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와 행복

인생이 행복할 것이 보장되어 있다면,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 성공할 것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역시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성공할 것 같은 것을 성공해 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 내는 것도, 가능성의 영역의 일을 현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할만한 것 아닌가?

“생존” – 살아서 존재함 –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못하고, 거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 때문에 돈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도전하고,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공부한다.

이 세상이 꿈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꿈을 꾸고 있어도 현실은 현실이고, 꿈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로 현실이다. “꿈”이라는 대명사로 요약할 수 있는, 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정말 두려운 건 그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이재율씨의 의미없는 댓글

이재율씨는 자신의 증명이 틀렸다면 자꾸 반례를 들으라고 하는데…

나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증명 과정에 오류가 있다”인 것이지 “이재율씨의 주장은 거짓이다”가 아니다. 즉,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일 수 있지만 증명 과정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이라면 우린 절대로 반례를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의 주장은 이미 참이라고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대 정리”이다. 우리는 그 증명이 참이라고 생각하므로 당연히 반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수학자들은 이재율씨에게 “증명 과정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음을 제발 고려해 주기 바란다.

내가 이재율씨에 관해서 쓴 글을 잘 읽어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재율씨의 오류를 지적한 글을 잘 읽어보자. (이재율씨도 마찬가지다.)

논리의 전개 과정이 불분명해서 해당 주장을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갖는 일이다.

어떤 명제 P의 참/거짓을 가리고 싶을 때, 부정하고 싶으면 반례를 1개만 제시하면 된다. 하지만 반례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는다.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례가 절대로 나올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비슷한 논리로, 창조론자들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증명이 있다. 이건 수학적 논의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넘어가자.)

다시한번 말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다른 사람에게 참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도록 증명할 책임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 쉽게 말해서, “명제 P는 참이다”를 증명할 책임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고, “이미 참이라고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명제 Q의 증명에는 오류가 있다”를 증명할 책임도 또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 물론 이재율씨의 명제는 “이미 참이라고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명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계속해서 수십개의 댓글을 달고 있길래 일단 IP를 차단시키고 해당 댓글을 모두 삭제하였다.

수학자들이 이재율씨를 왜 무시하는지 그 본인은 아직도 모르는가? 지적한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다 읽고 다시 읽어보니, 일관성 없는 글이 되었다. 독자들이 이 글을 집중해서 읽다가 지구를 떠나 은하계 저편으로 향하는 글의 방향을 보고 화내지 않길 바라며 글 앞머리에 미리 적어둔다.

오늘, 모 대학의 촉망받던 물리학 교수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올림픽에서, 1등 할뻔한 우리나라 선수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명한 말이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경쟁이 심화되었을 때,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좌절하게 된다. 좌절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누가 그를 죽게 만들었을까? 그 자신인가, 아니면 경쟁을 부추긴 주변 사람들일까? 또는, 경쟁으로 모든것으로 해결하게 만든 이 사회의 책임일까?

죽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타의에 의한 죽음이든, 노화에 의한 죽음이든, 스스로에 의한 죽음이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가 없다. 경쟁으로만 모든것이 결정되는 사회는 마치 치킨 런 게임과 같다. 치킨 런이란, 누가 더 용감한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절벽 끝, 또는 벽을 향해서 질주를 하는데, 절벽의 끝자락에 더 가깝게 멈춘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물론 절벽을 넘어서거나 벽에 처박히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할테니 너무 늦게 멈추면 곤란하다. 하지만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경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날지도 못하면서 절벽 끝으로 달려가고 돌대가리도 아니면서 벽으로 머리를 돌진한다. 이것이 현재의 시대상황인 듯 싶다.

“열심히 하면 먹고살만하지 않을까? 지금 밥을 굶는 사람들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건 게으른 벌을 받는 거라구”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내 친구중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어본 적이 없고, 설령 그런 상황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아직은 젊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을 얻어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커오면서 롤 모델로 삼아온 부모가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겠지.) 그렇게 살면서, 평생 그렇게 어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도 좋다. 아마 그 친구는 그렇게 잘 풀리는 인생을 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쉽기만 할까? 그 친구야 알아서 잘 살겠지만, 문제는 내 인생이 그렇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는, 어째서 IT업계 종사자들의 최종 테크트리가 테헤란로에서 닭튀김 집 사장으로 귀결되는가이다. 알고보면 당연한 건데, 능력이 비슷한 20대 100명이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할 때, 그중 20년 후에 부장급으로 승진할 만한 사람은 10명정도다. 나머지 90명은 그 이하이다. 이것은 능력이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운이 좋았거나, 줄을 잘 섰거나, 이런저런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차이에 의해서 갈라질 수 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그 상황에서 다들 한 가정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일 것이고 어쨌든 부양해야 할 부모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 전체적으로, 각 개인마다 어느정도 편차는 있겠지만, 각 사람들이 써야 할 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승진한 10명 빼고 나머지 90명은 부장 밑에서 일할테니 부장보다 적은 월급을 받을 텐데 지출은 부장급이다.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창업을 한다. 하지만 자기 사업이라고 해서 그게 잘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뭘 해도 먹고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물론 일부 복받은 사람들은 그런 걱정이 없겠지만.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짜 문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라는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는 점이다. 그게 진짜 무서운 것이다. 이 명제를 스스로의 절실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세상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고, 따라서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나는 죽고야 마는 그런 지옥이 된다. 잘 알다시피, 내가 세상을 지옥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세상은 진짜 지옥이 된다. 이제 뭘 하더라도 죽음만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문제를 바꿔야 한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라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이 세상이 문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문제를 풀고 있다면 그 해답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나는 살아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 해답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하고,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자원을 원한다. 자원이 없으면 곧 죽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넌 더이상 살아남을 희망이 없어. 괜한 희망 품지 말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렴” 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말이면서 잔인한 말이다. 물론, “넌 죽지 않을거야. 희망을 갖고 기회를 기다려” 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은 쓸데없는 노력을 하게 하여 더 빠른 속도로 힘들어지게 한다. 희망이 없지만 절망할 필요도 없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하다.

세상이 1등만 기억하는건 어쩔 수 없다. 경쟁에 참여한 사람 하나하나가 최선을 다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경쟁에 참여한 사람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그중 중요한 사람 몇명만 찍어서 기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럼 가장 잘한 사람 한두명 정도를 기억하는게 쉽지 않을까? 가령, 123번째로 잘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엔,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그 경쟁에 참여했던 바로 그중 하나라면 내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안풀릴 것 같다면, 지금 하는 일이 이미 실패해버렸다면,

더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세상이 어두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어둡다고 해서 나까지 어두워진다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헛된 희망은 절망이나 마찬가지로 잔인하다.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중요한데, 무작정 희망을 갖는 것보다는 정확한 희망을 갖는 것이 좋다. 지금 상황이 왜 어려운지 파악하고, 어떤 부분이 비관적이고 어떤 부분이 낙관적인지 파악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과연 내가 어디까지 내려가게 될지 생각해 보자.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어두움에 빠져서 세상에 눈을 감아 버리지 말고, 아무리 어두워도 눈을 부릅뜨고 찬찬히 살펴보자.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 안보인다면? 그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한 삽질이 시작될 뿐이다.

RPG게임에서 레벨을 올리기 위한 삽질 같은건 하루종일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한 삽질은 왜 하루종일 못할까?

올림픽에서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처리 당한 선수들을 예로 들어보자. 화가 난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화를 내봐야 금메달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가 나는건 사실이지만, 일단 잠시 접어두고, 당장 뭘 할 수 있는지 보자. 아무것도 없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정식으로 항의하고 재심이 가능할지, 금메달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가능한지 검토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심판의 오심이 확인되었지만 판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공식적인 결론이 난다면, 그때 화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감정적으로 화를 내봤자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나라는 전혀 감흥이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실격으로 2, 3등에서 1, 2등으로 올라선 나라의 국민들은 오히려 우리나라를 비웃을 것이다. 실격 당했으면 곱게 인정하는 것도 올림픽 정신이라면서. 그럼 그것이 더 억울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수”라는 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년후 다음번 동계올림픽에서 해당 종목의 금메달을 따내야 할까? 그보다, 금메달이라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정말 정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1등할뻔했는데 실격당해서 금메달을 못딴 것에 화를 낼 것이 아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은 (만약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면) 심판의 오심 그 자체다. 우리나라가 꼴등할뻔 했는데 실격을 당했어도 그것이 오심으로 실격당한 것이라면 똑같이 화를 내야 하고, 4등할 뻔 했는데 중국 선수를 쳤다는 오심으로 실격을 당했어도 오심이라면 화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 선수를 1등하고 있던 다른 나라 선수가 쳐서 그 나라 선수가 실격하고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따게 되었더라도, 오심이라면 이에 항의해야 한다. 그것이 비겁하지 않은 올림픽 정신이다.

자. 다시 한국의,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로 돌아와서, 내가 절망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면 내가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나만” 먹고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난 열심히 노력해도 안되고,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또는 나보다 덜 노력하는데도 잘먹고 잘산다. 이 생각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나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도 있고, 나만큼 노력한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도 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나만큼 사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도 있다. 각각의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9가지 경우가 된다. 나는 그중에 단지 나만큼 노력해서 나만큼 사는 사람에 해당할 뿐이다. 절망을 단순히 좌절로 끝낼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서 진짜 문제점이 뭔지 찾아내야 한다. 정확히,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언제나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금 내가 작성한 이런 종류의 글들은 요즘은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양산되고 있다. 그런 글 읽고 감동하는 것도 지칠때가 되었다. 읽고 느꼈으면 이제 생각하고 움직일 차례다.

도대체 뭘 해야할지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철학책 아무거나 붙들고 읽어보길 권한다. 철학책 중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으면 “세계 철학사” 책 한권을 골라서 읽는 것이 좋겠다. 철학책은 물리학 교과서나 수학 교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몇가지 이로운 작용이 있는데, 읽고 있다보면 적어도 인생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되거나, 깊이있는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쪽이든 그 독자에게 깊은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모두에게 권장한다.

질문은 언제나 환영한다. 다만, 글의 내용과 제목이 왜 안맞는거냐는 질문은 사절한다.

미분기하책 중단, 고체물리책 시작

Chern선생님의 미분기하학 책을 읽다가 “이 책의 수준은 나의 지능을 넘어선다”는 판단이 들어서서 4장까지 읽고 일단 봉인했다. 5장에서 리만 기하학이 나오고 6장에서 리 대수학이 나오는데, 이 시점에 “질량” 만 정의하면 그대로 일반상대성이론이 되는 수준이다. 당연히, 아직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물리학/수학의 학력이 석사 수준에서 멈춰버린지라…)

학부때 듣지 않았던 고체물리학이나 읽어야겠다. 물리 책은 왜 쉽게 읽히는 걸까… 아무래도 주 전공이라 그런가?

그나저나 토플 공부는 언제 하지…

인터넷 뱅킹 안됨

우리은행, 기업은행 다 안된다.

윈도 XP + IE8에서 안되면 어쩌라고…-_-

아마 내 컴퓨터에서만 안되는 거겠지만, 아무튼 이건 너무하잖아.

프로그램 설치하라고 하는거 전부 설치했는데 자기네들끼리 인식 못해서 에러 나는건 정말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이 대충 만들었다는 증거 아닌가?

물론, 개발자들 개고생하는거 안다. 욕 먹어야 할 주체는 “갑”에 해당하는 은행 보안담당자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일개 고객으로서 일단 화나는건 화나는 거고…

전기요금 오늘 내로 납부해야 하는데, 인터넷 뱅킹이 잘되는 사무실 노트북까지 가려면 그것도 일이다. (게다가 사무실은 전설의 윈도우 Vista + IE8 조합이다. 여기선 잘됨;;)

오픈웹 운동이 빨랑 성공해야 하는데, 짜증난다.

올림픽 금메달

어제는 은메달 딸 뻔한 한국 선수가 1등하던 선수가 실격되는 바람에 금메달을 땄다고 좋아하더니, 오늘은 금메달 딸 뻔한 한국 선수가 실격되는 바람에 싫어한다.

이 감정 상태를 어떻게 생각해야 “올바른” 방향으로 생각하는 것일까?

원효대사 해골물 vs 조삼모사

…인건가.

윈도우 재설치

노트북 유선랜이 맛이 가는 바람에 포맷했다. 역시 윈도우즈 문제 해결 방법은 포맷이 최고다. 이틀동안 고민하던 문제를 20분만에 해결했다. -_-;

업무에 사용하는 프로그램을 다시 설치하면서 느낀 거지만, 윈도우즈 비스타 사용자의 마우스는 다른 운영체제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마우스보다 더 빠르게 수명을 다할 것이다. 뭔놈의 클릭을 그렇게 많이 시키는지 모르겠다.

V3가 엄청난 양의 자원을 잡아먹는다는걸 다시한번 확인했다. 아니 내 노트북이 이렇게 성능이 좋았던가.

IE는 8.0씩이나 된 주제에 이제 겨우 3.6인 파이어폭스, 4.0인 크롬보다 한참 뒤처진다. 써보지 않았기 때문에 10.0이 넘어가고 있는 오페라에 비교할 수 없다. IE의 존재 의의는 윈도우 설치 후 파이어폭스 다운로드용 정도?

구입한지 3개월만에 한번 포맷을 했고, 그 이후 8개월만에 포맷을 하게 되었다. 다음번 포맷은 언제쯤이 될까.

오늘도 윈도우를 쓰기 싫다는 인상만 강하게 남긴 채 복구를 완료했다. MS 오피스 2007은 아직도 최적화가 더 필요하다. 어쩔수 없이 쓴다.

치르노의 퍼펙트 산수교실

카테고리를 “수학”으로 할까 “음악”으로 할까 한참 고민했음.

일단 PV가 있다.



그래서 이걸 다 보고 풀버전 검색…



그리고 곧이어 일렉기타…

가장 부러운 피아노 버전. 오른손 손가락이 10개로 보이는 환상에 빠져든다.

이건 실사판…(-_-;)

뇌졸중으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 질 볼트 테일러 박사



이런거 감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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