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학술

  • 송유근, 대학원 가다

    축하할 일이다. 드디어 8년쯤 후엔 우리나라에도 10대 박사가 탄생하겠구나.

    난 송유근 군이 대학원에 입학할만한 재능과 열정이 있다고 생각한다.

    수리물리학 관련 연구를 하고 싶다고 하니, 기특하지 않을 수 없다. 수리물리학 교과서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식이 나온다면 얼마나 기쁠까.

    난 다만, “10대 박사 만들기”라든가 “최연소 박사학위 취득자”라는 타이틀을 만들기 위해 뭔가 억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온전히 그의 희망과 재능으로만 이루어진 일이기를 바란다.

    물론, 그의 건승을 바란다.

    끝으로 내가 부러워 하는 점은, 전체 인생에서 연구할 수 있는 시간이 나보다 10년은 더 길 것이라는 것…-_-;

    그건 정말 부럽다.

  • 붉은 여왕

    요새 Red Queen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모두가 열심히 뛸 때는 아무리 열심히 뛰어도 이길 수 없다.

    예를 들어 보자.

    사슴은 늑대의 공격을 받는다. 그래서, 사슴들은 여러 돌연변이가 일어날 때, 그중 달리는 속력을 빠르게 하는 유전인자가 있으면 그런 유전인자를 가진 사슴들은 많이 살아남게 된다. 즉, 사슴의 달리는 속력은 점점 빨라진다. 그 결과, 늑대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진다. 그럼, 늑대들이 돌연변이가 일어날 때, 빨라지는 사슴을 잡기 위해서 늑대를 빠르게 달리도록 하는 유전인자 또한 더 많이 살아남게 된다. 즉, 늑대의 달리는 속력도 점점 빨라진다.

    그 결과는? 둘 다 열심히 진화하긴 했지만, 진화하기 전과 달라진 것이 없는 제자리걸음의 상태이다.

    이것이 바로 거울 나라의 붉은 여왕이 앨리스에게 얘기한 “우리 세계에서는 가만히 있기 위해서라도 있는 힘껏 뛰어야만 해. 다른 곳으로 가고 싶으면 두배 더 빠르게 뛰어야 하고” 라는 말의 본질이다. 물론 루이스 캐롤이 진화론을 알고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는 경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 얘기를 듣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겪게 되는 가장 심각한 문제인 “죽음의 트라이앵글”이 절대로 없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등학생들이 대학 입시에서 마주치는 1차 죽음의 트라이앵글과, 대학생들이 취업때 마주치는 2차 죽음의 트라이앵글, 모두 많은 사람들이 “생존”이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경쟁한 결과 만들어진 것이다. 다른 동물들이 겪는 경쟁과 약간 다른 점이라면, 여기서는 모든 생산자가 각각이 모두 소비자이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밟고 올라서야만 한다. 밟히고 찍힌 사람들은 가난을 벗을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가난을 벗을 수 없다”라는 생각이 그 자체로 사람들을 죽이는 절대적 관념이 되고 있다.

    그리고 나 또한 그 경쟁 속에서, 다른 사람을 밟으며 위로 올라가고 있구나 –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현실을 해소하려면,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모두가 각자 다른 방향에서 경쟁한다면, 한 분야에서 경쟁하는 것 보다 더 낮은 경쟁률로 더 많은 행복을 얻을 수 있다. 대학에 가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고, 소위 명문대에 가는 것만이 성공하는 길이 아니어야 한다. 다양한 방법으로 성공할 수 있어야 하며, 모든 사람이 자신의 꿈을 이룰 수 있을 수 있어야 한다.

    최근, 뉴스에서 고아원 출신의 한 학생이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내가 그 기사를 읽으면서 궁금했던 것은, 어느 학과에 입학했는가이다. 기사를 아무리 살펴봐도 무엇을 전공하려는지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단지, 그 학생은 서울대에 입학했다는 것 만으로 개천에서 용났고, 자수성가한 학생이 되었다. 그게 끝인가? 그 학생이 무엇을 공부하고 싶어하고, 앞으로 무엇이 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는건가? 서울대에 입학하면 도대체가 성공이 보장되느냐는 말이다. 내 생각에, 서울대가 아니라 그 어떤 학교, 그 어떤 명문 대학에 진학하더라도 자신의 꿈이 없고 그 꿈을 향해 매진하지 않는다면, 그런 삶은 성공할 수가 없다. 난 그래서 그 기사에 많이 실망했다. 기자의 관점은 결국 서울대에 합격했다는 것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기사는, 고작해야 서울대에 가면 성공한다는 기존의 인식만을 강화시킬 뿐이다. 서울대에 가는 건 좋은데, 가서 무엇을 공부하고 장차 무엇이 될 것인가가 더 중요한 문제다. 어쨌든, 그 학생이 기사에는 소개되지 않았지만, 자신이 원하는 전공을 선택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공부를 많이 할 수 있어서, 자신이 하고싶은 꿈을 이루게 되기를 바란다. (혹시 자유전공학부인가? -_-;)

    그리고 나도 꿈을 이루고 싶다.

  • 당신이 작성한 글의 효율성 지수는 어떠십니까?

    방문자 수 30만명, 지금까지 쓴 글 1040개. 글 1개당 방문객 유치 효과는 약 300명이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댓글, 또는 트랙백 부탁)

    추가

    방문자 수 30만명인데 지금까지 붙은 댓글은 3000여개. 100명당 1개의 댓글을 달고 간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ㅜ_ㅜ

  • 위치 계산법



    http://koyul.egloos.com/4776611



    고율님의 글을 읽고 물리적으로 고찰해 보았다. 왜 Wii는 적외선 센서 방식을 사용하였을까?

    전자기파를 송수신하는 부품이 3개가 있으면 하나의 점을 특정할 수 있다. 원리적으로는 옳다. 실제로도 그럴까?

    난 이런 문제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계산해 보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적당한 위치에 송신기가 있고, 그 근처에 있는 3개의 수신기에서 전파를 수신하여 그 시간 차이를 이용한 수학적 방법으로 송신기의 위치를 알아내는 방법을 활용한다. 여기에 이용되는 수학적 기술은 GPS에 사용되는 것과 동일하다. 다만, 송신과 수신의 역할이 바뀌어 있을 뿐이다.

    http://snowall.tistory.com/51 참고.

    스케일을 한정할 필요가 있다. 방안에서 사용하는 것이라 하였으니 송신기와 수신기들 사이의 거리가 멀어야 3미터를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3미터라면, 빛의 속력으로는 얼마만큼의 시간동안 진행할 수 있을까? 빛의 속력은 1초에 약 3억 미터 정도를 달려간다. 즉, 빛이 1억분의 1초 만큼의 시간동안 진행하게 되는 거리이다. 여기서 발생해도 괜찮은 수준의 오차는 10%정도라고 할 수 있을테니, 시간을 10억분의 1초 단위로 정확하게 측정해야 한다. 잘 알고 있듯이, 10억분의 1초는 1 나노초(ns)이다.

    공간의 특정한 점을 찍는 문제가 시간을 재는 문제로 변환되었다. 시간은 얼마나 정확하게 측정될 수 있을까? 시간 측정 장비는 물론 시계를 이용한다.

    http://en.wikipedia.org/wiki/Atomic_clock

    위키피디아를 보니, 원자시계는 하루에 1나노초 정도 오차를 갖는다고 한다. 1나노초를 측정한다면, 0.01%까지 정확하게 측정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원리적으로는 수 미터 정도의 크기에서 한 점이 움직이는 경로를 수 밀리미터 정도의 정확도로 추적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문제는 가격이다. 최소한 원자시계 3개가 필요하다. 원자시계 3개랑 비교한다면 다른 장비 가격은 (Wii기계값, 무선 장비값, 게임 소프트 개발비 등) 무시해도 좋을만큼 싼 가격이므로 그냥 원자시계 3개를 구입할 가격을 알아보면 좋겠다.

    그러나…

    그건 어디서 알아봐야 하나.

  • 영광 원전에서 나오는 중성미자 검출기

    http://www.fnnews.com/view?ra=Sent0901m_01A&corp=fnnews&arcid=0921511651&cDateYear=2008&cDateMonth=12&cDateDay=14&

    과학 뉴스를 보러 돌아다니다가 굉장한 뉴스를 발견했다.

    드디어 영광 원전 근처의 Double Chooz 스타일의 중성미자 검출기가 곧 완공된다는 것이다. 이 소식을 콜로퀴엄에서 들은지 2년쯤 된 것 같다.

    저 실험에서 찾아내려는 것은 $\sin(\theta_{13})$의 실험값이다. 지금까지는 그냥 0.1보다 작다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0인지 아닌지도 아직 확인되지 않았다.

    내가 석사때 석사논문으로 쓴 것이 바로 저 값의 예측값이고, 이번에 실험으로 검증된다면…

    나름 짜릿할 것 같다. (그 주제 자체를 매우 좋아했던 건 아니지만…;;)

    맞을까? 틀릴까? ㅋㅋ

  • 번뇌 지우기

    내 블로그를 자주 보시는 분들은 최근의 나의 근황이 어떤 상황인지 잘 알 수있을 것이다.

    양쪽 이익 집단에서 서로 나를 끌어가려고 애쓰는 상황인데 내가 강자가 아니라 약자의 입장에 있는지라 굉장히 처신을 잘해야 한다.

    이거 참 골때리는 상황인데, 대부분 여기저기서 러브콜이 들어오는 경우 그 대상자인 사람은 강자의 입장에서 협상의 중심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근데 난 여기저기서 오라고 부르는데도 불구하고 약자 입장에 설 수밖에 없다.

    어쨌거나, 밉보이면 앞으로 3년이 꼬이는 상황에서, 내 마음이 편할리 없다. 하루하루가 번뇌의 연속이다.

    이 번뇌를 효과적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심각한 고민을 한 나머지 여러가지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나는 그래서 나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객관적으로 관망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내가 힘들 때, 스스로가 힘들다는 것을 알고 그에 맞도록 행동하고 생각하면 정신적으로는 조금 더 편해진다.

    대학원에서의 2년과 회사에서의 1년을 있으면서, 감정 조절에는 매우 익숙해졌다. 스트레스를 아예 안 받는건 아니고, 골치아픈 일을 무작정 잊고 사는 것도 아니지만, 객관적인 요점을 정리해서 메모해두고 감정적인 부분을 잊어버리도록 하는 훈련은 성공적인 듯 싶다. 이젠 웬만한 사건, 사고는 나에게 장기적인 정신적 충격을 주지 않을 것 같다. 단기간동안 멍때리는 일은 있겠지만, 아마 금방 회복될 것 같다.

    이제 앞으로 3년간 열렙해야 하는 스킬은 서바이벌 스킬이다. 연구소라는 곳은 아마 내가 생각한 것 보다 좀 더 냉혹한 정글일 것이다. 아마 한순간의 말 실수가 그 이후의 나의 진로를 좌우하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최소한, 복구 가능한 수준에서의 실수까지만 허용하도록 하며, 그곳의 사람들을 내 편이 되도록 잘 접근해야 한다.

    최근에 깨달은 것인데, 나는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상황과 현실이 맞아떨어지지 않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어지는 경우 굉장히 Depressed된다. 만약,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진다면 나는 상황을 내 마음대로 바꾸기 위해서 주변 사람들과 심한 충돌을 일으킬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충돌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금부터 상황 조정 능력을 만들어 둘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단 한마디 말할 때에도 깊이 생각하고 말하는 습관은 반드시 만들어야 한다. 농담조차도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연구소에 가면 일단 내 편은 아무도 없다고 보는 것이 좋다. 나랑 연락을 주고받는 그 박사님이 초반에는 어느정도 도와주시겠지만, 그마저도 내가 너무 못하거나 시간이 지나도 개선되지 않으면 버려질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다른 사람과의 관계를 만드는 것에 대해 좀 더 연습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나는 아직 익숙하지 않은데 위험한 상황에 내던져진다는 점이다. 훨씬 더 민감해 지지 않으면 안된다.

    만약 3년을 무사히 보낼 수 있다면, 한장의 좋은 추천서를 받을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내 미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앞으로의 3년에 인생 전체를 걸어 본다.

  • 예언은 책임져야 하는가?


    주의 : 이 글은 논리적인 척 해보려고 쓴 글이므로, 중간에 부적절한 전개, 논리의 비약, 근거의 실종, 그리고 억측이 포함되어 있을 수 있음.

    그리고 난 경제 전문가가 아님.

    일찍이, 노무현 전 대통령과 종씨인 전설적인 예언가 노스트라다무스는 2000년 즈음의 지구 종말을 예견하였다.


    참고자료 : 트라우마 368화 <노스트라다무스>

    그리고 현대의 전설이 된 경제학자(?) 미네르바는 2009년 한국 경제의 종말을 예견하였다.



    [서프 – UCC]



    미네르바 신동아



    기고 전문(아고라 펌) (장작불)




    http://www.seoprise.com/board/view.php?uid=180251&table=seoprise_11


    다른 예를 들자면, 강만수 장관은 3월에 위기 따위는 오지 않는다고 예언했다.



    강만수

    장관 “3월 위기설 전혀 근거없다”

    이 시점에서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은, 과연 예언가는 자신의 예언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난 저 예언들이 맞건 틀리건 신경 안쓴다.

    우선, 몇가지 객관적 사실을 살펴보자.

    첫째로, 어떤 사람도 미래를 명확하게 알 수는 없다. 왜냐하면 미래를 예측하기 위한 모든 정보를 알수 없으며, 모든 정보를 알고 있다 하더라도 그 정보를 전부 정확하게 분석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또한, 모든 정보를 알고 모든 정보를 분석해서 나름의 정확한 예견을 하였다 하더라도, 아주 작은 오차가 갖고오는 미래는 엄청나게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언가는 자신이 예견한 미래에 대해 확신을 갖고 말한다는 점이다. 근거의 유무와는 관계 없이, 예언가가 예언을 할 때에는 자신의 예언에 절대적 확신을 갖고 있다. 어떤 예언가는 자신의 죽을 날을 예언한 후, 그날 자신이 여전히 살아있자 자살했다고 전해진다. 그만큼 확신이 되어 있지 않는다면 예언은 할 수 없다.

    셋째로, 인간은 사회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말한 것은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준다. 아무도 듣지 못한 소리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단, 이때의 아무도 듣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모든 사람을 의미한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었다면, 이미 세계의 판도에 영향을 주었고, 이것은 예언이 틀릴 수 있는 새로운 정보의 시작이 된다. 즉, 예언은 예언 그 자체로서 새로운 정보이고, 앞서 첫번째 사실에서 지적한 대로 모든 정보를 모두 분석해서 예언을 내놓았다 하더라도, 그 예언을 내놓은 시점에서 예언이 가지는 추가 정보로서의 효과는 새로이 분석해야 할 것이다. 이 부분은 무한 재귀 논리가 되어 버리는데, 예언의 효과를 다시 예언에 포함시켜서 좀 더 정확한 예언을 하려고 시도한다면, 이 예언은 영원히 말해질 수 없다.

    이 세가지 사실을 종합하면, 예언은 아무리 정확하게 하더라도, 틀릴 가능성이 있으며 그 예언이 맞을지 틀릴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점이다. 사실상 그 예언의 정확성을 미리 아는 것은 그 예언을 말하는 것과 같은 수준의 예언에 속한다. 그리고 그런 불확실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예언은 발설되었고, 따라서 사회와 세계에 영향을 주게 된다.

    영향을 주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가? 이제, 이 부분이 문제가 된다. 책임은 무엇일까?

    사람은 사람이 가진 가장 기본적인 권리로 “행동의 자유”를 지적한다. 행동은 말, 움직임, 기타 등등 자신이 가진 물리적 신체를 갖고 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움직임을 뜻한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서 모두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는 서로가 자유를 어느정도 제한해야 한다는 사회적인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것이 “책임”이다. 정확히는, “자유에 대한 책임”이다. 자신이 갖고 있는 자유를 사용하였다면,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자유를 사용한다는 것은 굉장히 포괄적인 의미이다. 과대 해석하자면, 숨을 쉬는 것은 자기 자유인데, 숨을 쉬어서 나온 이산화탄소에 대해서 그것을 제거해야 하는 책임을 져야 한다는 뜻이 될 수도 있다. 물론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렇게 세세한 수준의 책임은 그냥 넘어가고 있지만,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수준의 자유와 책임도 있을 것이다. 어떤 수준의 책임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을 죽인 수준의 자유라면, 그 자유에 대한 책임은 상당히 클 것이다. 개인 대 개인의 수준에서는 어느정도 주는대로 받는다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법칙을 적용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개인 대 사회의 수준에서 행동한 자유는 대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아니면, 그런 것은 책임 질 필요는 있기나 할까?

    지구 멸망을 예언한 노스트라다무스에게 그 예언이 실현되지 않았다고 해서 책임을 지울수는 없다. 실제로 그 예언이 실현되었다면, 그 예언을 맞췄기 때문에 그에게 돌아갈 칭찬은 없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칭찬을 해줄 사람이 없다. 미네르바의 경우에는 어떨까? 그는 경제 위기설을 들고 왔고,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은 그 글의 논리적 연결성이나 명확성과는 상관 없이 그의 지적이 정확하고, 예견이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물론 논리적으로도 옳다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논리적으로 틀렸다고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보고 있는 “세계”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미네르바의 예견을 맞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또한 자신들만의 예언이겠지만. 그리고 강만수 장관은 경제 위기설이 없다는 예견을 하였다. 완전히 상반된 두 예측이 대립하고 있다. 어느 한쪽은 반드시 틀릴 수 밖에 없는 상황인데, 과연 그들은 자신의 예언에 대해 책임을 질 수 있을까?

    실질적으로, 책임이 좀 더 큰 사람은 강만수 장관이다. 미네르바는 그 정체가 밝혀지지 않은 그냥 인터넷의 글쓰는 사람일 뿐이고, 강만수 장관은 한 나라의 경제 정책을 바꿀 만큼의 “자유”가 주어진 사람이다. 물론 강만수 장관이 경제 위기를 예견하였다면 그런 말은 실현 되는쪽이 좀 더 지옥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예언하지는 않을 것이지만. 아무튼, 강만수 장관의 3월 위기설이 없다는 예언은 사람들이 다들 그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겠지만 그 장관 개인과 정권에 대한 신뢰도 때문에 아무도 믿지 않는, 그런 예언이 되었다.

    미네르바의 예언이 틀렸다고 해 보자. 경제 위기가 오지 않았다. 미네르바에게는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을 기만한 죄?

    강만수 장관의 예언이 틀렸다고 해 보자. 경제 위기가 왔다. 그에게 어떤 책임을 물을 수 있을까? 세상 사람들을 기만한 죄?

    똑같아 보이나? 조금 다르다. 사람은 자신이 가진 사회적 위치에서 자신의 행동을 해야 한다. 미네르바는 조금 영향력이 있는 인터넷 게시판에서 인기있는 예언가이고, 강만수 장관은 많은 영향력을 가진 장관 자리에서 인기없는 장관일 뿐이다. 만약 미네르바에게 세상 사람들을 기만하고 민심을 혼란에 빠트린 죄를 묻는다면, 실제로 경제 위기가 왔을 때 강만수 장관에게는 최소한 똑같은 죄를 물어야 할 것이다. 실제로는 그보다 더 큰 죄를 묻고 큰 책임을 지워야 한다. 즉, 물어서는 안될 것을 묻고 있는 것이다.

    유비무환. 미리 준비하면 혼란이 없다. 아무리 많이 생각해도 옳은 말이다. 하지만, 미리 준비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무엇을 준비할 것인가에 대한 예측이다. 그리고 그 예측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에 딱 맞는 준비를 하는 것이 좋겠지만, 잘 모르겠다면 나쁜 예측을 선택해서 그에 대한 대비를 하는 것이 맞을 것이다. 예측은 전체적으로 두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좋은 결과를 예측하는 것과 나쁜 결과를 예측하는 것. 그렇다면, 좋은 결과에 맞춰 미래를 준비한다면 막상 나쁜 결과가 왔을 때 힘들 것이다. 하지만 나쁜 결과에 맞춰 미래를 준비한다면, 좋은 결과가 와서 그 준비한 것이 전혀 쓸모 없어진다 하더라도 상황이 나빠지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나쁜 결과가 왔다면 미리 준비했으므로 큰 혼란이 없을 것이다.

    상황을 낙관적으로 보는 것은 그 자체로 결과를 좋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나쁜 상황이 되었을 때 얼마나 잘 대처하는가이다. 상황이 좋을 때는 잘해봐야 본전이다. 왜냐하면 이미 좋은 상황을 더 좋게 만드는 것은 힘들기 때문이다. 못해도 괜찮다. 상황이 좋으니까. 하지만 상황이 나쁠 때에는 못하면 병신되고 잘해야 현상 유지다. 그리고 정말 잘하면 칭찬을 듣는다. 위기를 넘겼으니까. 따라서 누구든지 미래를 준비할 때에는 좋은 상황과 나쁜 상황을 모두 예측해 보고, 그에 대한 대비는 나쁜 상황에 대한 대비를 해 두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예언의 책임에 대한 글로 시작해서 미래에 대한 대비로 끝났다. -_-; 사두용미의 글이랄까…

  •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것을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하는 건 아무나 하는 말은 아니다.

  • 생활 쌍곡선

    버스를 타고 가다가 발견한 것이 있다.

    나는 이 사진에서 무엇을 발견한 것일까?

    뭐…이 글의 제목을 보면 알겠지만, 나는 쌍곡선을 보았다. 어디서?

    확대해서 찍어보면, 쌍곡선이 조금 더 분명하게 보인다.

    쌍곡선이 무엇인가 하면 서로 다른 두 점을 정해놓고서, 그 두 점까지의 거리의 차이가 일정한 점들의 집합이다. 만약 두 점이 같은 점이라면, 쌍곡선은 그냥 두개의 직선이 된다.

    쌍곡선을 만드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원뿔을 자르는 것이다.

    전등갓이 씌워진 상태의 전등에서 나오는 불빛은 꼭지점 근처를 빼면 거의 원뿔 모양으로 퍼져 나간다. 그리고 그것이 벽에 닿게 되면, 벽이 만드는 평면에 의해서 잘라진다. 그리고 빛이 닿지 않는 부분은 그림자가 생긴다. 따라서 벽에 비춰진 그림자와 빛의 경계선은 원뿔을 자른 곡선이 되고, 2차곡선의 하나가 된다. 물론, 좀 찌그러지긴 했지만, 아무튼 쌍곡선은 맞다.

    아름답지 않은가?

    …안그런가. -_-;

  • 긍정적 발상

    오늘 집에 오는 길에 최대리님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대리님이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질문하셨다. 어떻게 그렇게 낙관적일 수가 있는가?

    내가 보기에 나는 낙관적이라기보다는 부정적이다. 나는 두가지 선택사항이 있고, 그중 좋은 쪽과 나쁜 쪽이 정해져 있는 경우, 나쁜 결과가 나타날 것이라고 예상하는 편이다. 좋은 쪽은 기대하지도 않으며, 설령 기대하고 있다 하더라도 나쁜 쪽이 일어날 것이라는 불안함을 없애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나의 예상은 부정적인 추측으로 드러난다. 하지만 나의 경우, 부정적인 추측은 긍정적인 성격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편이다. 부정적인 추측은 추측으로 끝나지 않고, 그에 대한 대비를 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물질적인 준비는 못한다 하더라도 최소한 마음의 준비는 할 수 있다.

    누구보다도 꿈을 이루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하지만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불안함에 떨고 있다.

    그리고 꿈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서 여러가지 대안을 세워 둔다.

    아직까지는 그 대안을 사용할만큼 부정적인 상황에 오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