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칭성(Supersymmetry)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입자로 표현된다. 이 말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의 기본 가설이다.


http://snowall.tistory.com/8

우리 우주에 어떤 입자들이 있는지는 위의 글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간략히 보자면, 페르미온과 보존으로 나눠지고, 페르미온들은 쿼크와 렙톤으로 나눠진다. 보존은 빛, W, Z 보존, 글루온, 중력자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입자들은 모두 각각의 반입자를 갖고 있어서 그 종류가 두배로 뻥튀기 된다.

초대칭성은, 이 모든 입자에 초대칭 짝(Super Partner)이 있다고 하는 가정이다. 즉, 페르미온은 보존 짝들이 있고, 보존은 페르미온 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존들의 초대칭 짝들은 뒤에 ino를 붙인다. 즉, Photino, Wino, Zino, Bino, Gluino, Gravitino라고 한다. 반대로, 우리가 아는 입자들의 초대칭 짝들은 앞에 s를 붙인다. 즉, squark, sup, sdown, scharm, sstrange(?), stop, sbottom, slepton, selectron, smuon, stau, sneutrino등등.

아무튼, 이걸 보고서 느껴지는 것.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페르미온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보존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페르미온에 보존 짝이 있고, 모든 보존에 페르미온 짝이 있다면, 물질은 힘이고 힘은 물질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딱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일부 영화 제목으로도 쓰인 바로 그 유명한 글귀이다.



色不異空 (색불이공)

空不異色 (공불이색)

色卽是空 (색즉시공)

空卽是色 (공즉시색)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이때, “색”은 물질적 실체이고 “공”은 마음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양자역학이나 초대칭성 이론을 알았을리는 전혀 없지만, 어딘가 통하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접근해야 하고, 철학이나 다른 감성적인 비유들이 끼게 되면 오해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인간세상의 일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된다.

양자, 파동, 입자

양자역학을 배우다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개콘의 “같기도”를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양자역학은 모든 입자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했다. 이건 정말 본질적인 “같기도” 스타일의 과학이다. 개그 코너가 웬 과학을 의미하냐고? 글쎄. 내 생각엔, 우주 만물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아니, 입자인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게 둘 다 성립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설명을 해 주겠다.

파동은 소리이고, 입자는 덩어리이다. 소리, 하면 생각나는게 “노래”다.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른다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파동의 특성이다. 내가 부른 노래를 듣고 감동해서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준다면, 그 동전은 반드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와야 하며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입자의 특성이다. 입자인 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 것 같기도 하다는 뜻은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노래를 했는데, 내 주변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딱 한명만 들은 것이다. 그 사람이 내 노래를 들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의 노래를 들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은 그 어떤 누구도 내 노래를 들은적이 없다. 노래가 파동인 것은 맞긴 한데, 다른 사람은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이 없고, 적어도 한명은 내 노래를 들었으며, 더군다나 정확히 한명만 내 노래를 들었다면, 내 노래는 입자의 특성을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건 잘 모르겠다. 자연의 본질이 그렇다는 말 밖에는 모르겠다. 최근에 MS인가 하는 회사에서는 개방형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를 단 한사람에게만 들리도록 하고 그 주변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얘기한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다.

입자는 발견되는 경우 단 한곳에서만 발견된다. 파동은 모든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졌다는 뜻은, 발견되기 전에는 어디서든지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만약 발견된다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플랑크 상수가 조금 컸다면, MS가 지향성 스피커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말하기와 글쓰기

누가 그랬더라, 사람이 귀가 두개고 입이 하나인건 말하기보다 두배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라고.

오늘은 교수님한테 미친듯이 혼났다.

내가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가 독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점에 대해서 한소리 들은 거니까 딱히 변명할 건 없다.

고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쓴 글들과, 그 글에 많은 분들이 달아주신 댓글을 보면, 나는 글은 잘 쓰는 편인 것 같다. 하지만 오늘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화내는 걸 보면, 나는 말하는 것은 최악인 것 같다. 다른건 모르겠고, 전부터 교수님이 계속 얘기해 왔던 점이 나랑 있다보면 화가 난다고 하시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나를 모를 것이고, 오프라인의 내 친구들은 온라인의 나를 잘 모를 것이다. 두 모습의 나를 모두 아는 사람은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딱히 이중인격인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뿐이고, 말은 순간이고 글은 남기 때문이다. 아예 말을 말자.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치긴 고쳐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내가 말하는 습관이 바로잡힐지, 적어도 남들이 화를 내는 말투는 고쳐보고 싶은데, 이거 참 문제다. 솔직한 성격부터 바꿔야 하나. 꾸미고 입에 발린 말을 해야하나. 아, 이런식으로 블로그에 글로 남기면 내가 진솔한데 다른 사람들이 위선자인 것처럼 오해하겠다. 그런건 아니다. 나의 독설에서 독을 빼야 한다. 근데 단어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니, 난감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능할까. 남을 배려하는 말투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오늘 점심 먹으면서 잠깐 생각해봤던 건데, 나는 내 마음을 내놓고 다니는 것 같다. 마음을 감추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기 때문에 내뱉는 푸념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렇겠지. 위험한걸까.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가? 교수님한테 아주 많이 혼나고 나면, 일단은 반성하는게 아니라 화를 내나? 그렇다고 내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약간의 감정적 동요를 느끼면서, 고치긴 고쳐야 겠다고 진심으로 느끼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답답하긴 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그냥 교수님께 전해드리고 싶다. 그런데 그걸 말로 전할 수는 없다. 말로 전하면 또 기분이 나빠지실 테니까. 뭔가를 바꾸긴 해야 한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난 지금 당장 내일 아침부터 나 자신의 바뀐 모습을 만들어 놔야 하는 강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

알고 있다. 난 “관습”이나 “예절” 같은걸 배운적이 없다. 나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다. 내가 잘난놈이어서 그런것도 아니다.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건 다 싫었고, 남들이 하는걸 싫어했다. 그 결과, 사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24년간 살았는데 난 아직도 사회가 어색하다. 내 관점에서 보면 참 세상은 이상하다. 나를 바꾸기도 힘든 일이고, 세상을 바꾸기도 힘든 일이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나? 자살? 자퇴? 근데 난 왜 극단적인 낙관을 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난 이 헛소리를 쓰면서도 미래를 낙관한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오늘 교수님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후벼 팠고. 아무튼 교수님께서도 화나시고 답답하시니까 말씀하셨겠지만, 나 역시 힘들다.

내가 소심하긴 한가보다. A형이라 그런가.

모르는 것은 보약이다

아이들이 창의력 문제의 답안이라고 쓴 글들을 쭉 읽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수많은 아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랍시고 생각해낸 생각이 다 똑같다는 점이다. 어찌 그리 비슷할 수 있을까.

문제 유형이, 가령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세요”라고 했으면, 최소한 문제에 제시된 예제는 쓰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아니면 예제를 아주 확실하게 발전시키든가. 인터넷 검색이 아주 좋아진 것도 좋고, 지식인 사이트가 있어서 문제의 답을 물어볼 곳이 있는 것도 좋은데, 이건 문제를 우수답안을 선정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 옳은 것이다. 그게 없으니 창의력이 죽지. 몰개성화 된 답안만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 푸는게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야 배울 수 있을까. 그것도, 답안을 남들과 다르게 내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서 배우려나. 나만 해도 당장 너무 아는게 많아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구별한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해봐야 남들이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어디서 주워들어서 그에 대한 조금 발전된 답을 내놓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르는 초보들이다. 이런 때 아니면 창의력을 발전시킬 시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들 똑같은 생각만 하는 걸까.

선행학습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몇년 이후에나 배울 내용을 미리 알아봐야 쓸데가 없다. 쓸 수도 없다. 어차피 몇년 후에 다시 배울 텐데. 의미도 없다.



[각주:

1

]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줄 모르기 때문에 덤비는 것 아니던가. 젊을 때는 세상이 무서운 걸 모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 아니던가. 창의력은 아직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의 뇌는 한번 알게 된 것을 모르게 되기는 힘들다. 이것은 기억과는 다른 얘기다. 기억은 잊혀질 수 있지만, 지식으로서 알게 된 것들은 모르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그때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시기이다. 대부분 이 시기에 상상했던 것들이 평생 써먹는 상상력의 밑천이 될 텐데. 그것은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불가능한 것이다. 피터팬을 보자. 그는 모르기 때문에 날아다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사람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날아다닐 수 없게 된다. 누가 그에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면 여전히 날아다닐수 있을까?



[각주:

2

]


더이상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는 남들보다 앞서갈 수 없다. 남들과 같은 수준조차 되지 않는다. 뒤처질 따름이다. 무식한 건 죄가 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것 자체도 자신의 잇점으로 활용해야 진정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1. 야오이인가.

    [본문으로]
  2. 이런점에서 후크는 바보다.

    [본문으로]

믿음

요새 이슈들을 보자.

1. 황우석 아저씨 지지자들

2. 이명박 아저씨 사인 위조

3. 창조론의 창궐

선정 순서나 방법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보이는대로 적어 본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멀더와 스컬리의 주장과는 다르게, 진실은 저기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지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저런 류의 거짓말들은 정답을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고, 과연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창조론 얘기 같은 경우, 진실을 아는 것이 신밖에 없는데 과연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신이 직접 계시를 내려서 진화론이 맞다고 하면 창조론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럴리 없다고? 글쎄. 신이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진화론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다뤄져야 한다. 여기다가 신이 쐐기를 딱 박아서 “내가 창조 안했다”고 얘기하는데 여기다가 대고 토를 다는 사람은 지옥에나 떨어지겠지.

나 역시 무언가를 믿고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나로서는 구별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줄 사람도 없다. 누군가 “그거 구라야, 넌 이미 낚였어”라고 확인해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뭔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와, 어딘가에서 읽어본 얘기와, 내 머릿속에서 적당히 꾸며 본 가설과 이유를 근거로 하여 논리로 포장하여 맞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난 창조론은 틀렸고 진화론이 맞다고 믿는다. 난 황우석 아저씨는 아무튼 구라를 쳤다고 믿는다. 이명박 아저씨는 사인을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부 믿음이다. 이 믿음에 무언가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한테 믿으라고 얘기하려면 뭔가 부족하다. 내가 믿는 것을 남들도 믿으라고, 내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위태위태한 신의 존재만 해도 그렇다. 요즘같은 세상, 신이 있었다면 이딴 세상을 이대로놔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신이 있어서 부도덕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근데 그건 일단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거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세상의 혼란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다.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를 굳이 신의 권능이라든가 누군가의 음모로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간편하다. 딱히 근거도 없지 않은가. 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내세우는 근거라고 해 봐야 성경의 어떤 구절들인데, 그건 이미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이고 벌써 수천년이 지난 얘기다. 그걸 믿는거나 단군 신화를 믿는 거나 거기서 거기다.

미국 속담인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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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반대 얘기도 있던데. 믿는 것만 본다고.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는 이미 결정된 일이다. 진리든 진실이든 바꿀 수는 없으며 변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결정이다. 진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진리만 믿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아집과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들 중에 열린 마음을 갖고 남들의 믿음과 생각을 인정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고 해도 줏대 없다고 욕을 먹는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면, 일단 자신이 믿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고, 틀린 것 같다면 자신의 믿음을 고쳐야 할 것이고, 맞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바꿔야 할 것이다. 문제는 둘 다 힘들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큰소리 치는 것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보지 못했다. 진짜 순수한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당히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많은가. 다 자기 고집에 빠져 사는데, 논리가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메꿀 따름일 뿐이다.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수많은 소식을 접하고, 아주 많은 낚시글들을 보고 있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동된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겠지. 그걸 전부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짜로 의미있는 것은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 밝혀지지 않을 진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언젠가 진짜 진실이 밝혀져서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에서 진실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얘기를 다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이데아의 세상에 살고 있고 나는 그 밑에서 진실의 그림자만 보면서 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할 따름이다. 다 틀렸다. 이건 이미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을 뛰어 넘은 엽기적인 추측에 다름아니다.

데카르트가 이 방법론을 처음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 아저씨는 맨날 의심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심했고. 그치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답이 없거나 자기가 답이라고 생각하는게 답이니까 별로 의심한 의미가 없다. 진짜 의심은, 자신이 믿는 모든 진실을 의심하고,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불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의심만 하라는 뜻이다.

뭐, 이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우정이나 애정을 의심하는 쪽으로 가 버리게 되면 의처증이 나오고 친구랑 절교하고 그러는 거지만. 그건 그 사람이 진실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믿는 것이 전부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바람 피운게 의심을 넘어서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람이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한번쯤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것을 싸그리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세상에 진실 중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내가 어제 화장실을 몇번 갔다 왔는지는 내가 까먹어 버리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 단 하나의 진실이 있지 않겠는가. 위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1. Seeing is believing

    [본문으로]

행복론 : 행복은 여기에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행복이란. 사람들이 항상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행복은 그 속성이 악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것은 노자의 도와 통해 있는 얘기인데, 만약 행복이라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불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모든 슬픈 이야기들은 실현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당장 인터넷을 보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웹 페이지가 검색되어 나온다. 구글에서는 현재


36,500,000개

의 웹 페이지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걸 보면 행복한가?

행복해지는 방법의 아주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만족”을 포함한다. 즉,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행복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고, 적응하면 그것이 곧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현재에 만족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가? 물론 욕심부리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못할만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쉽고 어쩌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했다고 해 보자.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입자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데, 입자물리학자가 되면 참으로 배고프게 살 것 같다. 이래저래 힘들고, 돈도 많이 못 벌 것 같고, 미래는 암담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을 갖고 회사에 들어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한다면 어쩌면 좀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거고, 그 돈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쪽이 진짜 행복일까? 사람에 따라서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행복을 찾아서 헤메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당장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할 수는 있다.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다음에,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의 살아온 길을 돌아본다면 그 과거는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뜯어먹고 사는 동물인데 말이다.

사람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생존율을 높이고 더 많은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냥 지금 편하면 좋을 것을, 과거를 회상해 보면 아쉬운 기억들이 한참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 한번 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당신의 과거에도 만약은 없다. 현재 당신이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여러가지 선택 가능성 중에서 당신이 했던 바로 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어떻게 될지는, 당신의 미래 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 행복하고 지금 괜찮으니까 나오는 배부른 소리라는 얘기다.

따라서, 그런 후회를 하기 싫으면 애초에 선택을 잘 해야 한다. 현재에 만족하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행복한 그 순간, 당신은 그곳에 멈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고, 당신의 생각을 느리게 할 것이며, 당신을 중독시킬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행복을 원하는 마음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 거기에 멈추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분명 충분히 행복한 상황일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더 높은 행복을 찾아서 떠난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현재에 만족하라고 얘기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 버리면, 나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나는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한순간 한순간을 나의 꿈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행복이다.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행복할 수 있다.

키보드 질렀다

Targus의 접이식 미니 키보드를 질렀다. 기대와는 약간 다르게, 나름 불편하다.

생긴건 HHKL2랑 똑같이 생겨서 기대하고 있었는데, 알파벳 부분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너무 불편할 것 같다. 뭐, 그정도는 감수해 줘야겠지. 원래 내가 쓰던 노트북 키보드는 좀 큼직큼직한데, 이놈은 알파벳 부분만 풀 사이즈고 나머지는 절반 이상 작아져 있다. 심히 난감하긴 하다. 그러나 키감은 괜찮은 편이고, 그럭저럭 적응되면 쓸만해질 것 같아서 만족이다. 가격은 6만원이라 안습. 뭐, 작다보니 어쩔 수 없지만, 이거 가격이 왜 HHKL2보다 비싼거냐. 음…;

방향키는 진짜 캐안습이다. 일반적인 키보드가 아니라 리모콘 버튼 같은 느낌으로,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이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이 정말 아쉬운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접어서 들고 다니는 걸 필요로 한다면, 괜찮은 선택이 될 수 있다. 키감은 일반 펜터그래프와 비교할 때 딱히 나쁘지는 않다. 오히려 이런 키감을 좋아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표준이 아닌 부분 때문에 표준배열인 알파벳 부분에서도 오타가 나올 수 있으니, 적응하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스트레스 받는 상황에서 지름이 있으니 이거 나름 스트레스가 풀린다. 지름신의 영향인가…

근데, 이 키보드 하루동안 써 보며서 느낀 건데, 물음표 칠 때 상당히 곤란하다. 쉬프트를 가급적 왼쪽 쉬프트를 쓰는 습관을 들일 필요가 있다고 본다. 그리고 모음 ㅗ를 칠 때 모음 ㅓ하고 많이 오타가 생기게 된다.

사용기 적어둔 곳들 보면 백 스페이스 키가 연타가 안되는 문제가 있다고 하던데, 그런 문제 없이 잘 되더라. 이만한 사이즈에 부담없는 키 크기면, 다른 부분들은 희생해야지 어쩔 수 있나. 지금 이 글도 미니 키보드를 이용해서 치고 있는 중이다. 그럭저럭 만족스럽다.

스페이스 키는 두개로 쪼개져 있는데 스페이스를 치는 손가락인 엄지 손가락이 가장자리 하우징에 걸려서 정확하게 눌리지 않는 경우가 생긴다. 뭐, 익숙해지면 될 것 같다.

생긴게 확실히 HHK와 같아서 그런지 적응하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은 편이다. 물론 HHK에 적응한 사람만 그렇겠지만. 그래도 화살표키는 여전히 안습…

연습삼아서 잡담을 계속 적어내려가고 있다. ㅋㅋ

지성, 지능 vs 방사성, 방사능

방사선(radiation)은 원자핵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종류의 입자 빔을 말한다. 그래봐야 알파, 베타, 감마, 중성자, 이렇게 네 종류밖에 없다. 알파선은 헬륨의 원자핵과 똑같은 녀석



[각주:

1

]



인데, 중성자 두개와 양성자 두개로 이루어져 있다. 베타선은 전자(electron)이고, 감마선은 그냥 광자(photon)다. 중성자는 남들이 다 아는 그냥 중성자다.

방사선을 방출할 수 있는 능력을 방사능(radioactivity)이라고 한다. 방사능을 가진 물질을 방사성 물질이라고 한다. 이런 물질들은 기본적으로 이온화를 많이 일으키기 때문에 화학 반응에 관여할 수 있고, 따라서 생명 활동을 하는 생화학 반응에도 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생명 활동을 하는 세포에 쬐이게 되면 일단 그 세포가 죽거나, 미치게 된다. 세포가 그냥 죽으면 괜찮은데, 미쳐버리게 되면 암으로 변신해서 자기 몸을 공격하게 되므로 방사성 물질 근처에는 되도록 가지 말자.

지식은 인간의 활동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종류의 창작물을 말한다. 그래봐야 사람의 오감을 자극할 수 있는 형태의 정보로만 기록될 수 있다. 시각 창작물은 그림과 문자로 구성되어진다. 청각 창작물은 음악이라고 부른다. 음악은 악기 소리와 사람 목소리로 구성된다.

지식을 창조할 수 있는 능력을 지능이라고 한다. 지능을 가진 동물을 인간이라고 부른다



[각주:

2

]



. 이런 인간들은 기본적으로 욕심을 많이 부리기 때문에 지식 생성에 관여할 수 있고, 따라서 지적 활동을 하는 다른 인간의 사상에도 관여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적 활동을 하는 인간과 만나게 되면 일단 그 인간이 도망가거나



[각주: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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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치게 된다. 인간이 그냥 도망가는 건 괜찮은데, 미쳐버리게 되면 독재자



[각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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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 변신해서 자기 나라를 공격하게 되므로 지식인



[각주:

5

]



근처에는 되도록 가지 말자.

*이 글에 대한

논리적

비평은 사절입니다. 농담으로 받아들이세요. 꼭이요!

  1. 헬륨의 원자핵이라고 부른다. 이런 이유로 헬륨의 원자핵을 알파입자라고도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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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이런식의 분류에 대해서, 외계인도 지능이 있을 수 있다는 지적을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어차피 외계어는 내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기 때문에 그의 지능은 나의 지성과 상호작용 할 수 없으므로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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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내게 도를 아느냐고 묻는 도인을 만났을 때, 내가 Lagrangian을 아느냐고 되묻자 그는 도망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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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히틀러, 박정희 등의 독재자를 염두에 두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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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지식in에 관한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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