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을 바꾸는 것

*늘 그렇듯, 나는 전문적인 철학자는 아니므로 이 이야기들에 대한 참고문헌은 없고 전부 뇌피셜이다. 만약 이 주장에 대한 근거를 요구한다면 댓글로 달아주기 바란다. 그때 가서 찾아보고 없으면 의견을 철회하도록 하겠다.

예를 들어, 본인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노예에 관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자신의 자유의지가 있고, 천부인권이 주어진다는 것이다. 평등, 자유의지, 천부인권에 대해 구체적인 정의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수준은 있을 것이다. 가령, 평등은 모든 사람이 차별 받지 않고, 사람이라는 것 하나만 인정되면 동등하게 대우받는 것을 뜻한다.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은 모든 사람이 자신의 행동을 함에 있어서 다른 누구의 통제를 받지 않고 행동할 수 있다는 뜻이다. 천부인권은 인권, 즉 인간의 권리가 다른 어디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 주어진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이 사람이라는 것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는지, 자유의지는 항상 통제를 받아서는 안되는지, 인권에 어떤 항목이 포함되는지 등은 사람마다 다를 수 있는데, 그 구체적인 논의는 나중에 할 것이다. 그러니까 평등, 자유의지, 천부인권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내용에 동의한다고 하자.

이번에 생각해 보려는 대상은 어떤 노예이다. 노예는 행동과 생각이 자유롭지 못하고, 주인에게 예속되어 있는 사람이다. 다시 말해서, 주인이 어떤 행동을 하라고 요구하면 그렇게 행동하고, 어떤 생각을 하라고 지시하면 그렇게 생각을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대상은 많이 있는데, 그 중 사람인 경우를 노예라고 한다. 이와 같은 노예는 자신의 생각과 행동을 스스로의 자유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데, 이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인생이 괴롭고 빠져나가고 싶을 것이라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즉, 누구도 자발적으로 노예가 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으며, 어떤 이유로든 노예가 된 사람이라면 그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을 것이다. 이와 같은 전제를 두고 보면 노예는 행복할 수 없다.

만약 행복한 노예가 있다면 어떨까? 노예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을까?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라든가 조지 오웰의 “1984”같은 작품을 보면 거기서 등장하는 사람들은 사회와 정부에 예속되어 있는 것 같지만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우리가 그 사람들의 삶에 개입해서 “당신은 행복하지 않아! 깨달으라고!”라고 말해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렇게 말해주는 것은 그 사람들의 행복에 기여하는 것일까?

행복에 대해서 사람들이 보편적으로 인정하는 공통적인 조건이 몇 가지 있다. 가령, 자신이 하고 싶은 일들을 마음껏 할 수 있으면 행복하고, 그렇지 않으면 행복하지 않다. 이와 같은 행복의 기준에는 전제가 하나 숨어있는데, 사람들이 누구나 자유의지를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유의지가 있어야 하고 싶은 일이 생기며, 그 경우에만 사람들은 행복할 수 있다. 자유의지가 없는 경우 이와 같은 형태의 행복은 불가능하다. 자유의지가 없는 인간을 어떻게 상상할 수 있느냐고? 아무리 노예라 하더라도 누가 괴롭히면 싫고, 하고싶은 딴 일을 하고 싶지 않을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상식적이다. 하지만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경우, 노예가 스스로 노예임을 인정하고 자각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노예이고 싶어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 주변 사람들은 그 노예를 그 상태에서 해방시켜주어야 하지 않을까?

주인의 말을 들어보자. “난 저 노예에게 먹여주고 재워주고, 심지어 나가려면 나가라고 했는데도, 스스로 붙어있겠다는걸 내가 어떻게 하나?”

물론 주인의 말이 거짓말일 수도 있다. 대부분의 경우 노예의 주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은 거짓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극단적인, 매우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고 있으니까 저 말이 진실이라고 해 보자.

이번엔 노예에게 가서 물어보자. “저는 여기서 시키는대로 일하고 살고 먹고 자는 것이 행복합니다. 진짜라고요.”

물론 이것 역시 대부분의 경우 거짓말이다. 노예는 주인으로부터 이렇게 말하라고 지시를 받고 시키는대로 대답하는 것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즉,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없다고 봐도 좋다. 하지만 이번에도 극단적인 경우를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 대답 역시 진실이라고 해 보자. 노예는 행복하다. 적어도, 노예는 스스로의 자유의지에 의해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다.

이것은 어떻게 된 것일까?

아무리 노예가 저런 상태에서 예속되어 있는 것을 스스로 원하고 있다 하더라도, 태어나던 그 시점에서부터 노예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라나면서 노예일 것을 교육받고, 학습하고, 자신의 자유의지를 배우지 못하고, 이것이 행복이라고 배우며 자라났기 때문에 저 상태가 되었다는 것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상식이라는 이름 하에 한가지 절대적인 가정을 하고 있다. “태어났을 때 부터 노예이고 싶은 사람은 없다.” 이것 역시 부정하고 싶지만, 사람이라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보통의 지능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런 경우 “노예이고 싶은 상태”로 자라날 수는 있지만,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하는 상태로 태어나는 사람은 없다고 볼 수 있다.

이제 논의를 한 걸음 나가보자. 여기서 말하고 있는 노예는 어릴 때 부터 “노예 교육”을 철저하게 받고 자라서 그 외의 다른 방식의 삶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상태라고 해 보자. 이와 같은 “노예 교육”이 정당한가, 부당한가, 또는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논의는 나중에 다시 생각해 보도록 하고, 지금 논의하려는 것은 이미 이렇게 된 경우에 그 노예에게 “넌 힘들다”라고 가르쳐 주는 상황이다. 즉, 이미 주어진 환경에서 행복하다고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넌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이야. 그보다 더 행복하고, 더 좋은 삶을 살 수 있어. 그곳에서 빠져나와”라고 가르쳐 주는 상황이다. 이것은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그렇다면, 도덕적으로 항상 올바른가? 그렇지 않다면, 어떤 경우에 도덕적으로 올바른가?

이 노예가 예속 상태에서 빠져나와서 행복하기 위해서는 두가지 사건이 일어나야 한다. 하나는 예속 상태에서 빠져나와야 하고, 두번째는 행복해야 한다. 동어 반복처럼 들리겠지만, 사실이다. 예속 상태에서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노예가 빠져나올 의지가 있어야 한다. 이 노예의 주인은 앞에서 말했듯이 노예가 빠져나가려고 할 경우 얼마든지 보내 줄 용의가 있다. 그리고 우리는 이것이 정말 그렇다고 가정하고 있다. 만약 아무도 그 노예에게 그가 힘들다는 ‘진실’을 가르쳐 주지 않는다면, 그 노예는 현재 상태를 유지하며 살던 대로 살아가려고 할 것이다. 주변에서 그 노예에게 그가 힘들게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도록 해 보자. 그는 살면서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한번도 없기 때문에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힘들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불행하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이런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자신이 힘들다는 것을 설득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전에, 일단 왜 우리는 그에게 그가 힘들다는 것을 알려줘야 할까? 그것이 도덕적으로 올바른 일이기 때문에?

먼저, 그 노예가 느끼고 있는 행복이 사실은 행복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그것을 확신해야 한다. 노예가 행복하지 않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아니, 그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행복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 누가 봐도 행복하지 않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행복이란 매우 개인적인 감정이다. 즉, 우리는 다른 사람의 외형적 상태나 행동을 보고서 그 사람이 행복한지 그렇지 않은지, 만약 행복하다면 얼마나 행복한지, 아니라면 얼마나 불행한지에 대해 판단할 수 없다. 또한, 내가 어떤 상황에서 행복했다고 해서 다른 사람이 같은 상황에서 같은 행복을 느낄 수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다. 최악의 경우, 내가 행복한 상황에 처했을 때 같은 상황에서 다른 사람은 굉장히 불행할 수 있다. 무엇이 행복인가?

어떤 사람이 행복한지 아닌지 알아보기 위해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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