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자 배틀물에 대한 단상

예나 지금이나 싸움구경은 재미있다. 그러다보니 문학, 만화, 영화 등 스토리를 전달하는 장르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원하는 것을 놓고 다투는 내용이 흔히 다뤄진다. 특히, 그중에서도 능력자 배틀물이라는 장르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장르 중 하나이다.

능력자 배틀물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이야기를 말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투는 것 자체는 능력자 배틀물이 아니어도 많이 있지만, 가령 돈을 버는 이야기라든가, 그런 것들은 현실의 물리법칙에 기반한 능력과 현상을 이용하기 때문에 싸움의 진행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떠나서, 일단 우리는 현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현실을 기반으로 한 싸움의 추세를 예측하는 것 역시 익숙하며, 결말이 어떻게 나오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능력자 배틀물에서는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서 싸우는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현상이 어떤 논리로 작동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고, 이것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서 살아남고, 이 능력으로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결말이 가능하다.

능력자 배틀물은 결국 판타지의 한 분야인데, 판타지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설정과 이야기를 도입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르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인물들의 행동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고 있을 법한 내용이어야 한다. 즉,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지만,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과 매우 높이 뛰어오를수 있는 사람이 싸운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도 설득력있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특성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떤 설정과 상황을 상상하고, 그에 대해서 어떤 결과가 가능한지를 검토한다는 점에서 수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수학 역시 공리계를 도입해서 어떤 대상을 다룰 것인지 제안하고, 그 대상들을 갖고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수학은 보다 현실에 쓸모있는 결론들을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수학의 구조가 현실의 구조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대상들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고, 다시 거기서 얻은 결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도 있다.

능력자 배틀물 등의 판타지 소설도 마찬가지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결론들을 끌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양영순의 ‘덴마’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데, 이 작품은 군상극으로써, 각 개인들의 선택이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맞물려서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어느정도 설득력있게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에서 제시하는 세계에서도 대기업이 있고, 탐욕스러운 권력자가 있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빈민이 있는데, 이런 인물들이 그 세계에서 어떤 행동과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어떻게 인생이 변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만약 내가 그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나는 어떤 상황이고,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에 대해 독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이런 특징은 다른 능력자 배틀물인 ‘엑스맨’,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원펀맨’ 등에서도 비슷하게 보인다. 각 작품에서 주어진 상황과 설정은 다르지만, 각 인물들이 자신의 능력을 갖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싸워나간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 역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과 매우 닮아있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자 배틀물 작품들 역시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모순을 비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설정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서 살펴볼 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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