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북지원 쌀은 핵개발에 도움이 되었는가?

http://grains.krei.re.kr/sub01

국제 쌀 가격 톤당 500달러. (중립종)

http://kostat.go.kr/portal/korea/kor_nw/2/1/index.board?bmode=read&aSeq=349627

국내 쌀 생산량 약 500만톤.

http://grains.krei.re.kr/new_sub02#

국내 쌀 재고량 100만톤.

이 경우 쌀가격은 50억달러(약 5.5조원)

http://nkinfo.unikorea.go.kr/nkp/term/viewKnwldgDicary.do?pageIndex=7&dicaryId=129&searchCnd=0&searchWrd=

2000년대 즈음에 북한에 퍼준 쌀은 대략 합쳐서 100만톤 정도 되므로 5조원 정도의 돈이 들어갔다고 보면 됨. 10년간으로 퉁 치면 연간 5천억원정도 된다.

http://news.joins.com/article/10662891

지금까지 대략 6조원 정도의 비용이 들어갔으므로, 만약 대북지원 받은 쌀을 전부 다 팔아서 현금화 했다면 대충 그 돈으로 핵개발은 가능하다.

http://www.voakorea.com/a/3436655.html

미사일 개발도 가능은 하다.

그렇다면 북한은 이 쌀들을 어떻게 현금화 할 수 있는가?

http://www.rfa.org/korean/in_focus/food_international_org/riceprice-09242015095037.html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2724

대북지원받은 쌀을 국제시장에 다시 내놓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다. 북한도 그건 알고 있으므로 국가 차원에서 ‘지원’한다 해 놓고 빚 갚는데 쓴다. 이 과정에서 거래 가격은 1킬로그램당 북한돈 5천원이다. 미국돈 1달러가 북한돈 8천원이라고 하므로 1톤당 가격은 북한돈 5백만원, 달러로 바꾸면 600달러 정도 된다. 대충 국제 시세랑 비슷하므로 북한이 이 쌀들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최대 자금의 규모도 비슷하다고 보면 될 것이다.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media_in_out/nkmediaanalysis-07312013142525.html

http://webcache.googleusercontent.com/search?q=cache:TmEYkfmhPrQJ:www.ipa.re.kr/unitystudy/download.asp%3Ffilename%3D79_20131224238.pdf+&cd=1&hl=ko&ct=clnk&gl=kr&client=firefox-b-ab

그런데 북한은 이딴 짓도 하고 있다. 대충 1년에 5천억원정도 쓰고 있다. 물론 이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대북지원 받은 것만 쓴 것이 아니고 해외노동자들한테서 돈을 뜯어갔다.

http://www.rfa.org/korean/weekly_program/bd81d55c-c774ac8c-bb38c81cc9c0c694/co-al-06262012135454.html

덧붙여서, 중국도 10억달러 정도를 매년 지원하고 있다. 연간 1조원 규모다.

이런것들을 종합해 보면, 지난 정권의 대북지원이 북한의 정권유지와 핵개발에 꽤 사용되었을 가능성은 있지만, 그렇다고 대북지원이 핵개발 비용 조달에 가장 큰 역할을 했다고 보기는 어려워 보인다. 북한은 그 비용 말고도 진짜 쓸데없는데다가 돈을 너무 많이 쓰고 있다. 미친 국가니까.

스나크 사냥(2) – 서문 part 2

They knew it was not of the slightest use to appeal to the Bellman about it–he would only refer to his Naval Code, and read out in pathetic tones Admiralty Instructions which none of them had ever been ble to understand–so it generally ended in its being fastened on, anyhow, across the rudder. The helmsman used to stand by with tears in his eyes; he knew it was all wrong, but alas! Rule 42 of the Code, “No one shall speak to the Man at the Helm,” had been completed by the Bellman himself with the words “and the Man at the Helm shall speak to no one.” So remonstrance was impossible, and no steering could be done till the next varnishing day. During these bewildering intervals the ship usually sailed backwards.

그들은 그게 그것에 대해 종지기에게 항의하는 가장 미묘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오직 그의 해군 부호만을 참조했고, 그걸 해군 제독 교범에 나온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병적인 목소리로 읽어댔다. 그래서 결국 어쨋든 방향타를 돌리고 그걸 조이라는 식으로 끝나는 이야기들 말이다. 조타수는 울면서 그 옆에 서 있었는데, 그게 다 틀렸다는걸 알고 있었다. 젠장. 42번 규칙은“아무도 조타수에게 말해서는 안된다”라고 써 있지만 종지기가 덧붙이기를 “조타수는 아무에게도 말하면 안된다”라고 해 두었다. 그래서 항의하는 것은 불가능했고, 다음번 칠하는 날이 되기 전에는 방향전환도 불가능했다. 이들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이 배는 대체로 후진했다.

As this poem is to some extent connected with the lay of the Jabberwock, let me take this opportunity of answering a question that has often been asked me, how to pronounce “slithy toves.” The “i” in “slithy” is long, as in “writhe”; and “toves” is pronounced so as to rhyme with “groves.” Again, the first “o” in “borogoves” is pronounced like the “o” in “borrow.” I have heard people try to give it the sound of the “o” in “worry”. Such is Human Perversity.

이 시는 자바워크의 이야기와 연결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나에게 자주 물어보는 질문인 slithy toves를 어떻게 발음하느냐에 대해 답을 해야 할 것 같다. slithy의 i는 writhe처럼 길게 발음해야 하고, toves는 groves랑 각운이 맞는다. 그리고 borogoves의 첫번째 o는 borrow의 o처럼 발음된다. 난 사람들이 그 소리를 worry의 o처럼 발음한다는 말을 들은적이 있는데. 참 이상한 사람들이다.

This also seems a fitting occasion to notice the other hard words in that poem. Humpty-Dumpty’s theory, of two meanings packed into one word like a portmanteau, seems to me the right explanation for all.

이것은 시에서 다른 어려운 말을 알아채는 잘 어울리는 때인 것 같아 보인다. portmanteau처럼, 한단어에 두 의미가 들어가 있을 수 있다는 험프티 덤프티의 이론은 나에게 모든것을 적절히 설명해주는 것 같다.

For instance, take the two words “fuming” and “furious.” Make up your mind that you will say both words, but leave it unsettled which you will first. Now open your mouth and speak. If your thoughts incline ever so little towards “fuming,” you will say “fuming-furious;” if they turn, by even a hair’s breadth, towards “furious,” you will say “furious-fuming;” but if you have the rarest of gifts, a perfectly balanced mind, you will say “frumious.”

예를 들어, fuming과 furious를 생각해 보자. 두 말을 동시에 하려고 한다고 생각해 보자. 그런데 뭘 먼저 말해야 할지는 아직 정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이제 말을 하려고 해 보자. 만약 생각이 살짝 fuming으로 기울어 있다면 fuming-furious라고 말을 할 것이고, 심지어 털끝만한 차이로 furious로 기울어져 있었더라면 furious-fuming이라고 말을 할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당신이 천재적인 재능이 있어서 생각에 완벽한 균형을 이뤘다고 해 보자. 그럼 당신은 frumious라고 말할 것이다.

Supposing that, when Pistol uttered the well-known words–

“Under which king, Bezonian? Speak or die!”

Pistol이 유명한 이런 말을 했다 “이자식, 어느 왕을 섬길거냐? 말하지 않으면 죽여버리겠다”

Justice Shallow had felt certain that it was either William or Richard, but had not been able to settle which, so that he could not possibly say either name before the other, can it be doubted that, rather than die, he would have gasped out “Rilchiam!”

Shallow판사는 윌리엄이나 리처드 중 하나라고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런데 그 중 어느쪽인지 알 수가 없었다. 죽기보다는 의심받는게 낫기 때문에, 어떤 이름도 먼저 말 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그는 결국 릴치엄!이라고 외쳤다.

불난 꿈

선배네 집에 놀러가서 애기하다가 팔이 아프다고 얘기했더니 갑자기 나를 수술대에 눕힌다. 수술대에 눕혀서 묶고 뭘 수술하려고 하길래 괜찮다고 했더니 교육 받았다고 하면서 야매로 수술을 하려고 한다. 이걸 억지로 말리면서 안하겠다고 버티는데, 갑자기 집안에 불이 났다. 알아보니 보일러실에 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그래서 빨리 도망쳐야 하는데 막 옆에서 경찰들이 구보를 뛰고 있었다.

4차 산업혁명과 인공지능 앵벌이

(지난번에 썼던 글을 보충해서 다시 작성하였다.)

앵벌이는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시키고 거기서 얻은 돈과 물건을 빼앗아 오는 범죄이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나쁜 범죄이며 혹시 라도 주변에서 발견한다면 꼭 경찰에 신고하여 처벌을 받게 하도록 하자.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인공지능 앵벌이이다. 앵벌이는 앵벌이인데 인공지능 앵벌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판단과 주관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차츰 컴퓨터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현재는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해 개발자에 의해 잘 설계된 인공지능이 주로 보이고 있으나, 멀지 않은 미래에 범용 인공지능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여기서 범용 인공지능이란, 인간의 판단과 주관을 완전히 또는 거의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의 인공지능을 뜻한다. 이런 수준의 인공지능은 인간과 유사한 판단 능력을 갖고 있지만, 컴퓨터 또는 기계에 의해 운용되므로 전원이 공급되는 한 지치지 않고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을 아무리 많이 시키더라도 문제가 없다. (*여기서 이런 인공지능이 의식이 있는가 하는 문제는 논의하지 않도록 한다. 강인공지능이든 약인공지능이든 일단은 인공물이고 무생물이므로 인권이 없는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은 어떨까? 예를 들어서, 택시 기사가 자신의 자동차를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무인 자동차로 교체한 후, 기사 본인은 집에서 쉬면서 인공지능이 택시 영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1] 만약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서 그 사람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범죄이며, 당연히 법에 의한 정당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인공지능의 주인은 인공지능이 벌어온 돈을 모두 가져갈 권리가 있다. 흔히 말하는 속담을 빌어서 이야기 한다면, 재주는 인공지능이 부리고 돈은 주인이 먹는 것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렇듯 이미 인간은 많은 자동화 과정을 통해서 기계에게 많은 것들을 대신 시키고 있다. 현재 기계에게 무엇을 시키고 있는지 본다면, 대표적인 사례로 인공지능을 통한 주식 거래를 생각해 볼 수 있다.[2] 집에서 주식 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주식을 매매하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가져간다. 컴퓨터 알고리즘은 주식 시장의 변화를 보고 특정 주식이 오를지 내릴 지를 판단하여 매매를 결정하는데, 이것은 정당한 거래 행위로 간주되며 해킹과 같은 범죄 행위가 개입되지 않은 한 그 수익은 모두 컴퓨터 주인의 것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면, 컴퓨터 온라인 게임에서 나타나는 ‘오토’의 이용이다.[3] 오토는 오토마우스와 오토키보드 등 자동으로 사용자의 입력을 대체하는 프로그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게이머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게임을 자동으로 즐긴다. 온라인 게임에서 중요하게 여겨지는 요소들 중에,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나, 필요한 아이템을 모으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게이머들에게 지루한 반복을 강요하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이런 과정을 피하고 자신에게 재미있는 부분만 즐기려고 한다. 따라서, 게이머들은 게임에서 이런 부분들이 반복적이라는 부분을 적극 활용하여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입력하도록 하였다. 물론 오토를 사용하는 것은 오토를 사용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또는 오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을 고려한 상태에서 설계된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특히, 오토를 사용하지 않는 게이머들이 상대적으로 오토를 사용하는 게이머들에 대해서 박탈감이 들게 되므로 게이머들은 오토를 사용하게 되거나, 그게 싫으면 게임을 그만 두게 되어 게임 회사의 수익이 줄어드는 악영향이 나타난다. 오토를 사용하는 것은 게임의 재미를 줄이고 게임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로,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켜서 돈을 벌어오도록 하고, 사람은 그 시간 동안 놀고 있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분명 불로소득이지만, 그 인공지능을 구입하거나 제작하기 위해서 들어간 비용이 있을 것이고, 인공지능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전기 요금과,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장비와 기기 구입에도 비용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어느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스스로 갖고 있던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 그 인공지능이 벌어온 모든 수익은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불로소득이 아닌가?

사람들은 불로소득에 대해 매우 경계한다. 로또에 당첨되는 행운을 얻은 사람은 수십억원의 당첨금을 받을 수 있지만, 그와 동시에 33%에 달하는 소득세를 납부해야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보다 적은 비율의 근로소득세를 납부하고 있으므로, 불로소득은 분명 근로소득보다 좋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기술은 인간이 일을 하지 않는 방향으로 발달해 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발전할 것이다. 얼마 전 까지는 종업원이 제공하던 서비스를 이제는 기계가 서비스 할 수 있는 시대이다.[4] 하지만 사람들은 그 서비스가 인공지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사람이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기계가 하는 건데 너무 비싼 것 아닙니까?” 라면서, 더 저렴하게 서비스가 이루어져야 하는 것 아니냐고 따지고 들 수도 있다. 어쩌면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일을 더 잘 할 수도 있고, 사람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고, 어떻게 해도 인권 침해나 감정 노동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있는데도 말이다. 사람은 사람이 서비스 하는 것이 기계가 서비스 하는 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PC방을 한번 보자. 사람들은 PC방에 와서 놀다가 집에 간다. 원래 이 사람들은 PC방에서 놀지 않았다면 각자 한 사람씩 붙들고 놀았어야 했을 사람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 일을 기계로 대체하여 PC가 사람과 놀아주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은 PC방 관리하는 인력 단 1명이다. 사람들은 이미 기계가 자신과 놀아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사람이 놀아주는 것 보다 기계가 놀아주는 것을 더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온라인 게임의 경우 혼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저편에 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인공지능이 더 발달한다면? 사람은 대규모 RPG게임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외 다른 모든 캐릭터가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인공지능의 행동이 사람과 충분히 유사하다면(*즉, 컨트롤도 잘 하고 실수도 가끔 하고 채팅도 할 수 있다. 이 시점의 인공지능은 튜링 테스트를 통과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을 제외한 다른 게이머들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즐길 것인가?

얼마 전, 아마존에서 직원이 없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5] 손님이 매장에 입장할 때 스마트폰으로 인증을 하고 들어가면, 물건을 골라서 나올 때 자동으로 계산이 완료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운영되는 매장은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처음 매장을 열 때 들어가는 투자비를 제외하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다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세상의 많은 물건들은 이미 기계가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일부 소수의 명품은 수 십년 동안 기술을 갈고 닦은 장인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것도 만약 기계에게 작업을 시킨다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고, 그 좋은 명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도 있다.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영역은 기술의 발달로 점점 좁아지고 있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소비자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기계가 만들었거나 사람이 만들었거나 같은 품질이고 구분할 수 없다면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고, 기계가 서비스하거나 사람이 서비스하거나 구분할 수 없을 만큼의 서비스라면 같은 가치를 가진 것 아닐까? 소비자의 관점에서 서비스를 하는 주체가 기계인지 사람인지 상관 없다면, 거기에는 같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공급 가격은 당연히 기계가 공급하는 경우가 더 저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소비자는 기계가 공급하는 서비스를 받을 것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인데,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시킨 그 주인이 인공지능의 유지 보수 외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가는 것을 어떻게 두고 볼 것인가? 물론 인공지능의 유지 보수가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해서 그런 것도 필요 없이 단지 전기만 공급하면 되는 기계라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볼 것인가?

사실 반복 작업이나 고강도 노동에 있어서 지능적인 판단은 유일하게 인간이 기계보다 앞서고 있던 부분이었다. 기계는 인간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움직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재료를 가공할 수 있으며,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복잡한 패턴의 판단의 영역에서는 인간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었다. 이전까지 우리가 알던 세계에서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선적이고 단순한 계기판의 수치를 보고 작동을 더 하느냐 정지하느냐 정도의 판단이었고, 이보다 복잡한 판단은 인간의 지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 지능은 다른 동물로 대체할 수도 없이 지구에 사는 동물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딥러닝이 개발되면서 기계의 판단은 점점 인간의 판단력을 따라잡고 있으며, 그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6년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알고 있듯이 알파고의 5전 4승 승리였다.[6]

인공지능이 점점 보편화되어 갈수록 사람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줄 필요도 없고, 인권에 대해 따질 필요가 없으므로 24시간 1년 내내 일을 시킬 수 있으며, 사람처럼 지치거나 하지 않고 에너지만 공급하면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다. 여기에 판단 능력이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인공지능이 활약할 영역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고전적인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기계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을 예전에 넘어서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부분 외에도,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단단하고 더 섬세하다. 가령, 공장자동화와 기계화에 맞서서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제공하던 노동력을 기계가 대체하면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생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고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매우 당연히, 기계에 일을 시키는 것이 생산 비용의 감소를 가져와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계와 함께 공장자동화는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의 지능이 필요한 부분이 대체될 수 있다면, 인간은 결코 인건비 싸움에서 인공지능에게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으며, 기계처럼 휘발유나 220V전기를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사람이 휘발유나 220V를 먹는다면 죽는다!)

고전적인 일자리의 감소는 두 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인간의 생계가 위험해진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따라서 먹고 살기 위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기계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기계와 경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계는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사람은 일을 하고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데, 그 사람들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다면 사람에게 주는 인건비는 점점 떨어져서 인공지능에게 들어가는 비용만큼 내려갈 것이다. 현재는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건비가 그렇게 까지 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로 볼 때 곧 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이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여기까지만 이야기한다면 이것은 개인의 문제이지만, 그 대책은 개인에게 맡길 수 없는 부분이다. 물론 이런 부분에서 생계에 문제가 생긴 개인이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이 문제는 개인적으로 극복하기 어려울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 문제를 사회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근본적 관점의 변화가 나타나야 한다. 기존에 우리가 알고 있던 ‘일’이라는 행위는 곧 인공지능에 의해 대체될 것이고, 그것은 이제 시간의 문제일 뿐 그렇게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까지 일이라고 부르지 않았던 것들을 ‘일’의 영역으로 가져와야 하며, 그것을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꾸어 낼 수 있는 사회적 시스템이 갖춰져야 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일이라고 부르는 행위를 단지 기존에 이야기하던 물질적 소비재를 생산하는 관점에서 벗어나, 모든 종류의 소비재를 생산하는 것으로 확장한다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기성세대의 강점은 그동안 살아오면서 쌓아둔 경험이 매우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경험을 책으로 만들거나, 강연을 하는 식으로, 자신의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면서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낼 수 있을 것이다. 또, 이 사람들이 기존에 하던 일 이외에 자신의 취미 생활, 호기심을 만족 시킬 수 있는 여러가지 다양한 활동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인데, 그런 생활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면서 새로운 경제적인 주체로 거듭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예들은 기존에 알고 있던, 필자가 들어본 적이 있는 사례들이며 이외에도 인공지능이 대체할 수 없는 영역의 일이라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이미 인공지능을 활용하여 모짜르트의 작품과 유사한 형태의 교향곡,[7] 렘브란트의 작품과 유사한 형태의 그림은 만들어지고 있다.[8] 하지만 기존에 존재하지 않던 새로운 기법, 새로운 화풍을 가지는 창조적 영역은 아직 인공지능이 도달하기 어려운 부분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 부분에 인간이 추구해야 할, 그리고 추구하게 될 고유한 영역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경제 생활에 필요한 비용은 인공지능 등 기계와 컴퓨터를 이용하면서 생긴 잉여 수익과 자본을 활용하여 조달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이것이 당연한 이유는, 자동화 하기 이전에 들이던 비용을 자동화 하면서 절약할 수 있게 되었으므로, 그 차이는 당연히 원래 그 자리를 채우고 있던 사람에게 들어가던 비용 만큼이기 때문이다. 이 잉여 자본의 전액을 이와 같은 복지에 쏟아부어야 한다는 주장은 아니지만, 적어도 일부는 이런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맞다. 그것은 사람들이 생계를 걱정하기 때문에 발생하게 될 더 큰 사회 문제를 예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앞에서 예시를 들은 것과 같이 인간이 만들어 낼 새로운 가치가 사회와 세상에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1]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19/0200000000AKR20160819007751072.HTML

[2] http://stock.hankyung.com/news/app/newsview.php?aid=201608301944a

[3] http://news1.kr/articles/?2878979

[4]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5/08/12/0200000000AKR20150812090200030.HTML

[5]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7/02/22/2017022200797.html

[6]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3/15/2016031501207.html

[7]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6/08/09/0200000000AKR20160809108100061.HTML

[8] http://news.joins.com/article/19853826

 

물질에서의 비선형 현상

빛과 물질의 상호작용은 언제나 흥미로운 이야깃거리이다. 물리학자에 한해서겠지만. 아무튼. 이런 이야깃거리가 있는 경우, 빛과 물질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길래 재미있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지 이해하는 것은 이야기에 참여하기 위한 기본 소양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 여러분들도 알아듣고 뭔가 동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이 글을 써 보도록 한다.

빛이 물질을 지나갈 때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나길래 비선형 현상이 나타난다고 하는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빛과 물질 사이의 상호작용을 미시적으로, 구체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빛은 전자기파이고, 전기장과 자기장의 파동이다. 따라서, 빛이 물질을 지나간다는 것은 그 물질이 시간과 공간에 따라 변하는 전기장과 자기장의 흔들림 속에 놓여있게 된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는 물질은 원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원자는 원자핵과 전자로 이루어져있다. 원자핵과 전자는 둘 다 전하를 띠고 있는 입자들이므로 당연히 전기장과 자기장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우리가 보는 세상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경우는 전기장이 전자에 영향을 주는 현상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원자핵과 전자의 질량을 비교할 때, 전자의 질량은 가장 가벼운 원자핵인 수소 원자핵(=양성자 1개)보다 1800분의 1 정도로 가볍다. 그리고 당연히 우리가 주변에서 경험하는 물질들은 여러개의 양성자와 중성자를 가진 원자핵으로 되어 있으므로, 원자핵은 전자에 비해서 엄청나게 무겁다. 따라서 같은 크기의 전기장에 의해 힘을 받는 경우에, 힘의 크기는 같지만 질량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에 전자의 움직임에 비해서 원자핵의 움직임은 무시해도 괜찮을 정도이다. (물론 매우 강력한 전기장이나 빛에 대해서는 원자핵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없는 영역에 도달할 수도 있다.) 전자에 비해서 원자핵의 움직임을 무시할 수 있는 경우, 이론을 간단히 하기 위해서 무시하는 것이 좋다. 또, 전기장과 자기장의 영향을 비교하는 경우, 자기장에 의한 영향은 전자의 이동 속도가 상대성이론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경우에 문제가 되는데, 대부분의 경우 전자의 이동속도는 상대성이론을 무시해도 될 정도로 느리다. (물론 매우 강력한…이하 생략) 이와 같은 이유로, 전자가 전기장과 상호작용하는 것만을 고려해도 별 문제는 없다.

그럼, 전기장의 파동이 물질에 들어가서 전자와 무슨 짓을 하느냐? 아주 간단하다. 진동하는 전기장은 전자를 흔들고, 흔들린 전자는 전기장의 파동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흔들린 전자가 만들어낸 전기장의 파동은 당연히 원래 존재하던, 즉 전자를 흔들어 주던 전자기파와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이 간섭현상에서, 보강간섭이 되는 경우는 딱 한가지 경우밖에 없는데, 물론 두 전자기파의 파장이 같은 경우이다. 그 외에는 상쇄간섭이 일어나서 금방 사라져버리게 된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물질을 통과하는 빛이 어째서 파장이나 진동수가 들어가기 전의 빛과 같은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위의 설명은 가장 간단한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위의 설명이 작동하는 영역은 전자의 반응속도가 충분히 빨라서 전자가 전자기파의 진동을 다 따라잡을 수 있을 경우에 대한 설명이다. 만약 전자의 반응속도가 느리다면, 전자의 진동에 의한 전자피가는 두가지 성분으로 나누어서 생각해야 한다. 일단 들어온 전자기파와 같은 진동수를 가지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다. 여기서, 들어온 전자기파와 같은 진동수를 가지는 부분은 당연히 들어온 전자기파와 보강간섭을 일으켜서 잘 빠져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 부분은? 이 부분들은 진동수가 다르기 때문에 들어온 전자기파와 보강간섭을 일으킬 수 없다. 하지만, 전자가 하나밖에 없다면 모르겠지만,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대상은 물질이라고 부를 만큼 큰 대상이므로, 어마어마하게 많은 수의 전자가 존재한다. 따라서 어떤 전자가 내보낸 전자기파는 들어온 전자기파 뿐만 아니라 다른 전자들이 내보내는 전자기파하고도 간섭을 일으킬 수 있다. 그 결과, 들어온 전자기파 외의 성분들이 모두 보강간섭을 할 수 있게 되는 경우, 이 진동수에 해당하는 빛은 실제로 실현되어서 외부로 나타나게 되고, 그 결과 들어온 빛과 다른 진동수에 해당하는 빛이 물질을 통과하면서 나타날 수 있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기?

지난 글에서 일자리 위기에 대처하기 위한 개인의 노력으로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을 이야기했었다.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아보려고 한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것은 왜 중요한가? 이 글에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아무리 적어봐야 왜 적응해야 하는지 공감하지 못한다면 의미가 없을 것이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라면 역시 살아남기 위해서를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시대에 뒤떨어지면 살아남기 어렵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을 수 있을 것이고, 사람마다 적합한 방법이 모두 다를 것이다. 하지만 만약 아직 다른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내 생각에 이런 방법을 써 보는건 어떨까 싶다.

빠르게 변하는 시대에 적응하는 방법은 시대의 변화에 맞춰서 빠르게 함께 변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인간은 본질적으로 현재 상황에서 변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변화를 맞춰 가는 방법은 두가지가 있다. 예습과 복습이라고 불러야 할 것 같다. 하나는 변화를 앞서가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변화를 따라가는 법이다. 변화에 맞춰가는 법도 있겠지만, 당장 변하는 그 속도를 전부 따라잡기 위해서는 매우 힘들기 때문에 어느정도 속도차이가 날 수밖에 없고, 그 속도차이에 의해 내가 시대를 따라가는 방법은 살짝 앞서가거나, 살짝 뒤처지는 경우를 만나게 될 것이다.

변화를 어떻게 예습하는가? 사실 미래가 어떻게 변할지 아는 사람은 없다. 따라서, 미래를 미리 예측하여 학습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 불가능한 일을 어째서 나는 하라고 하는 것인가? 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 보다 낫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확하지 않은 예측이라 하더라도 많이 틀리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미래를 학습하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가 될 수 있다. 미래를 예측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현재와 과거에 대한 정보이다. (이어서…)

3D 정치인

3D프린터를 삼디냐 스리디냐 어떻게 읽는가를 갖고 논란인데, 그럼 대통령 후보 중에 3D프린터 갖고 뭐라도 출력해본 사람 있을까? 있으면 손~!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모 아나운서가 스텔스 전투기의 기종이름인 F111기를 “하천기”이라고 읽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정도의 레전드급 말실수가 아니면 그딴걸로 비판하는 것도 참 우스운 일이다.

일자리 위기를 어떻게 대처하는가?

인공지능과 기계에 의해 고전적인 일자리가 줄어들어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앞선 글에서 다루었었다. 이렇게 생계에 위협을 받는 사람들은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 것일까?

“일하지 않는자 먹지도 마라”는 원칙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일자리를 잃어버린 사람들은 생계를 이어나갈 방법이 사라진 것이다. 새로운 세상에 잘 적응한 신세대들은 이런 세상에서도 잘 살아나갈 수 있겠지만, 이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떨어져나갈 수 밖에 없다. 어떤 사람들은 본인은 먹고 살기에 아무 지장이 없으므로 그런 사람들은 불쌍하지만 어쩔 수 없다,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볼 때 이런 사람들이 늘어난다는 것은 사회 불안이 커진다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멀쩡하게 사는 사람들까지 사회 불안으로 인한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해야 할 수도 있다는 뜻이 된다. 그러므로 가능하면 이런 사람들의 수를 줄이는 것이 여러모로 중요한 문제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명확한 정답은 없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이 모여야 할 일이고, 많은 토론과 사회적 합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이런 토론을 위해서 나의 생각을 하나 보태어 보려고 한다.

우선, 이 사람들이 생계 수단을 잃은 것은 결과이며, 이 결과를 직접적으로 해소하는 방법은 밑빠진 독에 물붓기 밖에 안될 것이다. 물론 생계가 위험한 사람들에게 직접 돈과 식사를 제공하여 당장의 생활을 가능하도록 하는 것 역시 중요한 일이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사람들의 수를 줄이고 다시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면, 이런 사람들은 사회의 부담으로 작용하여 다른 사람들의 지출을 늘리고, 그 결과 손해를 본 사람들이 이런 사람들을 싫어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것이다. 정책은 사회적 갈등을 줄이는 방향으로 가야 하므로 이같은 정책은 단기적으로만 사용하는 것이 좋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해서 다시 생활을 가능하도록 할 수 있을까? 이 사람들의 가장 큰 문제는 새로운 세상에 적응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발맞추어 빠르게 적응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세상인데, 그렇게 빠르게 적응하는 훈련을 받은적도 없고, 경험해본적도 없으니 당연히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새로운 세상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을까?

자, 무엇이 ‘적응’인가? 사람들은 무엇에 적응해야 하는가? 사람들은 세상에 적응해야 한다. 세상에 적응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세상은 사람들에게 주어진 주변 환경 전부를 말한다. 많은 의견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주변 환경에 적응한다는 것은 주변 환경에서 일어나는 현상에 대해서 이해하고,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성공시키고, 더 나아가서 주변 환경을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바꾸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적응하지 못한다는 것은 이런 것들이 잘 되지 않아서 불리한 상황에 처하고, 하려는 일에 실패하고, 심각한 경우 생존에 위협을 받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주변 환경에 적응하면서 살아왔고, 이것은 나이든 사람이라고 해서 예외는 아니다. 세상은 항상 변해왔고, 사람들은 거기에 어떻게든 적응해가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세상이 너무 빠르게 변하면서, 사람들이 아무리 적응하려고 노력하도 충분히 적응하기 전에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시대가 된 것이다. 사람들에게 요구되는 적응의 능력이 빠르게 변하는 세상 그 자체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순히 태어나서 죽을 때 까지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문제이다. 변화가 느린 세상에서 적응이 단단한 땅 위의 평균대 위에서 균형을 잡는 것이었다면, 변화가 빠른 세상에서의 적응이란 심하게 흔들리는 배 위의 평군대 위에서 계속해서 균형을 잡아가는 것이다. 어떤 한 상태에서 균형을 잡았다 해도, 그렇게 균형을 잡은 자세가 그 다음 순간에도 균형이 잡힌 자세일 것이라는 보장이 없다. 이것은 아직 세계에 적응하지 않은 젊은 세대에게는 오히려 쉽게 적응할 수 있는 상황이겠지만, 이미 기존의 느린 세계에 잘 적응해 있는 나이가 있는 세대에게는 적응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다.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여러가지 대책이 있어야 하는데, 그 대책은 크게 개인의 노력과 사회의 노력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개인적 노력은 각자 자신이 어떻게든 적응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물론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화하는 세상의 커다란 흐름을 바꿀 수 없다면, 결국 살아남기 위해 변해야 하는 것은 자기 자신이다. 자기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라고 믿고 있는 것을 믿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선행되어야 자신이 아닌 새로운 사람으로 바뀔 수 있다. 어떻게 해서 변하는 세상에 빠르게 적응할 것인가는 다음 글에서 다시 탐구해 보도록 하겠다. (이어서…)

Proudly powered by WordPress | Theme: Baskerville 2 by Anders Noren.

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