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학술

  • MS의 홈페이지는 파이어폭스에서 제대로 보인다

    이건 잡담 카테고리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전략과 관련된 내용이다.


    http://www.microsoft.co.kr


    위의 링크는 한국 마이크로소프트의 홈페이지 주소다. 가보면 알겠지만, 익스플로러에서는 아주 깔끔하게 보인다. 아, 물론 파이어폭스에서도

    동일한

    화면이 보인다. 아마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도 제대로 보일 것이라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자. 질문. MS홈페이지는 어째서 다른 종류의 웹 브라우저에서도 잘 보이도록 설계가 되어 있을까? MS의 홈페이지 웹 프로그래머/디자이너들이 웹 표준을 준수하여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뭐. 사실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난 저것이 MS의 전략이라고 본다. MS 윈도우즈는 명백히 “운영체제”다. 따라서 이것을 팔기 위해서 “이미” 윈도우즈가 설치되어 있는 사람에게 잘 보여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제품 홍보를 위해서 홈페이지가 제대로 보여야 한다면, 당연히 그 페이지는 윈도우즈가 아닌 다른 운영체제 위에서 돌아가는 웹 브라우저에서 제대로 보여야만 할 것이다. 생각해 봐라. 윈도우즈가 뭔가 알아보러 들어갔는데 글자랑 그림이랑 완전히 딴데 가서 붙어 있고, 뭐가 짝도 안맞고 그러면, 누가 사겠는가. 허접하다고 보지.

    운영체제가 아닌 다른 시장에서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그 다음이 웹 브라우저 홈페이지이다. 대부분의 웹 브라우저를 배포하는 곳의 홈페이지는 자신들이 홍보하는 웹 브라우저 뿐만이 아니라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도 깔끔하게 볼 수 있도록 구성된다.



    [각주:

    1

    ]



    앞서와 마찬가지 이유로 당연히 다른 웹 브라우저에서도 잘 보여야 하는 것이다.

    이런 일들이 최초로 일어난 곳은 생명체 내부의 화학 반응이다. 다들 알다시피 동물은 다른 생물을 먹어서 활동 에너지를 얻는다. 만약 어떤 동물이 다른 생물과 전혀 다른 단백질 구조를 갖고 있었다면, 그래서 사용할 수 없었다면, 이미 아주아주 오래전에 멸종되었을 것이다. 즉, “호환 가능성”은 생존의 중요한 요소이다. MS의 예에서, “영양분”에 해당하는 것은 사용자가 되고, 그로부터 얻는 에너지는 회사의 수익이라고 보면 된다. 이미 사용하고 있는, 즉 이미 내가 갖고 있는 것만 이용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다른 곳에 있는 에너지를 사용해야만 하고, 그렇게 되려면 그 에너지 종류가 내게 적합해야 한다.

    어느 나라가 다른 나라를 지배하고 식민지 통치를 할 때에도, 단순한 무력만으로는 그쪽 국민들을 다 때려잡는 수 밖에 없다. 그쪽 사람들에게 일을 시키고 하려면 그쪽 사람의 언어를 알거나, 그쪽 사람들에게 자기네 나라 언어를 가르치든가, 해야 한다는 점이다.

    pdf포맷은 비록 어도비의 독점적 포맷이었지만 지금은 전 세계의 표준 문서 형태이다. 그것은 어도비가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생성 가능하도록 포맷을 공개했기 때문이다. hwp 포맷은 한국의 대표적인 포맷이지만, 그저 한국의 대표적인 포맷이다. 전 세계에서 한국사람 빼면, 아는 사람 별로 없다. 그것은 한소프트에서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게 무슨 대단한 기술이라고, 진짜로 세계로 나가려면 다른 프로그램에서도 읽고 쓰고 만들 수 있어야 한다.



    [각주:

    2

    ]



    아무리 좋으면 뭐하나, 실제로 사용자가 써야 말이지. 어도비는 당장 수익을 내는 것 보다 파이를 키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 같다. 한소프트는 한국에서만 놀 것 같고.

    또? 우리나라의 대표적 무술, 태권도가 있다. 태권도가 한국의 자랑스러운 국기이고, 전통 무예이며, 전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부끄럽지 않을 무술이라는 점은 인정한다. 그러나 세계 태권도 협회는 한국 협회랑 같은 것 같다. 얼마 전에는 태권도가 올림픽 종목에서 빠질 뻔 했다. 태권도가 세계화 되기를 바라면서 한국인이 태권도 금메달을 못따면 쪽팔려한다. 말이 돼나? 물론 한국이 종주국이니까 한국에서 제일 잘하는 건 당연하겠지만, 진짜로 세계화가 잘 되었다면, 전 세계 이곳저곳에서 챔피언이 나오는게 오히려 자연스럽고, 그래야 더 유명해지지 않겠는가. 생각해봐라. 저기 어디 한국이 어딘지 잘 모르는 나라에서 출전한 태권도 선수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하고, 한국에서 금메달을 땄을 때 하고, 태권도는 어떤 경우에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걸까? 다른 나라에서 금메달이 나왔다면, 적어도 그 나라에는 태권도가 홍보가 되지 않을까? 진짜 태권도를 사랑한다면, 금메달에 목매지 말고 태권도 대회 자체를 즐기고, 좋아해야 한다.

    자기가 아는 사람하고만 잘 지내는 것과, 자기를 모르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 어느것이 더 성공에 도움이 될 것인가.

    1. 확인한 적은 없지만, 아마 맞을 것이다. 내가 쓸 수 있는건 MS 익스플로러, 윈도우즈 버전 파이어폭스, 리눅스 버전 파이어폭스 뿐이었지만, 사파리나 오페라에서 보이지 않아야 할 이유가 없다.

      [본문으로]
    2. 지금은 오픈오피스에서 한글97의 hwp형식은 읽을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본문으로]

  • 양심선언(!?)

    난 지난번 총선때 민주노동당 후보에게 나의 한 표를 던졌다. (이건 사실이다)

    다음 중 올바른 이유는?

    1. 한나라당이 싫어서
    2. 열린우리당이 싫어서
    3. 민주노동당이 좋아서
    4. 후보가 여자라서

    답은 나만 알고 있도록 하겠다. 물론 당신이 짐작하는 그 답이 정답이므로 내게 물어볼 필요도 없다.

  • 선택의 기로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윗분께 말씀드렸는데, 그것이 진실이 아니게 되었다. 애초에 내가 잘못 안 것이고, 실제로는 다른 내용이었던 것이다.

    선택은 다음과 같은 것이 가능하다.

    1. 내가 말한게 맞다고 우긴다.
    2. 모든것을 말하고 빈다.
    3. 진실이건 아니건 상관 없다고 우긴다.
    4. 틀렸지만 난 잘못 없다고 우긴다.



    답이 없다.

  • 블랙홀에 들어가면 정신 차려도 죽는다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7/06/18/2007061801142.html

    딱히 조선일보라서가 아니라, 틀렸기에 적는다.

    “블랙홀에 빠진 우주선 길만 잘 찾으면 산다…”는 제목을 놓고서 본문에 바로 “물론 이 연구결과 자체가 블랙홀에서 빠져나올 길을 제시한 것은 아니다. “는 말이 나온다. 역시 예술적 감각이 돋보이는 제목이다. 왜 제목과 본문이 모순인거냐…

    제대로 된 제목은 “블랙홀에 빠진 우주선 길만 잘 찾으면

    조금 더

    산다…” 가 되었어야 할 것이다.

    부제목으로 들어간 것도 “블랙홀 연구의 새로운 장 열어”인데, 내용은 “신선하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라든가 “사람들의 관심을 끌 것”이라고. 아무리 좋게 봐줘도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는 본문 내용 아닌가 싶다.

    논문을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짐작하기를, 블랙홀 내부의 공간에서 가장자리로부터 특이점까지 도달하는 최장 시간이나 최단 시간, 최단 경로 등등을 계산한 것 같다.



    [각주:

    1

    ]



    물론 실제로 블랙홀 연구의 새로운 장을 여는 획기적인 논문일 수 있다. 여기서 내가 하고 싶은 얘기는 저 기사는 아무튼 제목 및 부제목과 내용이 모순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튼, 블랙홀에 들어간 사람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다.


    넌 이미 죽어있다.

    1. 논문을 읽지 않았으므로 이 얘기는 어디까지나 추측이며, 사실과 관련이 없다.

      [본문으로]

  • 초대칭성(Supersymmetry)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입자로 표현된다. 이 말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의 기본 가설이다.


    http://snowall.tistory.com/8

    우리 우주에 어떤 입자들이 있는지는 위의 글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간략히 보자면, 페르미온과 보존으로 나눠지고, 페르미온들은 쿼크와 렙톤으로 나눠진다. 보존은 빛, W, Z 보존, 글루온, 중력자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입자들은 모두 각각의 반입자를 갖고 있어서 그 종류가 두배로 뻥튀기 된다.

    초대칭성은, 이 모든 입자에 초대칭 짝(Super Partner)이 있다고 하는 가정이다. 즉, 페르미온은 보존 짝들이 있고, 보존은 페르미온 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존들의 초대칭 짝들은 뒤에 ino를 붙인다. 즉, Photino, Wino, Zino, Bino, Gluino, Gravitino라고 한다. 반대로, 우리가 아는 입자들의 초대칭 짝들은 앞에 s를 붙인다. 즉, squark, sup, sdown, scharm, sstrange(?), stop, sbottom, slepton, selectron, smuon, stau, sneutrino등등.

    아무튼, 이걸 보고서 느껴지는 것.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페르미온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보존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페르미온에 보존 짝이 있고, 모든 보존에 페르미온 짝이 있다면, 물질은 힘이고 힘은 물질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딱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일부 영화 제목으로도 쓰인 바로 그 유명한 글귀이다.



    色不異空 (색불이공)

    空不異色 (공불이색)

    色卽是空 (색즉시공)

    空卽是色 (공즉시색)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이때, “색”은 물질적 실체이고 “공”은 마음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양자역학이나 초대칭성 이론을 알았을리는 전혀 없지만, 어딘가 통하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접근해야 하고, 철학이나 다른 감성적인 비유들이 끼게 되면 오해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인간세상의 일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된다.

  • 양자, 파동, 입자

    양자역학을 배우다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개콘의 “같기도”를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양자역학은 모든 입자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했다. 이건 정말 본질적인 “같기도” 스타일의 과학이다. 개그 코너가 웬 과학을 의미하냐고? 글쎄. 내 생각엔, 우주 만물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아니, 입자인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게 둘 다 성립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설명을 해 주겠다.

    파동은 소리이고, 입자는 덩어리이다. 소리, 하면 생각나는게 “노래”다.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른다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파동의 특성이다. 내가 부른 노래를 듣고 감동해서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준다면, 그 동전은 반드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와야 하며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입자의 특성이다. 입자인 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 것 같기도 하다는 뜻은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노래를 했는데, 내 주변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딱 한명만 들은 것이다. 그 사람이 내 노래를 들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의 노래를 들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은 그 어떤 누구도 내 노래를 들은적이 없다. 노래가 파동인 것은 맞긴 한데, 다른 사람은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이 없고, 적어도 한명은 내 노래를 들었으며, 더군다나 정확히 한명만 내 노래를 들었다면, 내 노래는 입자의 특성을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건 잘 모르겠다. 자연의 본질이 그렇다는 말 밖에는 모르겠다. 최근에 MS인가 하는 회사에서는 개방형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를 단 한사람에게만 들리도록 하고 그 주변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얘기한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다.

    입자는 발견되는 경우 단 한곳에서만 발견된다. 파동은 모든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졌다는 뜻은, 발견되기 전에는 어디서든지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만약 발견된다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플랑크 상수가 조금 컸다면, MS가 지향성 스피커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 말하기와 글쓰기

    누가 그랬더라, 사람이 귀가 두개고 입이 하나인건 말하기보다 두배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라고.

    오늘은 교수님한테 미친듯이 혼났다.

    내가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가 독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점에 대해서 한소리 들은 거니까 딱히 변명할 건 없다.

    고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쓴 글들과, 그 글에 많은 분들이 달아주신 댓글을 보면, 나는 글은 잘 쓰는 편인 것 같다. 하지만 오늘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화내는 걸 보면, 나는 말하는 것은 최악인 것 같다. 다른건 모르겠고, 전부터 교수님이 계속 얘기해 왔던 점이 나랑 있다보면 화가 난다고 하시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나를 모를 것이고, 오프라인의 내 친구들은 온라인의 나를 잘 모를 것이다. 두 모습의 나를 모두 아는 사람은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딱히 이중인격인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뿐이고, 말은 순간이고 글은 남기 때문이다. 아예 말을 말자.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치긴 고쳐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내가 말하는 습관이 바로잡힐지, 적어도 남들이 화를 내는 말투는 고쳐보고 싶은데, 이거 참 문제다. 솔직한 성격부터 바꿔야 하나. 꾸미고 입에 발린 말을 해야하나. 아, 이런식으로 블로그에 글로 남기면 내가 진솔한데 다른 사람들이 위선자인 것처럼 오해하겠다. 그런건 아니다. 나의 독설에서 독을 빼야 한다. 근데 단어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니, 난감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능할까. 남을 배려하는 말투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오늘 점심 먹으면서 잠깐 생각해봤던 건데, 나는 내 마음을 내놓고 다니는 것 같다. 마음을 감추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기 때문에 내뱉는 푸념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렇겠지. 위험한걸까.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가? 교수님한테 아주 많이 혼나고 나면, 일단은 반성하는게 아니라 화를 내나? 그렇다고 내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약간의 감정적 동요를 느끼면서, 고치긴 고쳐야 겠다고 진심으로 느끼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답답하긴 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그냥 교수님께 전해드리고 싶다. 그런데 그걸 말로 전할 수는 없다. 말로 전하면 또 기분이 나빠지실 테니까. 뭔가를 바꾸긴 해야 한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난 지금 당장 내일 아침부터 나 자신의 바뀐 모습을 만들어 놔야 하는 강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

    알고 있다. 난 “관습”이나 “예절” 같은걸 배운적이 없다. 나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다. 내가 잘난놈이어서 그런것도 아니다.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건 다 싫었고, 남들이 하는걸 싫어했다. 그 결과, 사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24년간 살았는데 난 아직도 사회가 어색하다. 내 관점에서 보면 참 세상은 이상하다. 나를 바꾸기도 힘든 일이고, 세상을 바꾸기도 힘든 일이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나? 자살? 자퇴? 근데 난 왜 극단적인 낙관을 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난 이 헛소리를 쓰면서도 미래를 낙관한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오늘 교수님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후벼 팠고. 아무튼 교수님께서도 화나시고 답답하시니까 말씀하셨겠지만, 나 역시 힘들다.

    내가 소심하긴 한가보다. A형이라 그런가.

  • 모르는 것은 보약이다

    아이들이 창의력 문제의 답안이라고 쓴 글들을 쭉 읽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수많은 아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랍시고 생각해낸 생각이 다 똑같다는 점이다. 어찌 그리 비슷할 수 있을까.

    문제 유형이, 가령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세요”라고 했으면, 최소한 문제에 제시된 예제는 쓰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아니면 예제를 아주 확실하게 발전시키든가. 인터넷 검색이 아주 좋아진 것도 좋고, 지식인 사이트가 있어서 문제의 답을 물어볼 곳이 있는 것도 좋은데, 이건 문제를 우수답안을 선정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 옳은 것이다. 그게 없으니 창의력이 죽지. 몰개성화 된 답안만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 푸는게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야 배울 수 있을까. 그것도, 답안을 남들과 다르게 내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서 배우려나. 나만 해도 당장 너무 아는게 많아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구별한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해봐야 남들이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어디서 주워들어서 그에 대한 조금 발전된 답을 내놓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르는 초보들이다. 이런 때 아니면 창의력을 발전시킬 시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들 똑같은 생각만 하는 걸까.

    선행학습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몇년 이후에나 배울 내용을 미리 알아봐야 쓸데가 없다. 쓸 수도 없다. 어차피 몇년 후에 다시 배울 텐데. 의미도 없다.



    [각주:

    1

    ]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줄 모르기 때문에 덤비는 것 아니던가. 젊을 때는 세상이 무서운 걸 모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 아니던가. 창의력은 아직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의 뇌는 한번 알게 된 것을 모르게 되기는 힘들다. 이것은 기억과는 다른 얘기다. 기억은 잊혀질 수 있지만, 지식으로서 알게 된 것들은 모르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그때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시기이다. 대부분 이 시기에 상상했던 것들이 평생 써먹는 상상력의 밑천이 될 텐데. 그것은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불가능한 것이다. 피터팬을 보자. 그는 모르기 때문에 날아다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사람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날아다닐 수 없게 된다. 누가 그에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면 여전히 날아다닐수 있을까?



    [각주:

    2

    ]


    더이상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는 남들보다 앞서갈 수 없다. 남들과 같은 수준조차 되지 않는다. 뒤처질 따름이다. 무식한 건 죄가 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것 자체도 자신의 잇점으로 활용해야 진정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1. 야오이인가.

      [본문으로]
    2. 이런점에서 후크는 바보다.

      [본문으로]

  • 믿음

    요새 이슈들을 보자.

    1. 황우석 아저씨 지지자들

    2. 이명박 아저씨 사인 위조

    3. 창조론의 창궐

    선정 순서나 방법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보이는대로 적어 본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멀더와 스컬리의 주장과는 다르게, 진실은 저기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지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저런 류의 거짓말들은 정답을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고, 과연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창조론 얘기 같은 경우, 진실을 아는 것이 신밖에 없는데 과연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신이 직접 계시를 내려서 진화론이 맞다고 하면 창조론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럴리 없다고? 글쎄. 신이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진화론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다뤄져야 한다. 여기다가 신이 쐐기를 딱 박아서 “내가 창조 안했다”고 얘기하는데 여기다가 대고 토를 다는 사람은 지옥에나 떨어지겠지.

    나 역시 무언가를 믿고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나로서는 구별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줄 사람도 없다. 누군가 “그거 구라야, 넌 이미 낚였어”라고 확인해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뭔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와, 어딘가에서 읽어본 얘기와, 내 머릿속에서 적당히 꾸며 본 가설과 이유를 근거로 하여 논리로 포장하여 맞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난 창조론은 틀렸고 진화론이 맞다고 믿는다. 난 황우석 아저씨는 아무튼 구라를 쳤다고 믿는다. 이명박 아저씨는 사인을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부 믿음이다. 이 믿음에 무언가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한테 믿으라고 얘기하려면 뭔가 부족하다. 내가 믿는 것을 남들도 믿으라고, 내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위태위태한 신의 존재만 해도 그렇다. 요즘같은 세상, 신이 있었다면 이딴 세상을 이대로놔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신이 있어서 부도덕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근데 그건 일단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거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세상의 혼란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다.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를 굳이 신의 권능이라든가 누군가의 음모로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간편하다. 딱히 근거도 없지 않은가. 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내세우는 근거라고 해 봐야 성경의 어떤 구절들인데, 그건 이미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이고 벌써 수천년이 지난 얘기다. 그걸 믿는거나 단군 신화를 믿는 거나 거기서 거기다.

    미국 속담인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각주:

    1

    ]



    . 그 반대 얘기도 있던데. 믿는 것만 본다고.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는 이미 결정된 일이다. 진리든 진실이든 바꿀 수는 없으며 변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결정이다. 진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진리만 믿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아집과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들 중에 열린 마음을 갖고 남들의 믿음과 생각을 인정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고 해도 줏대 없다고 욕을 먹는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면, 일단 자신이 믿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고, 틀린 것 같다면 자신의 믿음을 고쳐야 할 것이고, 맞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바꿔야 할 것이다. 문제는 둘 다 힘들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큰소리 치는 것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보지 못했다. 진짜 순수한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당히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많은가. 다 자기 고집에 빠져 사는데, 논리가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메꿀 따름일 뿐이다.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수많은 소식을 접하고, 아주 많은 낚시글들을 보고 있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동된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겠지. 그걸 전부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짜로 의미있는 것은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 밝혀지지 않을 진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언젠가 진짜 진실이 밝혀져서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에서 진실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얘기를 다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이데아의 세상에 살고 있고 나는 그 밑에서 진실의 그림자만 보면서 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할 따름이다. 다 틀렸다. 이건 이미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을 뛰어 넘은 엽기적인 추측에 다름아니다.

    데카르트가 이 방법론을 처음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 아저씨는 맨날 의심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심했고. 그치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답이 없거나 자기가 답이라고 생각하는게 답이니까 별로 의심한 의미가 없다. 진짜 의심은, 자신이 믿는 모든 진실을 의심하고,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불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의심만 하라는 뜻이다.

    뭐, 이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우정이나 애정을 의심하는 쪽으로 가 버리게 되면 의처증이 나오고 친구랑 절교하고 그러는 거지만. 그건 그 사람이 진실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믿는 것이 전부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바람 피운게 의심을 넘어서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람이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한번쯤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것을 싸그리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세상에 진실 중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내가 어제 화장실을 몇번 갔다 왔는지는 내가 까먹어 버리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 단 하나의 진실이 있지 않겠는가. 위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1. Seeing is believing

      [본문으로]

  • 행복론 : 행복은 여기에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행복이란. 사람들이 항상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행복은 그 속성이 악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것은 노자의 도와 통해 있는 얘기인데, 만약 행복이라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불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모든 슬픈 이야기들은 실현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당장 인터넷을 보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웹 페이지가 검색되어 나온다. 구글에서는 현재


    36,500,000개

    의 웹 페이지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걸 보면 행복한가?

    행복해지는 방법의 아주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만족”을 포함한다. 즉,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행복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고, 적응하면 그것이 곧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현재에 만족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가? 물론 욕심부리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못할만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쉽고 어쩌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했다고 해 보자.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입자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데, 입자물리학자가 되면 참으로 배고프게 살 것 같다. 이래저래 힘들고, 돈도 많이 못 벌 것 같고, 미래는 암담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을 갖고 회사에 들어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한다면 어쩌면 좀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거고, 그 돈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쪽이 진짜 행복일까? 사람에 따라서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행복을 찾아서 헤메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당장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할 수는 있다.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다음에,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의 살아온 길을 돌아본다면 그 과거는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뜯어먹고 사는 동물인데 말이다.

    사람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생존율을 높이고 더 많은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냥 지금 편하면 좋을 것을, 과거를 회상해 보면 아쉬운 기억들이 한참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 한번 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당신의 과거에도 만약은 없다. 현재 당신이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여러가지 선택 가능성 중에서 당신이 했던 바로 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어떻게 될지는, 당신의 미래 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 행복하고 지금 괜찮으니까 나오는 배부른 소리라는 얘기다.

    따라서, 그런 후회를 하기 싫으면 애초에 선택을 잘 해야 한다. 현재에 만족하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행복한 그 순간, 당신은 그곳에 멈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고, 당신의 생각을 느리게 할 것이며, 당신을 중독시킬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행복을 원하는 마음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 거기에 멈추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분명 충분히 행복한 상황일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더 높은 행복을 찾아서 떠난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현재에 만족하라고 얘기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 버리면, 나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나는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한순간 한순간을 나의 꿈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행복이다.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