*세르반테스, 미안. -_-;

명 키호테

조중동을 많이 읽고 삽질을 많이 한 끝에 이 세상의 문제가 버라이어티 정신의 결여에 있다고 판단하여 대선을 나간다. 본명은 알론소 아키히로.

영철 판사

현실적이며 충성스러운 명 키호테의 하인(원래는 농부이다.).

근시네아 박 통보소

박 통보소 마을에 사는 이장의 딸. 명키호테가 마음속에 두고 있는 애인. 본명은 박론사 로렌혜. 근시네아는 명 키호테의 감정을 전혀 모르고 있다.

전편 조연들

진홍 페레스 신부

명 키호테의 친구로서 명 키호테를 … 애쓴다.

이박사 재올라스

역시 명 키호테의 친구로서 진홍 페레스 신부와 함께 명 키호테를 … 애쓴다.

(작업중. 의견 받습니다.)

주인공 알론소 아키히로는 시골에 있는 CEO이다. 그는 정치에 대한 기사를 너무 많이 읽어 점차 상상 속에 빠져들게 되며 그가 정치인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스스로를 “명 키호테 인데 만취”이라 칭하며 그의 하인 (원래는 농부) 영철 판사와 함께 모험을 떠나게 된다. 정치인으로서 마땅히 같기도를 발휘해야 할 연인은 근시네아 박 통보소인데 사실은 이웃에 있는 농부의 딸로 이름은 박론사 로렌혜이다. 이후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많은 서민을 만난다. 특히 취임 전편에서는 위에서 열거한 마을의 신부, 이박사 등과 함께 머무는 파란색 기와집에서 유명한 모험을 펼치며, 취임 후편에서는 워싱턴까지 갔다가 정치인으로 변장한 마을의 소시민에게 패하여 돌아와 퇴직할때까지 전편보다 많으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모험을 펼친다.

*이런 내용의 소설이나 쓸까…

*근데, 대충 쓴건데 왜 어색하지가 않지…-_-;;

대통령과의 대화

대통령과의 대화를 전국 35개 채널에서 생중계 했다고 한다.

다행이랄까, 온게임넷이랑 MBC게임 채널에서는 스타리그를 생중계했다.

이런게 작은 행복이라고나 할까…ㅋㅋ

[Janne da arc] Shining ray

(원피스8기 오프닝)
どこに向かって走れば もっと 素敵な明日に逢える?
(도코니 무캇테 하시레바 못토 스테키나 아시타니 아에루)
어디를 향해서 달리면 더 멋진 내일을 만날 수 있나요?
舵を取って 胸にしまった 奇跡の地圖を廣げた
(카지오 톳테 무네니 시맛타 키세키노 치즈오 히로게타)
키를 잡고 가슴에 담아 둔 기적의 지도를 펼쳤어요

空を目指して 夢を探して 道に迷った時もある
(소라오 메자시테 유메오 사가시테 미치니 마욧타 토키모 아루)
하늘을 향해서, 꿈을 찾아서, 길에서 헤맨 적도 있어요

夢じゃなくて 君と出會って 素敵な自分を見つけた
(유메쟈 나쿠테 키미토 데앗테 스테키나 지붕오 미츠케타)
꿈이 아니라 그대와 만나서 멋진 나를 발견했어요

小さな勇氣から 大きな物手にした
(치-사나 유-키카라 오-키나 모노 테니시타)
작은 용기에서 큰 것을 손에 넣었어요

「願い」を今こそ 「誓い」に變えて
(네가이오 이마코소 치카이니 카에테)
「바램」을 지금이야 말로 「맹세」로 바꿔요

Shining ray Find your brand new way
未來の物語を描こう
(미라이노 모노가타리오 에가코-)
반짝이는 빛살, 당신의 전혀 새로운 길을 찾아내요
미래의 이야기를 그려요

新しい風にすべての思い乘せて 今
(아타라시- 카제니 스베테노 오모이 노세테 이마)
새로운 바람에 모든 생각을 실어요, 지금

Shining ray Find your brand new way
a never ending journey to be together
반짝이는 빛살, 당신의 전혀 새로운 길을 찾아내요
함께 할 수 있는, 절대 끝나지 않을 여정

どこまでも追いかけて Shining ray
(도코마데모 오이카케테 shining ray)
끝까지 쫓아가요 Shining ray

色んな景色 胸に刻んで 遠くにまで來たけれど
(이론나 케시키 무네니 키잔데 토오쿠니마데 키타케레도)
여러가지 풍경을 가슴에 새기며 멀리까지 왔지만

今になって あの答えだけ まだ 見つけられなくて
(이마니 낫테 아노 코타에다케 마다 미츠케라레나쿠테)
지금에 와서 그 대답만을 아직 찾지 못했어요

遠回りでいいから 「生きる」意味覺えたい
(토오마와리데 이이카라 이키로 이미 오보에타이)
멀리 돌아와도 괜찮으니 「산다」는 의미를 알고 싶어요

この光が心照らす限り
(코노 히카리가 코코로 테라스 카기리)
이 빛이 마음을 비추는 한

Shining ray Find your brand new way.
永遠の太陽に手を伸ばして
(토와노 타이요우니 테오 노바시테)
영원히 빛나는 태양에 손을 뻗쳐요

過去を悔やむより 現在を確かめていたい
(카코오 쿠야무요리 이마오 타시카메테-타이)
과거를 후회하는 것 보다 현재를 확인하고 싶어요

Shining ray Find your brand new way.
a never ending journey to be together.
すべてを導いて Shining ray
(스베테오 미치비이테 Shining ray)
모든 걸 이끌어요 Shining r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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