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ky gamble

Sung by “Hayashibara Megumi”, from “Slayers” OST

世間は猛スピードで未来に向かっているのに 세상은 빠른 속도로 미래를 향해 가고 있는데
Ah 今日はまたつまずき スネた自分と戦ってる My Heart 지금은 넘어져서 토라진 자신과 싸우고 있는 내 마음

どんな 強い相手にも背を向けず生きてきたよ 아무리 강한 상대라도 등을 향해 살아가고 있어
なのに良い子達に先をこされっぱなし 그런데 좋은 사람들은 잔꾀를 못 쓰지

うそでしょう?ジョウダンじゃない 거짓말같지 농담이 아냐
ピカピカの才能すててしまうなんてもったいないし 반짝이는 재능을 썩히기는 싫잖아
神様にもらった一度きりの人生に 신에게 받은 한번뿐인 인생을
勝負を賭けましょう 逆転を信じて 승부를 걸어서 역전을 믿어

自由を手にするのは そんなに楽じゃないから 자유롭게 되는건 그런 즐거움이 아냐
まぁ チョットひと息ついてあせらなくても逃げないよ My Dream 뭐 조금 쉬다가도 조급해 하지 않아도 내 꿈은 도망가지 않아

冷た瞳をした大人になるのはゴメンだから 차가운 눈동자를 하고 어른이 되는건 미안하니까
Fight 出してき合い入れて もっと情熱的に 싸워 나가, 푹 빠져서, 좀 더 정열적으로

自分より大きなハードルを選んで 자기보다 더 높은 허들을 골라서
超えてしまおうメゲないで行こう 넘어서고야 말겠어, 포기하지 않고 갈거야
神様にもらった一度きりの人生よ 신에게 받은 한번뿐인 인생을
勝負は最後までわからない Give me a Chance 승부는 최후까지 모르니까, 기회를 줘

やめてよジョウダンじゃない 그만둬? 농담이 아냐
ピカピカの才能 フル回転タフな底力 반짝이는 재능을 최대한 발휘하는 저력
残された直線差す脚はすごいから 남겨진 직선은 멋지니까
勝負は最後までわからない Give me a Chance 승부는 최후까지 모르니까, 기회를 줘

自分より大きなハードルを選んで
超えてしまおうメゲないで行こう
神様にもらった一度きりの人生に
勝負を賭けましょう 逆転を信じて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

오늘 읽은 책 “물질의 궁극원자 아누(문성호 저)”는 굉장히 독창적인 책이다. 지금까지 살펴봤던 다른 마도서와는 달리, 우리가 이 세상에 대해 지금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우주의 전부일 것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던짐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신비학에 빠져들도록 만드는, 굉장한 매력과 마력이 있는 책이다. 따라서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야 한다.
이 책에서 저자는 책의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아누”라고 하는 기본입자가 우리 우주를 구성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것은 블랙홀이거나, 초끈이거나, 아니면 그와 비슷한 무언가이거나, 대충 그런 것이다. 참고로 아누(Anu)는 단수와 복수가 같은 단어로, 복수형을 쓰기 위해 s를 붙이지 않는다고 한다. 붙이면 큰일나는 것 같다.
저자는 자기가 공부 안해서 모르는 건 전부 우주의 신비, 밝혀지지 않은 진실, 과학의 한계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고 여러 실험과 논문에서 나온 주장들 중에서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문장만 쏙쏙 골라서 인용하고 있다.
굉장히 흥미로운 사실은, 아누로 이루어진 원자의 구조를 어떻게 보았는가 하면, 투시력을 가진 사람들이 관찰한 결과로 알아냈다고 한다. 그리고 온갖 신비학에 나온 이야기와 알려져 있는 과학적 사실들을 뒤섞어서 그 모든 것을 아누라는 개념을 통해 설명할 수 있다고 한다.
판타지 소설 쓸 때 설정에 참고할 수는 있을 것 같은데, 그 이상의 가치는 없는 책이다. 나는 이런 내용으로 500페이지 이상의 글을 쓸 수 있는 저자의 재능이 부러울 따름이다.

비빔밥

가령, 이런 것이 가능하다. 도시락 비밤밥을 만들 때, 섞기 전 그 안에 있는 재료의 위치를 모두 다 알고 있다고 해 보자. 그 다음, 도시락을 잘 흔들어서 섞어주면 비빔밥이 완성된다. 그렇다면 이 경우, 섞기 전과 섞은 후에 같은 위치에 있는 재료가 적어도 하나는 존재한다. – 고정점 정리.

한편, 비빔밥을 한참 섞다보면 언젠가는 섞지 않았던 원래 상태로 되돌아가기도 한다. 즉, 섞더라도 하다 말아야지 너무 섞다보면 안 한거랑 같아진다는 뜻이다. – 푸앵카레의 재귀정리.

한반도 평화 이야기

한반도 정세가 급변하고 있다. 분단 이후 2000년도 까지 변한 것 보다, 2000년도 이후 지금까지 변한 것이 더 많고, 2000년도 이후 2017년까지 변한 것 보다, 2018년에 변한 것이 훨씬 많다. 그정도로 요즘의 한반도 정세는 시시각각 변하고 있다. 예전에는 서로의 가족과 친구를 죽이고 나라를 갈라먹은 불구대천의 원수였고, 그 이후에도 전면전이나 총력전의 형태가 아니었을 뿐 국지적인 도발과 무력충돌은 이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최근 북한은 인류가 만든 가장 위험한 무기인 핵 탄두와 그것을 전 세계에 실어나를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기술 개발에 거의 성공했다. 어쩌면 완전히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랬던 북한이 올해는 완전히 태도를 바꿔서 남북정상회담을 여러 번 하고, 북미정상회담도 하고, 그 결과로 핵무기 폐기, 미사일 개발 중단 및 폐기, 종전선언을 하겠다는 이런저런 평화 분위기를 내고 있다. 여기서 나는 방금 “북한”이라는 주어를 사용했다. 이 문장에서 “북한”이 주어가 될 수 있는가?

북한은 민주주의 공화국이라고 자칭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전제왕권국가다. 세습도 3대째 하고 있고, 국가 지도자에게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이 집중되어 있다. 민주주의와 정 반대인 정치 체제를 갖고, 공화국이랑 양립할 수 없는 권력 체계를 갖고 있는 것이다. 이 상태에서 “북한”을 주어로 사용하는 것은 곧 “북한의 지도자”를 주어로 사용하는 것과 같다. 예를 들어, 남한의 경우 민주주의 공화국이고, 제도적으로나 실체적으로나 그렇게 되어 있다. “남한”을 주어로 사용할 때는 “남한의 대통령”이라는 뜻이 될 수도 있고, “남한의 시민들”이 주어가 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둘의 의견이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북한은 그렇지 않으며, 북한의 외교나 행정에 대해서 북한 주민의 의견을 물어보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북한은 전제왕권국가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한반도에 존재하는 두 세력의 대립을 평화 분위기로 만들기 위해서 무엇이 중요할까? 두 세력이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확인하고, 또한 약속하며, 그 약속을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 두 세력이 서로 싸우지 않겠다는 뜻을 나타내려면, 두 세력에 소속된 수많은 사람들 중 누구의 뜻이 중요할까? 남한의 경우 대통령을 뽑고 권력자를 교체할 수 있는 선거권자들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 선거권자는 당연히 남한의 일반 시민이며, 다수가 평화를 바란다면 대통령은 평화를 대변해야 한다. 반대로, 다수가 전쟁을 원한다면 대통령은 전쟁을 선포해야 할 것이고, 대통령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다음 번 대통령은 전쟁을 공약으로 내건 후보가 당선될 것이다. 북한의 경우 지도자의 뜻이 가장 중요하다. 북한 주민이나 지도층의 의견이 지도자에게 전달되어 지도자가 뜻을 바꿀 수는 있겠지만, 그 의견에 반하는 결정을 하더라도 그 지도자가 감당해야 할 책임은 없다. 정권 교체라든가 탄핵과 같은 책임이 없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남한이 제 3자가 아니라 한반도 평화와 분쟁의 당사자인 입장에서, 남한의 대북 정책은 북한의 누구를 겨냥해야 할까? 당연히 북한의 지도자이다. 북한의 지도자가 원하면 평화가 이뤄지고, 북한의 지도자가 지시하면 전쟁이 일어난다. 북한의 주민이 평화를 원한다고 전쟁이 사라지지 않으며, 북한의 주민이 도발한다고 전쟁이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북한의 지도자는 대북 정책의 핵심이다. 그의 생각과 의도를 정확하게, 적확하게 파악하여 그에 맞게 대처하고, 그 결과로 남한의 국익이 최대가 되도록 하는 것이 최선, 최적의 대북 정책이 된다.

역사속에 지나간 정권들, 대통령들의 대북 정책을 보면 다양한 정책들이 있었다. 무조건 점령해야 할 적으로 간주하기도 했고, 틈만 보이면 남침할 괴뢰집단으로 보기도 했으며, 화해와 협력으로 동반성장할 대상으로 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냥 뭘 해야 하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정책도 있었다. 그 모든 정책에 대해서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의견이 있고, 나 역시 맘에 드는 정책과 싫어하는 정책이 있으며, 내가 좋아한다고 해서 올바른 정책이라고 확정할 수도 없다. 다만 그 정책이 적용된 후 나타나는 결과에 따라 좋은지 나쁜지 판단할 수 있을 뿐이다.

과거의 대북 정책을 요약해 보자면 고통받는 북한 주민에 대한 인도주의적인 지원, 북한 정권에 대한 압박, 북한의 대외적인 경제 제제 등으로 쓸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잘못되었다, 틀렸다고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 맘에 들건 들지 않건 이 정책들은 당시의 실권자에 의해 채택되었고 추진되었으며 실제로 적용되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남북관계의 악화, 한반도 위기 고조 등으로 나타났다. 이 조치들의 특징을 보면, 북한 주민에게는 친화적인 정책이고 북한 정권에게는 적대적인 정책이라는 것이다. 이 정책을 채택한 사람들은 이 정책을 적용하면 북한 주민의 힘이 강해지고 북한 정권의 힘이 약해져서 북한 주민이 정권에 대항하는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실제로 일어난 일은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은 악화되었고, 남북관계는 더 나빠졌으며, 전쟁위험은 높아졌다. 이렇게 된 상황이 이런 정책을 사용했을 경우에 나타나는 필연적인 결과인지, 아니면 정책은 괜찮았는데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된 것인지 판단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떤 경우든 결과는 그렇게 된 것이고, 이 정책을 계속 적용한다고 해서 상황이 바뀔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그 정책이 유지되어 왔고, 결과는 다들 알고 있듯 더 나빠졌을 뿐이다.

2018년 현재 현직인 문재인 대통령의 대북 정책은 이와 반대로, 북한 주민 인권이나 상황 개선에 직접적인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다. 그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뜻이 아니다. 대북 정책의 대상이 북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정권이라는 뜻이다. 현재 북한 지도자인 김정은의 기분을 좋게 해주고, 비위를 맞춰주고, 그의 정권을 보장해주고 있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이다. 그렇게 했을 때 북한 주민의 인권 상황이 얼마나 개선될지는 알 수 없다. 2018년 9월의 남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은 15만명의 인민을 동원하여 집단체조를 선보였다. 그걸 보고 문재인이 웃으며 박수를 쳐야 했느냐는 비판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중요한건 그걸 보고 문재인이 박수를 치건 치지 않건 북한 주민들의 인권은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며, 또한 문재인이 거기에 기분 좋게 박수를 쳐 준다면 김정은의 기분이 좋아져서 남북관계가 좋아질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사람들은 대북 제제를 해제하고, 경제적 지원을 약속하고, 정권을 보장하는 것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악화시킬 것이며, 통일을 더 멀어지게 할 것이라고 한다. 아마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주민을 위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는가? 북침 무력통일 뿐이다. 북한 정권을 무너뜨리지 않으면 그 상황은 절대 개선되지 않는다. 물론 그것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을 의미하며, 운이 좋으면 한반도의 2차 한국전쟁으로 끝날 것이고, 제 3차 세계대전이 될 수도 있는 중대한 위기 상황이다. 그 사태는 누구도 원하지 않는다. 북한 주민의 인권이 아무리 탄압받는다 해도 전쟁을 원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특히, 그 전쟁이 세계대전으로 번질 수도 있는 것이라면 말이다.

현재 한반도 정세에서 북한의 존재는 어떤 하나의 무력집단 정도로 치부할 수가 없다. 북한은 남한이 인정하느냐와 무관하게 하나의 독립된 국가로 기능하고 있으며, 국가의 성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졌느냐 또는 정권의 정당성이 있느냐와는 상관 없이 북한은 한반도 북쪽에 자리한 하나의 독립국이다. 남한은 북한 정권을 인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면 어째서 남한은 한반도 북쪽의 국토를 무단 점거한 괴뢰집단을 토벌하지 않고 지난 60여년간 그냥 두고 있는 것일까? 심지어 북한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강했던 시절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시절에도 북한을 토벌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정권을 유지하려는 정치적 이유에서 그랬을 거라 생각하지만, 그 와중에 북한은 세계 속에서 하나의 독립국으로 자리잡았고, 북한이 점령한 땅을 “대한민국”의 “영토”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되었다. 미국같은 강대국이 가만히 있으라고 해서 가만히 있을 뿐 그쪽이 우리 영토 맞다고 생각하는, 주장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럼 미국을 설득할 생각을 해야지 어째서 그걸 핑계로 두고 가만히 있는가? 북한은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와 무관하게 실질적으로 독립국이다.

하나의 독립국으로 자리잡은 북한에 대해, 우리가 북한 주민의 인권을 걱정하는 것은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인권을 걱정하는 것과, 시리아 난민의 인권을 걱정하는 것과, 소말리아 국민의 인권을 걱정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냥 걱정스럽다는 말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다만 그 대상이 바로 옆에 붙어있는 나라이고, 같은 민족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이라는 인식이 있다보니 좀 더 애착이 가고 불쌍한 것 처럼 느껴질 뿐이다. 북한 주민들의 인권은 북한 내부에서 확립되어야 할 문제고, 그걸 외부인인 우리가 어떻게 할 수는 없다. 그걸 어떻게 하자고 하면 북한 인권 상황에 우리가 개입해야 하고, 독립국의 내정에 개입하려면 무력을 사용해야 하며, 그 무력은 군대가 담당한다. 그리고 군대가 다른 나라에 가서 무력을 사용하는 행위를 전쟁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건 아무도 원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까 그런 방식으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 결국 남한이 국가로써 할 수 있는 것은 북한 정권과의 상호작용이며, 대북 정책의 목표는 남한이 원하든 원치 않든 북한 주민이 아니라 북한 정권이 된다. 그리고 북한 정권은 남한이 무너뜨리기에는 쉽지 않은 권력과 세력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힘으로 제압하기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접근할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대화와 타협은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 일단 누구와 해야 할까? 이 글에서 계속해서 이야기했지만, 북한의 권력은 지도자에게 집중되어 있고, 북한의 현재 주인은 김정은이다. 당연히 대화도 타협도 김정은과 해야 한다. 김정은은 북한의 대표자이자 지도자이므로 김정은과 대화를 하려면 남한도 대표자가 나서야 하고, 남한의 대표자는 대통령이다. 남한의 대통령과 북한의 지도자가 만나는 상황을 남북정상회담이라고 한다. 타협이란 무엇인가? 서로 다른 의견과 이익을 가진 둘 이상의 세력이, 모두가 의견을 고집한 결과 모두가 손해를 보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서 각자의 의견이나 이익을 포기하고 양보하여 최악의 상황을 피하는 방법이자 과정이다. 즉, 그 누구도 한치의 손해도 없이 타협할 수는 없다. 그건 타협이 아니라 고집이나 독선이다.

이번 2018년 9월 남북정상회담을 비판하는 사람 중에는, 얻은 것도 없이 양보하기만 잔뜩 해주고 북한에 퍼주기만 하고 우리는 많은 것을 잃었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실제로 그럴까?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9월 선언문을 보면, 일단 형식적으로라도 양쪽이 서로 무언가를 포기하고, 서로 양보하고, 서로 주고받는 것으로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북한이 무언가를 얻었다고 하면 남한도 무언가를 얻은 것이고, 남한이 아무것도 얻지 못했다면 북한도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남한이 선언문을 지키면 북한도 그 선언문을 지킬 것이고, 북한이 만약 그 선언문을 깨트린다면 남한 역시 깨트려도 되는 것이다. 앞으로 그 선언문의 구체적 이행 과정에서 남한이 조금 더 손해를 보거나, 북한이 조금 더 손해를 보거나 하는 일들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놓고 동등한 양보와 이익이 되지 않았으니까 선언은 깨졌고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할 것인가? 그걸 “대화와 타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고 할 때, 그 통일은 “평화 통일”을 뜻하지 “무력 통일”이나 “적화 통일”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을 남한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평화 통일”이라는 두 단어에서 무엇이 더 중요할까? “평화”인가? 아니면 “통일”인가? 각자 답을 알고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글을 맺는다.

매트랩의 미친 문법

매트랩의 문법은 쉽지만 골때린다. 예를 들어, 함수에 키워드로 변수를 넘겨줄 때 fn(x,y,’kwdname’,keyvalue) 이런식으로, kwdname을 쓰고 “그냥 그 다음에” 거기에 해당하는 값을 써주는데, 다른 언어에서는 그런걸 지원하지 않거나, kwdname 다음에 쉼표(,)가 아니라 다른 기호(예를 들어 =라든가)를 써서 두 값이 이름과 값으로 짝지어진 것을 구별해준다.

그렇다. 한국어 중에는 알고도 헷갈리는 단어가 많다. “사과”라든가 “패자”라든가. 하지만 프로그래밍 언어에도 그런게 있으면 굉장히 골때리는데… 매트랩에서는 작은따옴표를 여러가지 용도로 쓴다. ‘를 숫자 뒤에 쓰면 켤레복소수, 행렬 뒤에 쓰면 공액행렬, 행렬 뒤에 점 붙여서 .’ 이렇게 쓰면 전치행렬, 그리고 문자열 앞뒤에 붙이면 그냥 문자열. 물론 .도 여러가지 용도로 쓴다. 소숫점으로도 쓰고 프로퍼티 접근에도 쓰고 *와 .*를 구분하는 용도로도 쓴다.

이미지: 텍스트

함수를 function y=my_func_name(x)로 정의하는데 return이 있는게 아니라 끝부분 쯤에서 y=0.5 이런 식으로 값을 넘겨준다. 물론 값 여러개를 한번에 넘겨주는걸 “최대한 쉽게” 구현하기 위해서 그랬다는 건 알겠는데, 함수가 언제 “끝나야”하는건지 알기가 어렵다.

연산자 ./의 양쪽에 둘 다 공백이 있느냐, 둘 다 없느냐, 한쪽만 있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모호성이 없도록 하려면 그걸 사용자에게 알아서 쓰라고 할게 아니라 문법 수준에서 에러가 나도록 해야지….이걸….

이미지: 텍스트

save랑 saveas는 용도와 기능이 조금 다르긴 하지만 둘 다 데이터를 파일에 저장하는 명령어이다. save는 파일 이름을 먼저 입력하고 변수를 그 다음에 지정한다. saveas는 변수를 먼저 입력하고 파일이름을 나중에 지정한다. 보통은, 이런 순서 정도는 통일해두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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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워터의 기적

물은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현상의 근본 물질로, 예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받아온 굉장히 중요한 물질이다. 굉장히 중요한 물질 중 하나이면서, 유일하게 가장 중요한 물질이라고 하더라도 반박하기 어려울 만큼 중요한 물질이다. 그만큼 물은 우리의 생명과 환경과 밀접한 연관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물이 어째서 그런 특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 그리고 물의 어떤 특성이 생명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에 대해서 밝혀내려고 노력해왔다. 이런 노력은 자연과학의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고 있으며, 그 결과 지금은 물의 특성이 많이 밝혀졌고, 그 특성들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잘 알려져 있다. 그것이 비록 물의 특성을 완벽히 설명하고 생명현상을 완전히 규명했다고 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할 수는 있으나, 물의 신비를 밝혀내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은 지금도 끊임없이 계속되고 있다.

자, 그렇다면 이 책에서 설명하는 파이워터란 무엇인가? 파이워터의 정의는 “생체수에 한없이 가까운 물이다”(45쪽) 라고 한다. 이 문장을 읽고 가장 먼저 떠오르는 궁금증은 바로 이것이다. “생체수와 파이워터는 어떻게 다른가?” 생체수라는 것 역시 잘 정의된 학술적 용어는 아닌 것 같지만, 저자의 주장에 의하면 생명체에서 사용하고 있는 물이나 액체 같은 것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다면 파이워터는 생체수에 한없이 가까운 물이라고 하는데, 얼마나 비슷하길래 “한없이” 가까운 것일까? 예를 들어, 생체수 그 자체는 파이워터인가, 아닌가? 생체수 그 자체가 파이워터라고 한다면 그것을 파이워터가 아니라 생체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합리적이지 않은가? 또는, 생체수와 파이워터가 다르다고 한다면 생체수에 한없이 가까운 파이워터는 생체수와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생체수의 어떤 물질의 농도가 1%라고 할 때, 파이워터는 그 물질이 1.1%를 포함한 것인가 0.9%를 포함한 것인가? 알 수 없다.

그렇다 치고, 파이워터의 효능을 살펴보면 동식물의 건전성육, 물고기의 선도보전, 토양개질, 금속의 부식방지, 콘크리트의 강화, 엔진의 연비 개선, 정전기 방지, 수질정화 등의 효능이 있다고 한다.(46쪽)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 이 책에 의하면 물에 섞여 있는 철 이온이 우주에너지를 받아서 철 원자의 핵 스핀과 전자 스핀에 변화가 일어나게 되는데, 그 결과 높은 에너지 상태가 되고 따라서 그로부터 어떤 종류의 전자파가 방출된다고 한다. (46쪽) 그래서 50쪽을 살펴보면, 뫼스바우어 스펙트럼을 측정해서 뭘 알아낸다고 하는데, 뫼스바우어 스펙트럼은 원자핵에서 일어나는 감마선의 흡수와 방출에 관한 어떤 현상에서 나타나는 스펙트럼이고, 우주에너지랑은 아무 관련이 없다.

이 책에서는 파이워터가 위에 적은 신비한 현상을 나타내는 그 이유로 물 분자들이 뭉쳐있는 덩어리(클러스터) 크기가 작기 떄문이라고 한다.(39쪽) 그리고 물 속에 들어있는 철 이온이 위에서 말한 에너지 방출 현상을 통해서 물의 수소결합을 끊고, 결과적으로 클러스터 크기가 작아지기 때문에 좋은 일들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다음에 55쪽에서는 생명의 유전현상에 철 이온이 관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DNA의 유전현상에서 실제로 정보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철 원자라는 것이다. 56쪽에서는 이런 것들을 의심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사례를 하나 제시하고 있다. 무 씨앗은 원래 해가 긴 조건에서 싹이 트는데, 이 씨앗을 파이워터를 이용해서 처리하면 그 씨앗은 해가 짧은조건에서 싹이 튼다고 한다. 즉, 이것은 파이워터에 의해 씨앗의 유전정보가 변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물론 말도 안되는 일이며, 사실이라고 해도 이것이 증명한 것은 파이워터가 발암물질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걸 보여줄 뿐이다. 씨앗에 끼얹은 정도로 유전물질을 바꾸는 화학물질이라면 그건 분명히 발암물질이다.

이 책에 의하면 파이워터의 효능은 굉장한데, 농작물에 뿌리면 영양분도 많고 빨리 자라고 크기도 커지고 수확도 많아지고 … 흙에 뿌리면 흙이 비옥해지고 토질이 개선되고 … 가축에게 먹이면 가축이 건강해지고 심지어 돼지가 비만을 탈출한다(!)는 부작용이 발생할 정도다. 자동차에 파이워터 시스템을 장착하면 연비도 좋아지고 매연도 줄어들고 그리고 결정적으로 사람이 마시면 모든 질병이 치료되고 암도 낫는다. 여기에 반복적인 실험, 시험 결과라면서 구체적인 수치와 통계자료 같은 것을 제시하고 있는데, 실험값은 평균을 제시하고 있을 뿐 표준편차나 실험의 오차, 실험의 구체적인 방법, 실험 장치 등에 관한 이야기는 없다.  심지어 저자가 “이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는데도 말이다. 교양서라서 그럴 수도 있다고 해도, 학계에 보고된 내용도 없다.  있으면 인용하거나 자랑했을 것이다. 교양서라서 논문이나 전문서를 인용하는 것은 너무 깊이 들어가는 것 아닌가? 하는 사람들에게는 물리학 교양서의 대명사인 “엘러건트 유니버스”의 뒷부분에 참고문헌이 몇 개 있는지 세 볼 것을 권한다.

아무튼, 이런 물 관련 사기에 당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굉장히 쉽다. 여러분들도 다 알고 있는 것들이다. 물은 “깨끗한 물을 갈증이 나지 않을 만큼” 충분히 마시면 된다. 이것 하나만 알고 지키면 여러분은 물과 관련된 건강 지식을 전부 알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깨끗한 물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기관마다 다양한 기준이 있겠지만, 어떤 기준을 적용하더라도 “깨끗한 물”이라면 충분하다. 깨끗한 물 보다 더 좋은 물은 없다.

상대적 절대론 – 특수상대성 원리의 수정 (고형석 저)

상대적 절대론 – 특수상대성 원리의 수정 (고형석 저)

정말 오래간만에 보는 “제대로 된” 책이다. 저자인 고형석은 수학교육과에 진학했다가 목회학과 선교학으로 전공을 바꾼 사람이다. 사실 종교인이 쓴 자연과학 계열 마도서 중에 종교를 끼얹지 않은 멀쩡한 책을 찾아보기 어려운데, 이 책의 경우에는 종교적인 부분은 전혀 없이 매우 건전하고 체계적으로 특수상대성 원리를 고찰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책의 내용이 우리 우주의 물리 법칙과 잘 맞아야 할 이유는 없지만.

이 책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특수상대성 이론이 틀렸다”이고 “절대적 관성계와 상대적 관성계가 공존한다.”라고 할 수 있다. 저자가 그렇게 결론을 낸 근거는 “특수상대성 이론의 근본 원리인 빛의 속도가 불변이라는 것이 틀렸다.”라는 것인데, 여기서부터 틀렸다. 이 책의 내용을 살펴보면, 저자는 “강체 자(rigid rod)”를 이용하면 갈릴레이 변환이 맞는 것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원자시계와 빛을 이용하여 거리를 재면 로렌츠 변환이 맞는 것을 증명하게 된다. 즉, 관성계를 구분하기 위한 방법이 두가지가 있으므로 절대적 관성계가 존재한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강체 자”가 실제로 존재할 수 있는가인데, 당연히 그런 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 부분을 읽은 시점에서 그 이후의 논의는 전혀 살펴볼 필요가 없게 되었다. 어쨌든 내용적인 측면에서는 그게 전부고, 의외로 수식이 많긴 하지만 싹 다 틀린 내용이라 건질만한 것은 없다.

이 책의 특징(?)은 저자가 실제로 여러 물리 관련 학술지에 투고했던 논문을 바탕으로 책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논문 답게(?) 참고문헌도 있는데, 이 책 전체를 통틀어서 참고문헌은 딱 두개다. 하나는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당신이 아는 그 책 맞다)이고, 다른 하나는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동역학에 대하여”(당신이 아는 그 유명한 논문 맞다)이다. 그 문헌들의 내용을 저자가 어떻게 이해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사실 특수상대성 이론을 제창한 그 논문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아인슈타인이 “어쩌다가” 빛의 속도가 관찰자에 상관 없이 변하지 않는다고 주장하게 되었는지 알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일단 전자기학을 깊이있게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런 이해 없이 단순히 아인슈타인이 제시한 “광속도 불변의 원리”가 틀렸다고 가정하고 논의를 시작한다면 당연히 그 이후의 논의는 다 틀린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책에서는 갈릴레이 변환이 로렌츠 변환의 근사적 법칙이 아니라 둘 다 성립하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데, 사실 두 변환은 공존할 수 없으며, 만약 갈릴레이 변환이 성립한다면 로렌츠 변환은 성립할 수 없다. 빛의 속도가 매우 빠르기 때문에 우리가 실생활에서 관측할 때는 로렌츠 변환과 갈릴레이 변환 사이의 차이를 구분할 만큼 충분히 정확하게 잴 수 없을 뿐이며, 실제로 우리 우주에서는 오직 로렌츠 변환만이 좌표변환으로 기능한다.

이 저자는 물리학의 근본이 우리 자연을 관찰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한 채 책을 쓴 것으로 보인다. 수학과 이론물리학의 중요한 차이인데, 수학은 공리계에서 출발해서 그 뒤의 논리적 결과들을 이끌어 내는 것으로 충분하며 수학이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과 잘 맞아야 할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유클리드의 기하학에서 사용하는 다섯개의 공리(또는 공준)이 수학적으로는 매우 의미있는 결론들을 이끌어 내고 있지만, 평행선 공리는 실제 우리 우주에는 적용할 수 없다. 반면, 이론물리학은 그 연구 과정과 결론을 찾아내는데 수학적인 기법들을 매우 많이 사용하고 있지만 우리 우주에 실제로 존재하는 자연 현상과 맞아야 한다. 이 책의 서문에서 저자는 물리학자들이 물리학 이론을 그냥 비판없이 받아들이고 있다고 하는데, 사실 물리학자들은 물리학 이론이 실제로 측정할 수 있는 자연 현상과 잘 맞아떨어질 것을 기대하고서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물리학 이론의 채택과 기각은 오직 실험에 의해서만 가능하며, 실험적으로 측정할 수 없는 물리학 이론은 채택되지도 않고 기각되지도 않는다.

11차원 우주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경고: 이 책은 반드시 금서로 지정되어야 하는 책이다. 어줍잖은 물리 지식과 종교적 신앙을 갖고 이 책을 읽어서는 안된다. 당신은 웃다가 죽을 수도 있다.

이 책은 연세대학교 신학과 교수로 재직중인 신준호 교수가 쓴 책이다. 100페이지가 조금 넘는 분량의 가벼운 책인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금서로 지정되어야만 하는 책이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본 마도서는 적지 않은데, 그 중에서도 굉장히 독특한 관점에서 쓰여져 있다. 일단 책 내용을 먼저 소개하자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블랙홀이 성서에 나오는 우주이고, 우리 우주는 홀로그램 우주이기 때문에 우리가 경험하는 물질 우주는 진짜 우주가 아니며, 영적인 우주가 진짜 우주라는 내용이 있다. 그리고 예수는 11차원 우주로부터 부활할 것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이 내용을 도대체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는데, 성경의 나오는 구절과 교양과학 도서(멀티유니버스(The hidden reality), 브라이언 그린 저)에 나오는 구절을 한 구절씩 비교해 가면서 “성서의 이 구절과 멀티유니버스의 저 구절은 이와 같은 관계가 있다”고 설명하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성령의 나타나심을 굳이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다. 블랙홀, 양자얽힘, 홀로그램 우주, 엔트로피, 이런 개념들이 예수님의 기적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성령의 나타나심과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힘들여 설명한다는 것이다. 뭐, 사실 과학이랑 신학을 제대로 공부했으면 그런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걸 다들 알 것이고, 이 책을 진지하게 읽을 사람이라면 내가 여기서 저걸 비판해봐야 아무런 감흥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저런 설명들이 과학적으로 어떻게 틀렸는지 지적하는 것은 그만두도록 하겠다.

그건 그렇고.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는 결국 우주의 아름다움과 위대한 구조가 하나님에 의해서 창조되었고 따라서 신앙을 갖는 것이 매우 자연스럽다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서라는 생각이 든다. 책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어느 불행했던 이웃이 스스로 삶을 마쳤다는 소식을 듣는 그때도, 우리는 한쪽 눈으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기뻐해야 한다. 그것은 끝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 (본문 101쪽)

이런 문장이 있는걸로 봐서는 분명한 것 같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종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서 자신이 믿고 있는 진리를 알리는 책을 쓰는 건 내가 권장하고 싶지는 않아도 어떻게 방해하거나 말릴 수는 없는 일이다. 하지만, 오히려 이와 같은 시도는 신을 인간에게 이용당하게 할 수 있는 여지를 허용하는 것이다.

자, 이 책에서 언급된 대로 우리 우주에 존재하는 여러 존재와 자연 현상들이 성경의 내용과 관련이 있고, 신의 권능이나 섭리 뭐 그런 것들과 실제로 연관이 있다고 해 보자. 그렇다면 인간이 과학, 공학, 기술을 극한으로 추구할 경우 신의 권능을 우리가 ‘활용’할 수 있게 된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서, “신의 뜻에 따라서 사는 것이 사후의 영광을 보장한다.”는 것이 “과학적”으로 밝혀졌다고 해 보자. 그럼 그 다음으로 공학자들이 할 일은  신의 뜻을 어떻게 활용하고, 사후의 영광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 그 최적 조건을 찾아내는 것이다. 즉, 어떻게 기도하고 어떻게 행동해야 확실하게 사후의 영광이 보장되는지 최적 조건을 찾아낸다는 것이다. 그런 교활하고 욕심많은 마음으로 신을 섬겨봐야 신은 응답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겠지. 하지만 신이 인간의 마음을 모두 파악하고 있다면, 인간은 자신의 마음조차 속일 존재들이다.

과학과 공학은 인간의 끊임없는 호기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이 호기심은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자연 현상에 대한 설명을 찾아내고, 아직 만들어지지 않은 장치를 필요하다는 이유로 창조하는 호기심이다. 그 결과, 신비한 현상과 신의 섭리로 설명되어 왔던 수많은 자연현상들의 작동 원리가 밝혀지고, 사람들은 그것들을 이용해서 현대 문명을 만들어 왔다. 초끈 이론이 아직 밝혀지지 않은 이론적 영역에 있는 이론이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실험적으로 증명하거나 부정될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는 과학 이론이다. 초끈 이론의 체계에 신의 섭리를 묶어서 설명한다는 것은 곧 초끈 이론과 신의 섭리를 한 배에 태우는 것이다. 즉, 초끈 이론이 틀릴 경우 신의 섭리도 부정당한다. 반대로, 초끈 이론이 맞을 경우 우리는 신의 섭리를 ‘공학적’으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물론 이 책의 저자는 그것을 신성 모독이라고 말 할 것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이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이유는 자연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고, 만약 신이 우리 우주에 실존하고 자연의 일부라 한다면 연구하면 안될 이유가 없다. 신이 실존하지만 과학자들에게 신성모독을 허용하지 않기 위해서 ‘신의 섭리’에 해당하는 법칙을 그때 그때 바꾼다면? 그건 ‘과학적’으로 연구할 대상이 아니다. 과학자들이 연구하고 있는 자연이란, 그 모습은 엄청나게 다양하지만 작동 법칙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 대상이다. 과학이 발전하기 전에도, 천년 전에도, 백년 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자연 법칙은 변하지 않았고, 변하지 않을 것이며, 오직 변한 것과 변해갈 것은 자연 법칙을 설명하는 관점과 이론일 뿐이다. 과학자들에게 신성 모독이라는 이유로 신을 연구하지 말라고 할 거면 신의 섭리와 과학 이론을 엮는 것 역시 신성 모독이다. 그렇다면 위대한 신을 인간의 연구 영역으로 끌어내린 것은 누구인가? 과학자들인가, 아니면 이 책의 저자인가?

사족: 이 글 쓰는데 정말 어려웠던 것은 글을 쓰는 것 자체가 아니라 이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계속해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는 것이었다. 서두에 적어둔 경고문은 농담이 아니다!

계급 우주론, 물질 계급론

이번엔 두권의 책을 읽어보았다. 먼저 미리 말해 두는데, 계급 우주론과 물질 계급론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으며, 매우 얇은 책이다. 읽는데 10분도 안 걸렸다.

음, 간단히 요약하자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존재”에는 계급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는데, 여기서 말하는 계급이란 그 크기다. 즉, 은하, 별, 원자, 광자, … 등등 존재의 크기에 따라 계급이 달라진다. 자, 이쯤에서 떠오르는 책이 있다. 여러분들은 벌써 잊었겠지만, “티끌 속의 무한 우주”가 같은 내용을 다루고 있었다. 그 내용에서 10의 30승이라는 계수 대신 그냥 “계급”이라는 단어를 쓰면 같은 내용이 된다.

이 책은 입자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티끌 속의 무한 우주”보다는 보다 깊이있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그렇다고 그 깊이가 엄청 깊어지는 건 아니고, 그냥 책 두께만큼 깊어졌다고 해야 하려나. 물질 계급론, 또는 계급 우주론에 따르면 입자들은 모두 회전하는 소용돌이 같은 입자인데 소용돌이의 방향이 같으면 서로 인력이 작용하고 방향이 반대라면 서로 척력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 주장에는 일단 듣자마자 문제가 떠오른다. 소용돌이는 회전축이 존재하는데, 그럼 입자를 휙 돌려주기만 하면 인력과 척력이 바뀌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 회전축이 우리가 사는 공간의 어떤 방향을 향하고 있다면 휙 돌릴 수 있어야 하고, 만약 우리가 사는 공간에 대한 회전에 대해 관련이 없다면 입자 내부에 추가적인 공간이나 차원이 존재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런 추가적인 공간이나 차원에 대해서는 얘기하지 않고 있다. 그냥 이 책의 저자는 그런걸 모르는 것 같다.

사실 제임스 맥스웰이 처음에 전자기장의 통합 이론을 발표했을 때, 그가 갖고 있던 이미지는 톱니바퀴가 공간의 각 지점마다 존재해서 전기장과 자기장에 해당하는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오히려 생각이 꼬이기 때문에, 그 이후 사람들은 톱니바퀴 모델을 버리고 그냥 공간을 퍼져나가는 파동의 이미지를 생각하게 되었다.

소용돌이 두개가 상호작용하는 모습이 합쳐지거나 멀어지거나 하는 현상에 대해서는 사실 물리학적으로 의미있는 이론이 나오고 있는데, 스커미온(Skyrmion)이 바로 그것이다. 스커미온에 대해서 깊이있는 얘기를 하기에 이곳은 적합하지 않고, 나 역시 전공이 아니라 자세히 다룰 수는 없을 것 같지만. 저자가 차라리 이쪽으로 공부를 했으면 어땠을까 싶다.

3성 생식

현대 생물학에서 설명하는 개체의 번식 방법은 유성생식과 무성생식이 있다. 그리고 유성생식은 꼭 두 성이 만나서 번식을 하게 된다. 자, 그럼 이제 성이 여러개 있다고 해 보자. 인간의 유전자가 3중나선이라 3명이 모여야 번식이 가능하다고 치자. 그리고 지금 남자와 여자가 외형적으로 다른 모습을 보이듯이, 세가지 성별의 사람들이 모두 다른 모습을 보인다고 해 보자. 과연 이 상황에서도 성차별이 나타날 것인가? 가령, 어느 한 성이 다른 둘을 압도할까? 아니면 두 성이 연합해서 다른 하나를 압도하게 될까? 아니면 사회적으로 균형잡힌 상태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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