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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제점

    어제 친구가 자취방에 찾아와서 긴 얘기를 해줬다. 요점은 내가 바뀌어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나를 걱정해 주는 친구니까 쓴소리 해주는 건 정말 고맙다. 물론 그 점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교수님이 나를 보는 시각, 후배들이 나를 보는 시각, 다른 사람들이 나를 바라보는 시각이 나를 직접 대면할 때와 나를 보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말할 때 다르겠지. 뒷담화가 내 귀에 들려오니 나로서는 사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혼란에 빠져 있다. 그가 내게 물어봤다. 과학자는 왜 되고 싶은 거냐고. 그에 대해서 내가 대답하기를, “재밌잖아” 라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행동을 고쳐야 한다고 한다. 사실 대인관계 잘 풀어 나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난 그냥 가식적이어도 다른 사람들이랑 대충 인사하면서 지내면 된다.

    사람들은 가식적인걸 싫어하면서 내게 가식을 요구한다. 사람들이 가식적인걸 싫어하길래 내 마음을 그대로 내놓고 다녔더니 다들 그런식으로 살지 말라고 한다. 그래서 다 감추고 조금씩 위장하고 다니면 그걸 가식이라 부른다. 그럼 결국 가식이 아니면서 그 사람들 맞춰주려면 나를 바꿔야 하는데,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사람의 마음에 관한 문제는 노력의 문제가 아니다. 깨우침의 문제지. 내 귀가 말을 들어 처 먹어야 내가 바뀔거 아닌가.

    내가 초, 중, 고등학교의 성장 과정에서 받은 상처들을 대학교 와서, 사회에 나와서 드러내서는 안되겠지. 다른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면서 살 필요는 없는거잖아. 아는 얘기야. 근데 그게 쉽냐고. 나름대로 생각해서 한 얘기도 비수가 되어 가슴에 처박히고, 고민없이 툭 튀어나온 얘기는 사람 마음 속을 후벼파는데. 물론 내가 내 상처를 고쳐야겠지. 그래야 내가 다른 사람에게 상처주지 않고 살 테니까. 나는 억울하다고. 이런 주장도 변명이지만. 세상에 상처 안받고 사는 사람이 어딨겠나. 그런데 나만 어긋나서 남들에게 상처 주면서 사는건 이상하다는 거다. 그래. 이상하지. 근데 그건 나잖아. 내가 다른 사람과 같아야 할 이유도 없고 상황이 모두 같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두번째로 하는 얘기가 내가 권위적이라는 점이다. 이건 사실 나도 문제라고 느끼고 있다. 내가 남들에게 내가 아는 것을 가르쳐 줄 때, 사실 난 내가 그친구보다 우위에 서 있다는 점에 쾌감을 느끼며 가르쳐 준다. 그렇기 때문에 난 남들에게 대답하는 걸 굉장히 좋아한다. 그리고 그만큼 더욱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 공부한다. 어쩌면 강박관념인 것 같기도 하고. 좋게만 보면 베푸는 거지만, 그뿐만 아니라 사실 난 내게 질문한 사람을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 질문자는 기분이 나쁘겠지. 내가 그걸 모르는 건 아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된 건 중, 고등학교 때 반 친구들에게 받은 영향이 크다. 내가 만난 내 반 친구들은 모두 나한테서 숙제를 베껴갔다. 대학교 와서도 마찬가지로 많은 애들이 내 숙제를 베껴갔다. 별로 그걸 잘했다는 건 아니지만. 난 별로 힘도 없고, 주먹도 못 쓰는 아이다. 지금도 그렇다. 다만 공부를 좀 잘했기에, 그런 힘좀 쓴다는 애들이 숙제 안해와서 나한테 보여달라고 부탁하면, 기분 좋지 않은가. 그런데서 우월감 느끼면서 숙제 다 보여줬다. 물론 숙제로 성적이 모두 결정되는 것도 아니니까 내 성적은 중상위권 정도를 유지했고. 물론 이런 우월감 느끼는 것들은 아주 유치한 정서이고, 대학교 와서도 그러면 안되고 다 커서도 그러면 안되지. 응, 나는 아직 어리다. 이걸 변명으로 삼을 생각은 없지만, 나름대로 그동안 고민한, 내 성격이 지금 이런 상황이 된 원인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이다. 진짜 문제는 내가 나보다 웃어른인 사람들에게도 이런 알량한 권위적 심리를 내비친다는 것이다. 이건 앞서 얘기한 가식/비가식 문제하고도 맞물린다. 나는 나 자신을 감추는데 굉장히 서투르다. 그리고 세상에는 이런 내 모습을 다 받아들여주는 착한 사람만 있는게 아니다. 그리고 나는 착한 사람하고만 만날 수 없다. 누구나 다 만나고 다녀야 한다. 끊고 싶어도 끊을 수 없는 인간 관계가 있고, 끊기 싫어도 끊기는 관계가 있다. 가급적이면 나하고 마음 맞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친하게 지내고 싶은데 그 친구는 내게 그러지 말고 조금만 마음을 고쳐서 이런저런 사람하고 다 잘 지내면 어떠냐고 묻는다. 그럼 좋지. 좋아. 그런데 조금 고치기기가 왜그리 힘드니.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생각해본 건데, 난 불분명한 걸 싫어하는 경향이 있어서 모든걸 다 규정해 버리려는 성격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들은 조금 안보이는 정도는 그냥 다니지만 나는 안경을 항상 쓰고 다닌다. 뿌옇게 보이는 걸 굉장히 싫어하기 때문이다. 일을 할 때도 작업 내용과 마감 날짜를 딱 정해놓고 그날까지 끝내는 걸 좋아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랑 얘기할 때도 얘기의 요점을 한문장 정도로 정리하고 싶어하고, 하지 않아도 될만한 얘기도 입밖으로 꺼내서 명확히 하고 싶어한다. 지금 이런 글을 쓰고 있는 이유도 왜 이러고 있겠나. 속으로 담아두지 못하고 답답해서 어떻게든 명문화 시키고 싶으니까 그러는 거지.

    사실 내가 앞으로 살면서 성공하려면 대인관계도 상당히 중요하게 봐야 한다는 건 안다. 지금의 내 모습은 별로 이 세상에 어울리지 않는다. 나를 맞춰 나가야 과학자도 되고 성공도 하지. 내가 칭찬받기보다는 남을 칭찬해야 하고, 내가 위에 있기보다는 남을 올려놓고, 내게 권위를 돌리기보다 남에게 돌리고. 중고등학교때 반 친구들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다는 핑계도 이제는 그만 둘 때가 되지 않았나. 느끼고는 있으나, 느끼기만 하는, 그런 거다.

    내 성격 중에 중요한 것 하나가 나는 화를 못낸다는 것이다. 화가 나려고 해도 자연스럽게 수그러든다. 이건 좋은건지 나쁜건지 모르겠는데, 분명한건 화를 내야 할 때가 있다는 점이다. 상대방이 내가 화를 낼 것을 기대하고 얘기하는데 내가 화를 내지 않게 되면 상대방이 더욱 화를 내는, 그런 악화되는 상황이 있더라. 그리고 이렇게 화를 내지 않고 화나는 일들을 쌓아두다보면 언젠가 터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홧병이라던가. 또한 스트레스 쌓이는 일을 요새는 스트레스를 기분 좋게 풀지 못하고 있으니, 이것도 그다지 좋지는 않다. 친구는 내게 이런것이 감정이 무뎌졌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무뎌질 수밖에 없지. 내가 억울한 일들을 하나하나 모두 화내고 살다간 나 자신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을 테니까.

    언제쯤 내가 원하는 공부만 하고 원하는 사람만 만나고 살 수 있을까. 그 친구는 내게 그런 날이 오지 않을 것을 암시하며 나 자신을 고쳐나갈 것을 권유하지만, 그것조차 내게는 이미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이다. 진심은 전해졌으나 내가 이미 지쳤다. 사실은 매일 사람을 만나서 웃고 떠드는게 일은 일이다. 내가 원하는 건 그다지 많지 않다. 남들이 내게 간섭 안했으면 좋겠다. 난 그냥 재밌는 공부만 하고, 재밌는 사람하고만 만나고 싶다. 안그런 사람이 없겠지. 그리고 다들 어쩔 수 없이 싫은 일도 하고 싫은 사람도 만나는 거겠지. 그렇다고 내가 그걸 포기해야 할 이유는 아닌데, 포기할 수도 없는데 말이다. 이짓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것으로 규정한다면, 난 지금 과학자가 되겠다고 쇼를 하고 있으면 안되지. 빨랑 군대 갔다 와서 회사 들어가야지. 그럼 돈은 많이 벌잖아. 처자식 먹여살릴 수 있잖아. 꿈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사람도 많지. 그렇다고 내가 포기할 이유는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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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엽기적인 뉴스


    http://www.moneytoday.co.kr/view/mtview.php?type=1&no=2007082911105814232

    아니, 뭐, 보면 안다.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내용 설명은 하지 않겠다. 그냥, 엽기적인 뉴스가 나온다는 것만 알고 클릭해 보시기를. (19금은 아니고, 임산부/노약자 등이 봐도 아무 상관 없다. 단지

    엽기적인 뉴스

    일 뿐이다. 단지…)

    진짜, 오래 살지도 않았는데 별꼴을 다보겠다.


    저기요, 한마디 덧붙이자면, 인질은 “사람”을 붙잡아야 그게 인질로서 가치가 있거든요?

  • 있을 곳이 없다…

    사실 1 : 나는 알레르기성 비염이 있다.

    사실 2 : 어제부로 연구실을 옮겼다. 이쪽방에서 저쪽방으로 옮긴 것이다.

    사실 3 : 자취방은 길가 바로 옆이고, 하루종일 자동차가 지나다닌다.

    새벽 2시에 자취방으로 들어갔는데 창문을 못 열어두기에 항상 닫혀 있다. 덕분에 매연은 안들어오지만 요즘같은 날씨에, 드디어 찾아온 열대야 덕분에 잠이 안온다. 결국 아침 6시 30분에 깨서 나올까말까 30초간 고민하다가 그냥 씻고 나왔다. 덕분에 잠은 4시간밖에 못 잤다. 그건 뭐 그냥 버틸만한데, 문제는 더워서 연구실에 나왔더니 여긴 여전히 덥다. 가장 구석진 곳으로 들어왔는데, 에어컨에서도 멀어졌다. 그도 그렇지만 나 혼자 쓰자고 에어컨 켜는 것도 그렇고, 선풍기도 없고. 해서 여전히 덥다. 뭐, 이건 자취방보다는 나아서 창문을 열 수 있으므로 그럭저럭 참을만하긴 한데, 계속해서 콧물이 쏟아지고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근처에 알레르기 원인물질이 떠돌아다니는 것 같다. 내 책상 바로 옆에 오래된 철제 서랍장도 있고, 그 안에는 먹다 남은 시바스리갈 17년산과 정체를 알 수 없는 실험용 약품이 혼재한다.



    [각주:

    1

    ]



    계속 이상한 냄새가 나서 머리도 아프지만, 콧물이 쏟아지는 것 때문에 집중이 안된다. 아니, 사실 집중이 안된다는 건 공부가 안된다는 것에 대한 핑계에 불과하지만 그런 핑계 댈 꺼리도 없어야 공부가 잘 되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밖에 있을 수도 없고 전에 있던 연구실로 갈 수도 없다.

    이런 이유로 나는 갈 곳을 잃어버렸다. 이곳의 공기가 깨끗히 정화되지 않는 한 제대로 된 공부는 힘들 것 같다.

    음, 아무튼 이런식으로 일단 핑계를 대 놓고, 이제 대놓고 놀자는 거지…

    그러나 비염이 치료되거나 알레르기 원인물질이 없어지거나 하지 않는 한 놀기도 힘들다. 냄새가 나서 숨을 못쉬겠다는 사람들과는 다른 이유로 숨을 못쉬겠으니, 원 난감할 따름이다.

    1. 둘이 혼합되어 있다는 뜻은 아니다.

      [본문으로]

  • 아, 이런

    음…사실 연애에 있어서는, 4번 차이고 1번 찼다. (어쩌다보니)

    지금은 솔로다.

    사랑에 대해서 생각하면서, 쭉 고민하다가 느낀건데, 함부로 시작할 것도 아니고 시작할 때는 그만큼의 각오와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다가 생각이 옆으로 새서, 예수가 아무리 날 사랑하고 나때문에 괴로워해도 굳이 내가 그를 사랑하거나 의지해야 할 의무가 생기지는 않는다는 걸 알았다. (오래전 일이다)

    뭐 이런 얘기를 굳이 해야겠느냐 – 라고 한다면, 그럼 종교 있는 사람들은 누굴 좋아한다고 다 티 내고 다니는데 내가 누굴 싫어한다고 티내고 다니지 못할 이유는 무엇인가. 종교의 자유란 신앙을 가질 권리도 있으나 싫다고 말할 권리도 있는 것인데.

    신을 믿는데 아무 이유가 없이 그저 믿는 것이라면, 신을 믿지 않는데도 아무 이유가 없이 그저 믿지 않는 것이다.

    예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매일매일 그에 관한 글을 올릴 수 있다면, 나 역시 예수를 싫어한다고 매일매일 글을 올릴 수 있는 것이고.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도록 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예수를 믿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임무일 수 있다.

    굳이 이런 말을 하고싶어서 하는게 아니라, 항상 마음속을 답답하게 만드는 단 하나의 티끌이기에, 매일 뱉어내고 싶을 뿐이다.

  • 거짓말과 사기와 학력과 정치와 대칭성

    거짓말을 한다는 건, 자신이 그렇게 포장되길 바란다는 것이다.

    가령, A라고 부르는 특징이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눈다고 하자. A를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으로. 만약 A를 가진 사람과 갖지 않은 사람 사이에 차이가 없다면, 두 부류 사이에는 어떠한 반목도 없을 것이며 심지어 가진 것과 갖지 않은 것을 분류하는 것조차 의미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A라는 특징을 가진 경우에, 그리고 오직 그 경우에만 B라고 하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대칭성이 깨진다. 공간에 점을 찍으면서 원점이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즉, A가 B를 의미하는 경우



    [각주:

    1

    ]



    사람들은 A를 얻기 위해서 노력하게 되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만약 누구나 A를 가질 수 있다면 문제는 없다. 이 경우 모든 사람이 A를 갖게 되면서 대칭성은 복구되고 모두가 B의 이익을 취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A를 갖는 사람이 제한된다면, 시간적으로나 공간적으로나 제약이 있게 되면 대칭성이 복구되는 건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어떤 사람 1이 A를 갖고 있다고 판정되어 B의 이익을 취하는 경우 1이 이익을 보는 것은 타당한가? 즉, A를 갖고 있으면 이익을 취할 권리가 자연스럽게 생기는 건가? 반대로, 1이 A를 갖고 있지 못하다면 B를 얻을 수 없음이 타당한가? 이것은 A와 B에 실제 사례를 넣어서 조사하는 것이 좀 더 명확한 결론을 낼 수 있겠지만 여기서는 그냥 넘어가자. 아무튼 난 여기서 질문을 던지고 싶은 것일 뿐이다.

    위의 조건을 약화시키자. A라는 특징을 가진 경우가 아니라, 단지 사람이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다른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 만으로 B라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이 경우 A는 B를 얻는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가 되는 것인가?



    [각주:

    2

    ]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인정받는 것만으로 B를 얻을 수 있다면, B를 얻는데 있어서 A자체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이제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변형된다. 여기서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는 것은 A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고 인정받는 것을 뜻한다. 이것을 어떻게 보면 메타-특징(Meta-character)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 아무튼 A’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은 A를 가진 사람들의 집합을 포함하면서 약간 더 클 수도 있다. 아무도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경우에만 두 집합은 정확히 같아지며 그렇지 않으면 A의 집합은 A’의 진부분집합일 수밖에 없다.

    자, 이제 A와 A’의 세상이 되었는데, A’도 B를 얻는 것이 가능했다면 A’에서 A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 – A’-A=a라고 부르자 – 은 대체 어떻게 된 걸까? a가 텅 비어있지 않다면 이들은 A라는 특징이 없이도 B라는 이득을 얻는데 성공한 사람들이다. 다시한번 물어보자. a가 B를 얻는 것은 타당한가? a에 포함된 사람들이 A라는 특징을 가졌다고 인정받았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이 A라는 특징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몇가지 기준을 모두 만족시켰다는 것을 뜻한다. 쉽게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f(x)라는 함수를 테일러 급수 전개를 한 함수를 g(x)라고 부르자. 적당한 n차항까지만 적당한 x의 범위 내에서 비교하고 그것만으로 f와 g가 같은지 어떤지 본다면 두 함수 사이의 차이는 구별하기 힘들 정도이며 사실 실질적으로는 같은 함수로 두고 계산해도 적당한 x 범위 내에 한해서는 큰 오차가 없다. 문제는 그 범위를 벗어나는 경우에 발생한다. 진짜 함수 f는 필요한 모든 범위에서 잘 정의되지만 근사함수 g는 너무 많이 벗어나면 오차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A’에 포함된다는 것은 사람들이 흔히 보는 적당한 작업 범위 내에서 별다른 문제 없이 일을 잘 수행한다는 것을 뜻한다. 사람들이 화내는 것은 a에 속한 사람들이 마치 A에 속하는 것처럼 위장을 했다는 점인데, 애초에 이상하다는 점을 파악해야 한다. 어차피 적당한 작업 범위 내에서 일을 시킬 것이면 A든 a든 상관이 없다. 무시할수 있는 오차를 제외하면 두 집합의 어떤 사람이 일을 하든 결과물은 똑같이 나온다. 만약 작업 범위를 벗어나는 일을 시키면 눈에 띄게 결과가 달라지겠지만, 그렇게 할 거면 A’에 포함되는 검증 작업을 애초에 좀더 엄격하게 했어야 한다. 또는, 일을 시킬 때 작업 범위를 벗어나는 일이 결코 일어나지 않는다면 처음부터 자격 기준이 A가 아니라 A’이어도 충분한 것이다. 그 이상을 요구하는 것은 낭비다.

    하지만 이것은 a가 B를 얻는 것이 타당하다는 변명이 되지는 않는다. 그 이유는 애초에 B는 A와 필요충분조건이었지 A’는 B의 충분조건일 뿐이다. 만일 a가 B를 얻는 것이 타당하기 위해서는 B의 조건을 확장하여 a도 포함하도록 바꾸거나, a를 위한 새로운 이익 B’을 제안해야 할 것이다. 기존에 주어진 a, A, B의 규칙만으로는 a가 B를 얻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요새 우리나라를 강타한 화제가 학력 위조라 그냥 그에 대한 적당한 잡담을 적어 보았다. 웃기는건, 애초에 A인지 a인지 신경도 안쓰고 그냥 A’이라면 좋아라 했던 사람들이 이제와서 a에게 몰매를 가하는 꼴이다. 어차피 A’으로 충분한 일을 굳이 A와 a를 구별짓는 것도 멍청해 보이고.

    학력위조가 이제 드러나면서 문제가 되는건 결국 학력위조를 하는 것이 이득이 되면서 동시에 학력위조가 가능했기 때문이다. 둘 다 막아야 좀 더 노력하는 사회가 될텐데.

    그리고 정치인들은 거짓말좀 그만 했으면 좋겠다. 빈말과 입에 발린말을 할 수밖에 없는 동네가 정치판인 건 알겠는데, 그래도 애초에 쪽팔리면 부정을 저지르지를 말았어야지.

    1. 이 경우는 필요충분조건일 것이다

      [본문으로]
    2. 이것은 사람이 사는 사회는 혼자 사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람이 이익을 얻어나가기에 가능하다. 혼자나 두명정도의 작은 세상에서는 이러한 인정 받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실제로 제대로 된 A의 특징을 갖고 있어야만 B의 이익을 얻는 것이 가능할 것이다.

      [본문으로]

  • 장애인이 우주에 가면

    나중에 언젠가 인류가 우주에서 사는 시대가 오면 신체적인 장애를 가진 사람은 무중력에서 좀 더 편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다리가 불편한 경우, 이동에 장애가 있는 이유는 오직 다리를 이용해서 움직여야 하기 때문이고 손을 이용한 휠체어는 고정된 자세로 움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중력 상태에서는 둥둥 떠다니니까 손으로 밀어서 얼마든지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다.

    디스크 환자라면, 물론 우주로 나가는 것 자체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겠지만, 일단 무중력 상태가 되면 척추를 압박하는 중력이 없으니 고통받을게 없거나 줄어들지 않을까?

    그 밖에 어떤 장애인들이 더 편해질 수 있을까?

  • 임꺽정과 학력위조

    요새 임꺽정을 읽고 있다. 드디어 9권을 읽고 있으니, 오래 걸리는 셈이다.

    8권까지 읽은 감상은, 당시의 시대상이 어째 현대와 꼭 같을 수 있는지, 어찌 그리 흡사한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특히, 그중에서 신분 차별에 따른 신분증 위조와 현재의 학력위조는 그 양상이 비슷하다.

    알다시피 임꺽정은 백정의 자식으로, 백정 계급은 당시 천민중에서도 최하위층으로 지금으로 말하자면 대략 3D업종에 종사하는 비정규직 정도 되겠다.



    [각주:

    1

    ]



    그런데 임꺽정은 힘이 대단히 세서 임진왜란에 참가하여 혁혁한 공을 세우지만 잘나빠진 양반놈이 전공도 없으면서 자기를 무시하는게 꼴보기 싫어 한소리 했다가 죽을뻔하는 경험을 한다. 물론 그 이전부터 그다지 양반을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다행히 그 과정에서 친구들의 도움으로 살아난 뒤 도적의 길을 걷게 된다.

    이거,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이다. 외국 유명 대학에 유학 다녀왔다고

    실력도 없으면서

    취직되고, 그리고 정작 실력있는 사람들을 자기보다 돈 없다고 무시하는 일은 더이상 드문 일이 아니다.

    임꺽정을 보다 보면 후반부 화적편에서 임꺽정이 서울 가서 부인을 셋이나 만드는 행각을 보여주는데 이 과정에서 양반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게 된다. 야밤에 돌아다닐 때는 순라꾼이 붙잡지만, 높으신 분 심부름 간다면서 위조한 명패를 보여주면 무사히 통과한다.

    임꺽정과 이봉학이 신분을 위장하여 서울 서 임금의 명을 받고 내려온 도사와 그 수행꾼이라고 하자 임꺽정을 잡으려고 눈에 불을 켜고 ?아 다니던 사또가 그냥 어떻게 비벼보려고 갖은 뇌물과 접대를 쓴다. 그리고 막판에 도망치면서 신분을 밝히자 아주 그냥 죽을라고 하더라.

    양반의 자식으로 태어났으면 삼군을 통제할 장군이 되었을 인물이 백정의 자식으로 태어나 도적이 되었다. 이것은

    구조적 문제인가 개인적 문제인가.


    뿐만 아니라 청석골에서 두령을 맡고 있는 여러 인물들도 다들 특출난 재주가 있어 인정받았으나, 세상의 부조리에 버림받고 악과 깡만 남아서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도적이 되어 사람을 죽이고 관청을 습격한건 잘한 일이 아니고, 용서할 일도 아니다. 그러나 이 사람들을 그렇게 만든 것은

    사회인가 개인인가.


    사람들은 누구나 칭찬을 들으며 살고 싶어 한다. 잘했다는 소리, 성공했다는 소리, 능력있다는 소리,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 남이 잘 되는게 배아픈게 아니라, 나만 성공 못하는게 아프다. 저 다른 사람들은 크게 노력하지 않고도 그럭저럭 먹고 살고, 성공도 하고, 돈도 잘 버는것 같은데 난 뼈빠지게 고생하고 있는 힘껏 노력해도 이 자리를 벗어날 수가 없다. 포기하지 않고 계속 하면 이룰 거라고 그랬는데, 아무리 해도 안된다. 그러다보니 좀 더 빠른 길을 찾게 되고 편법도 쓰고 그러는 거다.

    세상이 당신과 맞지 않는 경우 두가지 선택이 가능하다. 세상을 다 바꾸든가 당신을 다 바꾸는 것. 둘 다 결코 쉽지 않지만, 둘 중 어느 하나를 할 수 있다면 성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적으로 바뀌지 못했다면 성공 역시 본질적으로 성공한 것이 아닐 것이다.

    1. 3D업종 종사자가 천민의 최하위층이라는 말이 아니다.

      [본문으로]

  • 재미난 사실을 알았다


    http://redpixel.blogspot.com/2006/04/failure.html

    여기서 본 건데, failure로

    구글

    에서 전체 웹으로 검색하면 첫 화면에 조지 부시의 백악관 페이지가 뜬다.

    또한, 흥미롭게도 그 페이지에는 failure란 단어가 없다 -_-;


    링크

    거기서 또 본건데, 한국어 구글에서 학살자라는 검색어로 검색해봐라.

    귀찮으면 아래 링크 클릭 -_-;


    링크

    ———————–

    최근 구글 Bomb이 사라졌다. 위와 같이 재미난 검색 결과가 뜨는 것을 구글bomb이라고 하는데, 구글에서 무슨짓을 한건지 아니면 다른 압력이 있었는지, 모든 언어의 모든 구글bomb사라진 것 같다. 궁금하면 위의 링크를 눌러보면 된다.

    이와 관련된 글을 하나 링크 걸어둔다.


    http://searchengineland.com/070125-230048.php

    개인적으로는, failure를 쳤을 때 조지 부시가 나오는게 더 정확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지.

    ————————

    Google bomb이 사라지기 전의 검색 결과에 대해서는 박군님의 블로그

    http://bakgun.com/wp/2006/09/11/failureequalbush/

    를 참고하기 바란다.


    전두환이 영웅이면 부시 부자가 노벨 평화상 공동으로 받겠네.

    세사람 모두 오래오래 살아라. 욕 많이 해줄게.

  • 기계적 검색의 한계

    사용자 삽입 이미지

    내껀 2번째부터 -_-;;;

    뭐지. 첫번째 있는건 퍼간건데…

    단순히 내꺼가 두번째 부터 나온 장면이긴 하지만, 그래도 이러면 맘상하지.

  • 난 측면 비판을 받겠어!

    이번엔 과감하게 자기자랑을 할테니, 이건 정면 비판을 피하여 측면으로 비난받겠다는 의도적 글이 되겠다.

    그만님의 글 (

    그만의 블로그 정면 비판!

    )을 읽고, 성실히 반성해 보았다. 그 결과, 걸리는게 없어 난감할 따름이다.

    1. 작은 권력에 흥분하는 완장형 블로거

    메타 블로그 포털에서 상위권에 들어간 글을 몇개 쓴 적은 있지만, 별로 흥분했다거나 유명세를 타고 싶어서 썼다거나 하지는 않다. 나보다 더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을 쓴 분들도 많다. 유명해지는 건 나도 바라마지 않는 바이지만, 거기에 비벼볼려고 억지로 글을 쓴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사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어줬으면 좋겠지만, 구독률 때문에 내 생각을 왜곡될 정도로 심하게 표현할 생각은 없다.

    2. 자기 콘텐츠는 없고 짧은 상념만 있는 사색형 블로거

    짧은 상념이 없진 않다. 꽤 많지만, 내가 창작한 콘텐츠도 많이 있다. 수학이랑 물리 분류에 올라온 글들은 나름 의미있는 글들이라고 생각한다.

    3. 토론은 없고 비방만 넘치는 비난형 블로거

    남을 욕할 때는 그만큼 욕먹을 각오를 하고 돌을 던진다. 물론 방패를 만들기 위해 비난의 근거를 찾아두는 것도 잊지 않는다. 그리고 일단 내 글 중에 다른 무언가를 비난한 글이 많지 않다.

    4. 광고를 덕지덕지 붙여 놓은 낚시형 블로거

    광고 없다.

    5. 펌질과 남의 콘텐츠 빼면 남는 거 하나 없는 복사형 블로거

    명시적인 허락없이 퍼온글 없다. 퍼온글 빼도 남는거 많다.

    6. 우리나라 블로그는 바닥이 좁다고 불평불만만 늘어놓는 자학형 블로거

    바닥이 좁긴 하지만, 별로 불만은 없다. 웹은 넓으니까.

    덕분에 시사적인 문제에 대해서 조금 둔감한 블로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이공계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 당사자인만큼 아무래도 민감해질 수밖에 없다. 아무튼, 앞으로도 그럭저럭 봐줄만한 블로깅을 목표로 열심히 정진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