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비상상황 끝날때까지 백신 맞고, 마스크 쓰고, 집에 있읍시다.
타협, 협상, 이런 것들은 둘 이상의 대립하는 주체가 둘 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이용하는 윈-윈 전략으로, 서로의 최대의 이익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양보하면서 적절한 이익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정해야 하는 변수의 범위가 A는 10~20이고, B는 15~25라면, 타협점은 15~20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권력적인 차이가 없다면 대충 그 중간인 17.5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여기까지가 상식적인 이야기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을 정할 때, 이런일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저 타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측 대표는 시간당 10000원 이상을 원하고, 사측 대표는 시간당 9000이하를 원한다면, 두 범위에는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 당연히 둘 다 만족하는 타협은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관례적으로 두 범위의 중심에 해당하는 9500원 정도에서 조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타협이긴 한데, 어느쪽도 만족하지는 않으며, 둘 다 확실하게 손해를 보고, 결국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일종의 조정자 역할에 해당하는 정부의 의도대로 끌려가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그나마 협상에 참여하는 주체가 2개일 때 일어나는 상황이다. 지금 한창 진행중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 만족시켜야 할 주체가 전 국민 개개인이다. 이러면 각각이 원하는 방역의 정도가 모두 다르므로 모두가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사람은 반드시 불만을 갖고, 심지어 모든 사람이 불만을 갖는 상황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조정자인 정부는 방역 정책을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까?
한쪽 극단을 취하는 것은 가장 나쁜 대책이다. 가령, 백신 접종에 상관 없이 전방위적인 봉쇄를 시행해서 모든 사람을 집에 가두어 둔다면 방역 효과는 있겠지만 경제상황과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다. 반대로, 백신 접종에 역시 상관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어서 사람들을 풀어준다면, 경제는 굴러가겠지만 사망자가 늘어난다. 물론 민심은 나빠진다. 그렇다면 결국은 양 극단에서 어중간한 지점에 있는 정도를 고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어중간한 지점이란 무한히 많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를 골라야 하는가는 또한 쉽지 않은 문제다. 이 글 첫부분에, 타협점에서 서로 최대의 이익을 포기하고 적절한 이익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 타협이라고 했는데, 손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감당할만한 손해를 보고 만족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서로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겠지만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므로 당연히 불만이 남는다. 어느 한쪽 편을 들었으면 거기서 이익을 보게 해준 쪽은 정부가 잘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중간한 지점을 잡게 된다면 정부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역정책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자. 더 많은 국민을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정부의 유일한 목표라면 백신의 무조건 강제접종과 사회적 완전봉쇄를 통해서 바이러스의 전염을 차단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을 전염병의 위협에서는 지켜내더라도 국가경제가 완전히 추락해버린다. 나중에는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생존자들이 생존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힘든 경제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결국 완벽한 방역은 불가능하며, 어느정도 풀어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풀어주는 것이 적절한가? 사실은 어떤 정도도 적절하지 않다. 방역의 관점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최적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적점을 찾기 위해서 다른 척도를 도입해야 한다. 다른 척도로 국가 경제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자. 앞서 살펴봤듯이 방역과 경제는 서로 맞서는 변수이므로 이 경우 최적점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해진다. 그런데, 그래서 그 최적점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이것 또한 정답이 없다. 이 최적점을 찾기 위한 모든 변수를 전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택이 최선이었는가 아닌가는 이 상황이 마무리된 이후 나중에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 최선이 아니었다고 평가해봐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기 때문에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최적점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반드시 손해를 보고 불만을 가져야 한다면, 어쩌라는 것인가? 여기서 바로 국가가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에 대한 철학이 드러난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국민의 일부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 일부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나는 정부가 국민들 중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와 같은 약자들에게 방역 정책을 집중해서 집에 있도록 유도하고, 대신에 경제적으로도 확실히 만족할만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그 약자들은 노력 없이 쉬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사람이 이동의 자유를 포기하고 집에만 있는다거나 백신을 선택의 여지 없이 접종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노력이자 노동이다. 즉, 이와 같은 활동에 가중치를 높게 줘서 사람들이 집에 머물게 되고 방역의 수준이 높아지면, 보상을 받는 대신 밖에서 활동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보다 안전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이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활동해서 얻은 이익은 본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집에 머물기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기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이익은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기에는 단순히 집에 있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과 여론을 보면 정부의 방역 정책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지도 못하고 경제위기를 막아내지도 못해서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는 그 부분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충분히 만족하지 않았다면 공평하게 불만을 나눈 것이므로, 현재의 정책이 최적점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최악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보상할만한 돈이 부족하다면 전염병 때문에 돈을 벌게 된 주체에서 이익을 나누도록 하면 된다. 전염병에 의한 손해는 누군가의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전염병에 의한 이익도 순수하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전염병 때문에 생긴 경기위축 때문에 돈이 넉넉하지는 못하다 해도 보상을 못할 정도로 돈이 부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돈은 왜 부족한 것 처럼 보이는가? 이 상황에서 이익을 얻은 주체들이 충분히 이익을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에서 세금이라는 형태로 강제로 가져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율을 먹고 사는 조직이므로 그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한국에서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대다수가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그런 약자들이 대다수가 되기에는 너무 많이 성장한 국가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주체는 대체로 기득권이고, 기득권은 그것을 우연히 얻었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도울만한 돈이 부족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보다 방역을 강화하는 대신 훨씬 적극적인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고 여기에 필요한 돈은 정부가 먼저 지출한 다음 나중에 채우면 된다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이 제일 앞의 한줄요약이랑 뭔가 다른 것 같다면 그것은 기분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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