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개판

  • 인혁당 사건에 대한 짧은 생각

    초등학교를 다니는 한 어린 친구가, 나에게 인혁당 사건이 무엇이냐고 물어봤다. 글쎄…인혁당 사건이 뭐지. 내가 공부를 많이 했다는 대학원생이긴 하지만, 나도 잘 모른다. 사실 난 역사에 별 관심이 없다. 인혁당사건이 유신시대의 굉장히 안좋은 사건이었다는 것만 알고 있을 뿐 이게 우리 역사에 어떤 의미이고, 지금의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전해주는지 잘 모른다.

    그래서, 질문에 대답해 주기 위해서 잠시 역사 공부를 해봤다. 음, 1975년의 일이라고 하니 내가 태어나려면 9년이나 남은 시절의 일이로군. 블로그랑 신문 기사들을 검색해보니, 허허…눈물이 난다. 가슴이 아프다. 이건 그냥 자기 말 안듣는 사람 때려잡은 얘기다. 미안하다는 말이나 죄송하다는 말 정도로는 용서가 안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겠다.

    잘못된 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이 잘못인지, 시대를 나쁘게 만든 사람들이 잘못인지, 아니면 그냥 하늘이 무심했던 것인지, 잘잘못을 가리는 것을 불분명하게 만드는 사람들 때문에 고인들의 억울함은 풀리기 힘든 것 같다. 이제와서 무죄판결이 나오긴 했지만,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살아돌아올까, 산 사람이 덜 슬플까. 다행스럽게도 그분들의 노력에 힘입어 현재가 있다. 나 자신이 그렇게 목숨을 바쳐 진정 올바른 일을 위해서 싸울 수 있을까. 그건 아마도 내 평생 불가능할 것이다. 난 그만한 용기를 갖고 있지 않다.

    그러나 내가 살아가는 이 시대의 행복이 과거에 살았던 누군가의 불행으로부터 이루어질 수 있었다는 건 잊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분들이 미래의 우리들에게 바랬던 것은 그런 행복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앞으로 우리나라에서 살아갈 후손들이 우리와 마찬가지로 행복할 수 있도록 과거의 불행을 잊어서는 안된다.

    돌아가신 고인들의 명복을 빈다.

  • 노동자가 목사 폭행

    흥미로운 기사를 봤다.


    경향신문


    마지막 문장이 압권.

  • 나는 왜 기독교를 싫어할까?

    얼마전, 어떤 친한 친구가 내게 기독교를 굳이 왜 싫어하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 친구는 모태신앙인이고, 독실하며, 건전한 신앙인이며 심지어 내 첫사랑이자 짝사랑이다. 그때 대화하면서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던 걸 정리해서 몇자 적어보려고 한다. 내가 성경 공부를 제대로 다 해본게 아니라서 군데군데 틀린데가 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튼.

    1. 신

    사실 성경에 제시된 신은 내가 생각한 신하고는 많이 다른 모습이다. 물론 내가 제대로 알려고 하는 노력을 하지 않았거니와, 알고 싶은 생각도 없으며 앞으로도 별로 알아볼 생각은 없다. 부디 날 이대로 내버려두길 바란다. 만약 나에게 뭔가를 더 알게 한다면, 난 신으로부터 더더욱 멀어질 생각이니 이대로 놔두는게 좋겠다.

    신은 창세기때부터 배배 꼬여있다. 처음부터 선악과를 안만들면 되는걸, 굳이 만들어 놓고서 “이거 먹으면 안돼요, 혼나요~”라고 말하면, 아마 나같은 성격이었으면 먹어보고 싶어 미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뱀한테 낚인 이브만 나쁜년 됐잖아. 우주를 만들 정도의 능력자가 만들기만 하고 없애지를 못하면 허접해 보이지 않는가. 그리고 아벨과 카인 형제도 그렇다. 카인이 어릴때부터 그렇게 나쁜놈이었을까? 현대에는 살인자도 죄를 뉘우치고 새 사람이 되는데(물론 기독교의 영향이 크지만, 죄를 뉘우친 모든 살인자가 기독교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은 아니다) 카인은 새사람도 못되고 박해만 받는다. 물론 카인이 잘했다는 소리는 아니다. 아브라함을 시험하려고 “니 아들을 바쳐봐라” 라고 얘기한 것도 잔인한거 아닌가? 물로 세상을 심판한 얘기, 바벨탑 무너뜨린 얘기, 불로 소돔을 심판한 얘기, 등등은 모두 자기 모순에 빠져있다. 왜냐하면, 서로 싸우고 배척하고 타락할 가능성은 처음 만들어질때부터 인간이 가지고 있는 속성들일텐데, 그게 맘에 안들어서 다 없애버린다는건 결국 자기가 인간을 대충 만들었다는 걸 인정하는 것이니까.

    또한, 예수가 태어날 때도, 그 당시, 베들레헴에서 짱 먹고 있던 헤롯은 무슨 이상한 예언을 듣고서 그동네 아기들을 싸그리 죽여버린다. 예수 빼고. 이건 내 눈에는 예수라서 살아남은게 아니라 살아남았기 때문에 예수가 되었다고 보인다. 그리고 애들 다 죽을거 뻔히 알았을텐데, 굳이 예언을 가서 전하라고 한 신은 대체 무슨 속셈일까?

    애들이 무슨 죄가 있다고 다 죽이냔 말이다. 헤롯 왕도 나쁜 놈이고, 예언을 전한 예언자도 나쁜놈이고, 그 예언을 내린 신도 나쁘다. 뭐, 각자는 자기 할 일은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결과는 누가 봐도 아무런 죄없는 애들만 잔뜩 죽었다. 만약 셋중 하나라도 결백을 주장한다면 그건 정말 무책임한 태도다.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가 없는거 아닌가.

    2. 일부 미친놈들

    대부분의 정상적인 기독교인은 아무튼 별 문제 없다. 내가 문제 삼고 싶은건, 기독교인들도 싫어할만한 미친 기독교인들이다. 내가 만난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내가 단지 교회에 다니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히 악마 취급하고, 건방지고 나쁜 놈으로 취급한다. 아담과 이브가 저지른 원죄를 회개하려면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했다. 그 순간 진심으로 떠오른건 “정말 악마가 되어 줄까?”였다. 그리고 끝내 교회에 안다닌다고 하니까 신이 그렇게 선고한적도 없는데 내가 죽어서 지옥에 갈 거라고 했다. 인간주제에 신이 내릴 결정을 니가 정하는건 월권 아냐?

    아무튼, 진정하고 생각해보니 그다지 흥분할 일은 아니어서, 모든걸 이해하고 용서해주기로 했다.

    대신, 누가 봐도 명백하게 착하고 성실하게 살고서 당당하게 그들이 말하는 지옥에 가 주기로 결심했다.

    3. 창조론 VS 진화론

    창조와 진화의 얘기를 하면 항상 기독교인들은 성경에 적혀있기 때문에 창조론이 맞을 거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성경은 인간이 적은 신의 말씀이고, 자연은 신이 만든 그 자체다. 그럼 인간과 자연중에 어떤 것이 더 믿을만할까? 당연히 자연 아닐까? 따라서, 자연 과학의 결과는 성경의 이야기보다 항상 신의 뜻에 더 가깝다. 신이 우주를 만들었다고 해도 좋다. 하지만 신이 만든건 자연이지 성경이 아니다. 더군다나, 성경은 워낙에 오래된 책이라 전수되면서 오타, 오역, 오독의 우려가 있다. 그리고 이게 맞다는건 사람이 보장한다. 하지만 자연은 항상 그대로 있으며 누구든지 의심가면 언제든지 실험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실험결과가 맞다는 건, 인간이 논리를 받아들인다는 전제 하에, 자연이 보장한다.

    또한, 창조론이 과학이 되려면 일단 성경부터 없애고 얘기를 했으면 좋겠다. 자연 과학에 신이 왜 나오나? 자연이 나와야지. 그리고, 창조론이 옳다고 해도 신의 존재가 증명되지는 않는다. 이미 라엘은 외계 지성체에 의한 인류 창조를 얘기하고 있다.

    성경에 좋은 말이 많이 나온다는건 알겠지만, 그건 평범한 사람들의 입장에서 볼 때는 그냥 오래된 이야기책이지 그 안에 있는게 전부 맞는건 아니다.

    대략 이정도의 이유를 들 수 있겠다.

    끝으로 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 기독교라는 종교 자체를 싫어하는것은 내 종교적 신념이다.

    너가 남에게 받고 싶은것을 그대로 남에게 행하라. 예수가 한 말이다. 어떤 기독교인이든, 내 종교적 신념을 바꾸려 한다면 나 역시 그에게 그렇게 노력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두길 바란다. 그리고, 그 기독교인이 버틸 수 있는 만큼은 나도 독실한 반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 또 색깔론 공세

    *이 글은 중앙대 대학원신문에 기고한 글입니다

    최근 K-리그 축구 경기 도중 심판에게 욕설을 내뱉은 이천수 선수가 6경기 출장정지 처분을 받았다. 최근 한나라당의 김용갑 의원은 그들을 심판할 권한을 갖고 있는 국민을 모욕했으니 피선거권을 6번정도 제한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용갑 의원이 10월 26일에 국정감사에서 한 발언들과 관련되어 엄청난 양의 말들이 오가고 있다. 관련 보도 내용을 살펴보건대, 김용갑 의원은 자신보다 조금만 왼쪽에 있어도 모두 빨갱이로 몰아붙일 수 있는 힘을 가진 것 같다. 물론 김용갑 의원의 발언이 모두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주관적인 판단에만 근거를 두고 사실인 것처럼 얘기하는건 국회의원으로서 해서는 안될 일이다. 공식 석상에서 나오는 반말이나 빈말로 주고받는 감정 싸움은 다 용서하고 넘어가주자. 하지만 적어도 국회의원이라면 국민을 대표하여 통일부 장관을 질책하는 사람답게 국민 모두가 동의할만한 근거와 논리를 사용하여 통일부 장관이 변명조차 못할만한 날카로운 질의를 했어야 한다.

    비단 특정 정당, 특정 의원에게만 국한된 일이 아닐 것이다. 많은 국회의원들이 근거나 논리 없이 주장만 반복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 국정감사에서 논란이 된 색깔론은 대표적인 억지 주장의 예라고 할 수 있겠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그들의 반복된 억지 주장으로 야기된 국회 파행으로 계류되는 중요한 사안들이 너무나 많다. 이런 사람들이 이끌어가는 국회에서 제대로 된 정책이나 법령이 나오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다.

    내 생각에, 국회의원들이 중점적으로 고민해야 하는 것은 내년 대선에 어떻게 이기느냐가 아니라 무엇이 국민들을 위하는 길인지 고민하고 논의하여 올바른 결정을 내리는 것이다. 국가의 중요한 일들을 결정하는데 있어 여러 의견들이 대립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그 싸움의 무기가 치밀한 논리와 명확한 근거가 되어야지 권위주의와 큰 목소리가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색깔론? 이제는 그만하기를 바란다. 정치인들이 색깔론으로 상대를 공격하는 이유는 그것이 지금까지는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미 개개인의 사상을 국가가 통제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니다. 나는 정치인들이 허울뿐인 색깔론으로 국민들의 시각을 칠하려 하지 않고, 합리적인 주장을 통하여 상대를 제압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치밀한 논리로 상대를 벙어리로 만드는 손석희 교수를 조금이라도 닮기를 바란다.

  • 우주의 가을

    세상이 혼란스럽다보니 이젠 별게 다 낚시질을 한다. 며칠전 대학원 연구실에서 선배들이랑 저녁 먹으러 가는 길에 잠깐 누가 뭐 물어본다고 해서 선배들은 일단 먼저 가고 나만 낚여줬다.

    참고로 둘 다 남자였다.

    “안녕하세요, 저희들은 다른 대학에서 왔는데, 저는 미술 전공하고 환경과 생태에 관심이 많은 사람입니다”

    “아, 네…”

    “여쭤볼게 있는데, 바쁘세요?”

    “저녁 먹으러 가야 하는데요”

    “1분만 시간을 내 주세요”

    “에…1분만”

    “대학원생이세요?”

    “네, 대학원 다니죠”

    “그럼 한 20대 후반? 30대 초반?”

    “…”

    사실 이 시점에서 쌍욕 하면서 면상을 후려 팰까 하다가 참았다. 2006년 현재 내 나이 23살이다. 죽여버릴까?

    “23살인데요”

    “아, 대학원생이라고 하셔서 착각했습니다”

    “…”

    사실 이 시점에서 이미 이 사람들은 내게 신뢰를 잃은지 오래다.

    “혹시 우주의 가을에 관해서 들어 보셨나요?”

    “…”

    그냥 도망 나왔다. 형들이 기다리고 있을테니까.

    사실 그 이전에도 우주의 가을에 관한 이론은 꽤 자세히 들어본적이 있다. 이쪽 사람들은 굳이 날 붙잡으려고 하길래 인도적 측면에서 잡혀준건데, 내 나이를 틀리다니. 가장 중요한거 아냐? 사람 나이도 못 알아볼 정도의 통찰력으로 우주에 가을이 오는지 안오는지 어떻게 알겠다고…쯧쯧.

    우주의 가을에 관한 사상을 나는 전혀 믿을 수 없다. 기껏 공부했다는 사람들이 위와 같은 짓이나 하고 다니니 신빙성이 있을리가 있나. 그것도 그거지만, 우주의 역사는 대략 100억년이고, 아무리 짧게 잡아도 50억년보다는 오래 됐다. 우주의 가을에 관한 이론에서 얘기하는건 수천년 단위이고, 길어야 수만년정도 된다. 뭐, 수십만년이라고 해도 좋다. 겨우 우주 전체 역사의 1%를 설명하는 이론으로 우주 전체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다면 그건 정말 코끼리를 손가락으로 한번 건드려보고서 그의 모든것을 알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엄청난 비약이다.

  • 도덕경 : 내가 좋아하는 책

    난 종교가 없다. 다만, 종교 비슷하게 뭔가 갖고 있는 관념같은건 있는데, 그중 하나에 영향을 미친 책이 노자의 도덕경이다. 도덕경에는 그냥 뜬구름 잡는 소리가 5천글자가 들어가 있는데, 그 뜬구름 잡는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서 읽는 사람들마다 다들 자기 맘대로 해석한다. 얼마나 좋은 일인가. 노자는 책을 한권 지었으나 그 책을 읽는 사람이 각자가 전부 맘대로 해석할 수 있으니 그 각각이 모두 한권의 책이요, 따라서 노자는 책을 읽은 사람만큼의 책을 지었다고 해도 된다. 이것이야말로 궁극의 원 소스 멀티 유즈가 되겠다. 아무튼, 나는 노자의 책을 읽고서 인생의 전반적인 것들에 대해서 생각을 다시 할 수 있게 되었는데, 그중 몇가지를 이 글에서 적어 보고자 한다.


    주의사항 : 어느 장의 전부를 인용하지 않고 일부만을 이용할 것이다. 따라서 장 전체를 읽었을 경우에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는 점을 미리 일러둔다. 내가 적은 글은 다만 나의 생각일 뿐이며, 도덕경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은 직접 원본이나 번역본을 찾아서 읽기 바란다.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 불변의 도가 아니다. (1장)

    말은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말은 사람과 함께 살아있으며, 사람이 변하면 함께 변해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영원 불변이 아니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영원 불변이라고 생각하는 “그 무엇”이 될 수 없다. 이 문장은 도덕경의 모든 것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는 문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말이나 글자로 기록되어서 남에게 전달될 수 있는 모든 것은 영원 불변의 도를 표현할 수 없다. 심지어 도덕경조차 그것은 불가능하다. 노자 스스로도 도덕경에 도를 본질 그대로 적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만 그는 도덕경에 도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길이라고 자신이 생각한 것을 몇자 적어두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진리라는 것은 찾아볼 수 있는 어디에도 없다. 다만 그것은 찾을 수 없는 곳에 적당히 존재할 것이다. 그것이 실제로 무엇이든, 그건 중요한게 아니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을 믿고 관철해 나가는 것이다.

    발끝을 제껴 디딘 자는 설 수 없고. 가랑이를 한껏 벌린 자는 걸을 수 없다. (24장)

    가랑이를 한껏 벌려봐라. 걸어갈 수가 없다. 똑바로 서 있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가랑이를 벌린 것은 힘든 자세이다. 즉, 부자연스러운 자세이다. 부자연스러운 자세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모든 것은 자연스러운 자세로부터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의 일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로서, 자연스러운 상태일 때 모든것이 순조롭게 돌아가고 부드럽게 굴러가는 것이다. 부자연스러운 상태에서 무언가를 하려고 하면 일이 순조롭게 돌아갈 수가 없다. 자연스러움과 부자연스러움은 스스로 판단할 일이다. 사람의 본성은 자연에서 왔기 때문에 무엇이 자연스러운지는 자신의 마음에 비추어 물어보면 될 것이다.

    앞으로 그것을 약하게 만들고자 하면 반드시 우선 그것을 강하게 만들어야 한다

    앞으로 그에게서 빼앗고자 한다면 반드시 우선 그에게 주어야 한다. (36장)

    음? 이상한 말이다. 풍선은 불면 불수록 커지지만 너무 많이 불게 되면 터져버려서 결국 쪼그라들어 버린다. 그 어떠한 세력도 영원할 수는 없다. 너무 강한 세력은 더 강해질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게 되고, 그 한계를 넘게 되면 망하게 마련이다. 사업을 계속해서 유지시키고 싶다면 일단 줄이는 것이 필요하다. 여기서 말하는 건 대단히 추상적인 얘기라는 점을 명심하자. 이 말을 있는 그대로 현실에 반영하면 100% 확실하게 망한다. 내가 얘기하고 싶은건, 자신이 하는 사업이 어느 정도 커져서 그냥 놔둬도 금방 망하지 않을 정도라면, 그것을 더 키우기 위해서 힘쓰는 부분을 줄이고 그동안 신경쓰지 못한 부분을 발전시키기 위해서 다른 곳의 자원을 끌어다 쓸 수 있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대략, 몇가지 이야기를 적어 보았다. 내가 사는데 어떤 철학이라고 한다면, 이정도 얘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