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snowall

  • 쓸 것들

    현재 머릿속에 있는 글들이다.

    1. Tremulous 공략집
    2. 일반 상대성 이론 공부
    3. 초보자를 위한 양자역학 : 흑체 복사 이론에서 고등학교 수학이 나오는 부분은 어디?
    4. Maple 초보자를 위한 설명서 : Maple의 수식 계산 철학
    5. 중국 감상문(가제)
    6. 블로그 건습구 온도계(?)
    7. 지식인, 집단지성 – 관리/검열 문제로부터 해방되려면
    8. 불만없는 공정 경쟁 시스템 : Askhow의 사례 연구 ~ 죄수의 딜레마 “케이크 자르기” 문제로부터.
    9. 뜻, 문장의 뜻을 이해한다는 것의 뜻 : 칸트와 오리너구리 참고
    10. 일본어와 한국어의 입력 효율성
    11. 팔과 다리의 관성 모멘트 비교를 통한 팔과 다리의 질량과 길이 비율
    12. 박자beat 맞추기의 신기함
    13. 영어, 일본어, 한자로 쓴 말이 한국어보다 멋있어 보이는 현상
    14. 이재율씨와의 이메일
    15. 중성미자 지구과학(Neutrino geology)

    잡념은 발산하는데 꺼낼 시간이 없다.

    이미 쓴 글들은 목록에서 제거함.

    안쓸 글들은 취소선으로 긋고 아주아주 나중에 생각해 보기로 함.

  • EAS가 안꺼져요

    이올린 안티 스팸 플러그인(EAS)이 티스토리 환경설정에서 사용하지 않게 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왜그럴까요.

  • 칸트와 오리너구리

    오늘 드디어 움베르토 에코의 논문집인 “칸트와 오리너구리”를 다 읽었다. 아주 대충 읽었기 때문에 내용은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읽기만 했다.

    소설 “어린 왕자”에 나오는, 비행사가 어린시절 그렸던 “코끼리를 잡아먹은 보아뱀”의 그림이 모자로 이해된 것이나, 어린 왕자가 양을 그려달라고 했더니 상자 하나를 그리고 “이 상자 안에 양이 들어 있다”라고 해서 이해한 것이나,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기호학적인 관점에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저 책은 어린왕자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아무튼 다음에 다시 읽고 싶어지는 책이다.

  • 자유 소프트웨어, GPL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마잇”님의 글을 KLDP에서 CC라이센스에 의해 복사해 왔습니다. 원문 링크는 다음과 같습니다.


    http://kldp.org/node/88087


    자유 소프트웨어, GPL 주는 것일까? 받는 것일까?



    리눅스를 시작으로 GNU, 자유소프트웨어, GPL, 오픈소스 등에 관해서 얘기하다 보면 이것을 ‘베푼다’, ‘도움을 주다’, ‘기부한다’의 개념으로 생각하시는 분들이 정말 많은 것 같습니다.

    맨날 쓰기만 하고… 기여좀 해야 하는데 시간은 없고… 이런 얘기, 오픈소스 관련 커뮤니티들의 글타래에서 어렵지 않게 볼수 있는 내용들입니다. 물론 그런 감정이 잘못되었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다만 저런 글을 쓰게 만드는 그 심리적인 배경에는 ‘도움을 받았으니 나도 뭔가 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부담감이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리눅스 커널과 GNU의 핵심 프로그램들, GPL과 많은 오픈소스 라이센스로 제공되는 프로그램들이 한데 뭉릴瀏좋 집약돼있는 배포본들을 사용해보면 독점적인 방식으로 개발되면서 유료로 제공되는 다른 운영체제와 비교해서 그다지 뒤쳐지는 품질이 아닙니다. 주류가 아니고 기존 기업들에게 생소한 개념 때문인지 적극적인 후원을 받지 못해서 상대적으로 아직 뒤쳐지고 불편한점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런 것을 잊고 생각하더라도 단순히 매니아들의 장난감 수준을 넘어선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국내에는 아직이겠지만 북미나 유럽시장에서는 주류 하드웨어 제조사, 판매사들이 리눅스를 심어서 팔기 시작했습니다.

    그럼 이렇게 쓸만하고 훌륭한 물건들을 공짜로 쓸 수 있기 때문에 이 모든 개발자들을 자원 봉사자로 보아야 할까요? 독점 소프트웨어 개발로 갑부가 된 배부른 프로그래머들이 불쌍한 대중들을 위해 뿌리는 공짜 배급품일까요? 아름다운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숭고한 프로그래머들?

    이런 잘못된 믿음을 좀 다시 생각해봐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이러한 미신적인 믿음이 기존 독점 소프트웨어의 방식으로 자라난 세력들이 선뜻 자유 소프트웨어 세상에 발을 담그지 못하게 만드는 큰 원인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이쪽으로 돈이 흘러드는 것을 방해하고 있지요. 그래서 저의 이 멋진 15인치 와이드 델 노트북이 리눅스에서 제 힘을 다 못쓰는 안타까운 사태가 벌어지기도 합니다. 뭐 이게 이 글을 쓰게 만든 동기는 절대 아닙니다만… 🙂

    자유 소프트웨어가 점점 널리 퍼지고 있는 원인은 숭고한 마음을 가진, 헌신적인, 돈은 쓸만큼 있고 그래서 시간은 좀 남아도는 프로그래머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 절대로 아닙니다. 소프트웨어를 만들어보고 사용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가치들을 자유 소프트웨어 세상의 규칙안에서 보다 더 자연스럽고 효율적으로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독점이든 자유든 ‘좋은 소프트웨어가 사랑 받는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되는 진실이 될 수 있습니다. 독점이기 때문에 혹은 자유이기 때문에라는 이유만으로 사용되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대부분 옆사람이 쓰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합니다. 그 옆사람은 또 누군가가 쓰는 소프트웨어를 사용했겠지요. 이 트리 구조를 따라 뿌리를 찾아보면 최초에 능동적으로 이것저것 사용해보고 그중 가장 좋은 소프트웨어를 선택하고 사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는 좋은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는 결론에 다다릅니다 : )

    자유 소프트웨어 즉, GPL은 바로 그러한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기 위한 가장 일반적인 규칙을 모아 놓은 것입니다. 뭔가 베풀고 싶은데 상업적인 착취는 막기 위해서 만들어 놓은 그런 규칙은 절대 아닙니다. 상업적이냐 아니냐를 떠나서 우리 인류에게 새로운 자산과 가치로 떠오른 ‘소프트웨어’라는 이 무형의 물건을 어떻게 만들어가는 것이 가장 자연스럽고 효율적이냐를 규정한 것이 바로 GPL 입니다.

    왜 아무나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하고 다른 사람들하고 돌려 쓰는 것도 허락하고 만드는 방법이 고스란히 담긴 소스까지 공개하는 것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방법이 될 수 있을까요.

    반대로 한 번 질문해 봅시다.

    아무나 쓸 수 없고 정해진 계약을 한 사람만 쓸 수 있고 만드는 방법도 알 수 없어서 고쳐 쓸 수도 없게 하는 것이 더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방법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누군가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을 잠시 잊어버리고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만 해보겠습니다. 저는 널리 사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 한가지 만으로도 자유 소프트웨어의 규칙이 단연 우월함을 가진다고 생각합니다. 널리 사용된다는 것, 이것은 당장의 기술적 우월성을 떠나 발전 가능성 면에서 대단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사용할 수 없는 기술이 어떤 가치를 가질 수 있을까요. 저는 과학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술입니다. 흔하게 언급되는 VHS와 베타맥스의 예를 생각해 보십시오. 블루레이와 HD-DVD 중에서 누가 승리할까요? 더 널리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승리할 것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둘 다 망할수도 있겠지요.

    이런 우월함때문에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자연스럽게 자유 소프트웨어의 규칙에 끌려들 수 밖에 없습니다. 더 많은 사용자를 확보할 수 있다는 이 마력을 무시할수는 없겠지요. 그럼 도대체 돈은 어떻게 버느냐? 이것은 솔직히 저의 관심 밖입니다. 저는 소프트웨어 만드는 기술자가 아니거든요. (이런 무책임한…)

    자고로 어떤 사회 계층에서든지 돈을 많이 버는 부류는 기술자가 아닙니다. 돈을 잘 버는 사람은 기업가나 정치가죠.

    어쨌든 한가지 말씀드릴 수 있는건 자유 소프트웨어 세상이 점점 커짐에 따라서 ‘새로운 형식의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기술자로서 자신의 증명 – 보유한 기술, 협업 능력, 대화의 기술, 사용자와의 의사 소통 능력 등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력서를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죠.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수 있고 만들어 본 사람이 더 좋은 일자리를 얻을수 있다는 것은 꽤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되는데 뭐 아무래도 현실은 좀 차이가 있겠지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지만, 자유 소프트웨어가 주류가 되면 소프트웨어로 먹고 사는 기업 즉, 취직할 직장이 없어진다는 허황된 생각하시는 분들은 없으시겠죠. 독점 소프트웨어가 주류일때보다 더 널리, 더 많이 소프트웨어가 사용될 것은 뻔한데 그런 일은 물론 없을 것이라고 저 장담할 수 있습니다.

    기존의 어떤 기술이나 재화도 가지지 못했던 고유의 특성 때문에 소프트웨어는 매우 빠르고 쉽게 우리 생활 모든 곳에 사용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보다 널리 사용되어질 수 있고 발전 가능한 잠재력이 풍부한 쪽을 선택하는 쪽이 개인으로서나 사회 전체로서나 매우 자연스러운 행동이 됩니다.

    기존의 독점 소프트웨어의 규칙으로는 이런 욕구를 충족할 수가 없었죠. 사회 전체와 마찰이 생겨날 수 밖에 없습니다. 운영체제에 웹 브라우저 끼워 판다고 천문학적인 벌금 때려 맞는 마이크로소프트의 경우는 한편의 코미디 같습니다. 웹 브라우저든 뭐든 사용자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거 운영체제에 기본 탑재해주는 건 좋은 겁니다. 편하죠. 문제는 마이크로소프트 제품이 독점 소프트웨어라는 겁니다. 사회 전체가 이 독점 소프트웨어의 규칙이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어떻게든 제재하고 싶어서 까는 것으로 밖에는 해석이 안됩니다. 당하는 입장에서는 참 억울한 일이겠지요. 사회 전체의 합의에 의한 이런 부당한 행동은 독점 소프트웨어의 방식이 자연스럽지 않다는 사실에 대한 간접적인 증명입니다.

    자유 소프트웨어는 ‘베품’이 아닙니다. 자원 봉사도 아닙니다. 보다 좋은 기술을 만들어내기 위한 냉정하고 합리적인 선택입니다. 저 또한 사용자로서 거대 독점 기업에 맞서거나 단순히 남들과 다른 특별한 것을 위해서 자유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좋은 소프트웨어들이 여기에 있고 잠재적인 발전 가능성이 더 우월하기 때문에 당장 소수로서의 불편함을 감수하면서도 사용하는 것입니다.

    저는 베품과 기여를 부정하고자 이 글을 쓴것은 아닙니다. 단지 망설이고 있는 많은 수의 개발자들이 자유 소프트웨어에 숨어 있는 잠재력을 올바르게 보고 결정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독점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면서 여가 시간에 짬짬이 참여 하는 것이 자유 소프트웨어가 아니라 더 좋은 기술, 더 많은 사용자를 원한다면 당연히 자연스레 선택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자유 소프트웨어라고 생각하시기를 바랍니다.

    어쨌든 우리는 꼭 뭔가를 베풀거나 봉사하면서 살 필요는 없습니다. 좋은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사용할 수 있다면 그뿐입니다.

  • 도너스 캠프 홈페이지 문제

    이 글은 도너스 캠프를 일방적으로 비난하기 위한 글이 절대 아님을 먼저 밝히고 시작하겠다.

    일단, 아래의 도너스 캠프 홈페이지에 들러보자.


    http://www.donorscamp.org/



    가능하면

    인터넷 익스플로러IE와 파이어폭스FF 등의 다양한 웹 브라우저를 이용해 보자.

    내가 사용하는 웹 브라우저는 IE와 FF인데, 도너스 캠프 홈페이지는 FF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완전히 안되는 건 아닌데 예를 몇가지 찾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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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단 여기는 첫 페이지의 중앙 부분의 제안서 링크다. 클릭하면 관련된 내용으로 이동하게 되는데 여기에 대체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FF에서 작동하지 않는 자바스크립트가 사용되어 있다. IE에서는 저 부분이 회원가입 없이도 글을 읽을 수 있는데 FF는 가능하지 않다. 링크는 그냥 a href=”http:…”이런 식으로 써서 연결하면 되는거지 굳이 자바스크립트까지 써야 했나? 새창띄우기도 아니고, 그냥 “같은 창”에서 오가는 것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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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실은 메인페이지의 대부분의 링크가 이런식으로 작동을 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건 문제가 있다고 본다. 왜 문제가 되는지는 뒷부분에서 얘기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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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첫 페이지에서 교육제안서/자원봉사 찾기가 있길래 클릭을 해봤더니 작동을 안한다. 뭔가 싶어서 IE에서 구경해보니 다음과 같다. 마우스를 올리면 롤오버로 아래의 검색창이 뜨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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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것도 부분도 굳이 자바스크립트로 처리해야 했나? 처음부터 검색창 보여주고, 검색창 안쪽에 기본 글씨나 배경으로 “교육제안서/자원봉사 찾기”라고 적혀 있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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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은 내용을 넣더라도 더 좁은 공간에 충분히 다 넣을 수 있다. 저 버튼 만들 공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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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아웃 깨지는건 사실 마이너한 버그라고 볼 수 있다.

    근데 이런건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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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아웃 깨지는 것 까지는 그렇다 쳐도, 아래와 같이 내부 프레임에서 깨지면, 그것도 회원가입 같은데서 깨지면 초초초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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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을 쓰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원래 이 글을 쓰기 시작한건 첫페이지의 자바스크립트가 작동을 안하기 때문이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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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커뮤니티 메뉴에 있는건 작동한다. 게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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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똑같아 보이는 스크립트다. -_-; 내부적으로 뭐가 다른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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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너스캠프UCC라는 곳의 상황인데, 여긴 레이아웃도 깨지고 동영상도 없다. ㅜ_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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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지사항 부분의 글보기 변경이 안된다.

    이 내용은 IE에서는 잘 되고 FF에서 안되는 것들이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얘기를 해 둔다.

    나는 이런 것들을 왜 문제제기를 하는가?

    이제 조금 진지한 얘기를 해 보려고 한다.

    우선, 도너스 캠프는 저소득층이나 빈곤한 가정의 아이들을 지원하기 위한 사업이다. 즉, 돈이 없는 가정의 아이들이라는 뜻이다. 우리나라의 인터넷 사용 환경이 MS윈도우즈+인터넷 익스플로러에 99%이상 독점되어 있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따라서 도너스 캠프에서 IE이외의 웹 브라우저를 제대로 지원하지 못한다는 것 자체를 문제삼고자 함이 아니다. 내가 문제삼고 싶은 부분은 철학의 문제다.

    잘 알다시피 윈도우즈는 비싼 운영체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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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다시피, 꽤 비싸다. DSP는 컴퓨터를 살 때 끼워파는 가격이므로 정품 가격은 아니지만, 아무튼 저 가격조차 저소득층 아이들에게는 부담스러운 가격일 것이다. 참고로 최신판인 윈도우즈Vista 역시 마찬가지로 10만원에서 20만원 사이에 가격이 형성되어 있다.

    그럼, 누군가에게서 PC를 기증받아서 아이들에게 지원해줄 때 운영체제는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가? 문제는, 기증받은 PC는 성능이 아주 좋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힘들다는 점이다. 물론 완전히 폐기해야 할 정도의 쓰레기를 기부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그렇다고 최신 기종을 기증받는 일도 흔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윈도우즈는 쾌적하게 사용하기 위해서는 상당히 높은 사양을 요구하는 운영체제다. 그리고 도너스 캠프 홈페이지가 잘 돌아가는 인터넷 익스플로러는 윈도우즈 전용 웹 브라우저이다.

    나는 여기에 적절한 대안으로서 리눅스 운영체제를 제안한다. 리눅스 운영체제는 설치나 구입에 비용이 들지 않고, 사용할 수 있는 대부분의 응용 프로그램(문서, 계산, 그림그리기, 음악, 동영상, 웹 브라우저)을 무료로 구할 수 있으며, 성능과 활용도면에서 윈도우즈에 비해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들이 좋아할만한 게임도 많고 교육용 소프트웨어도 꽤 많이 개발되어 있다. 단지

    한국의 웹 환경상태가 기형적으로

    되어 있어서 “인터넷 활용도”가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단점이 있겠다.

    하지만 도너스캠프처럼 저소득층 아이들을 지원하는 단체의 홈페이지조차 인터넷 익스플로러 전용 홈페이지라면 아이들은 여기에 “고맙습니다”라는 글을 쓰기 위해서 윈도우즈를 어떻게든 사용해야 할 것이다. 여기에는 어떤 의미에서든지 “비용”이 들어가게 될 것이다.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작은 비용이지만 저소득층 아이들에게는 꽤나 큰 돈일 수 있는 그 “비용” 말이다. 덧붙이자면, 자바스크립트나 플래시 등으로 도배된 사이트는 시각장애인들의 접근성 향상에 방해가 된다.

    물론 윈도우즈를 불법 복제를 해서 사용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이들에게 어릴때부터 도둑질을 가르치는 것도 그다지 내키는 일은 아니잖은가?

    웹 페이지를 익스플로러 전용으로 제작하느냐, 아니면 브라우저에 상관 없이 대체로 비슷하게



    [각주:

    1

    ]



    보이게 하느냐는 사실 아주 “사소한” 관심의 차이이다. 앞서 지적한 부분 중에서, 그냥 링크로 연결하면 될 것을 굳이 자바스크립트로 연결하는 것이 대표적인 예이다. 무슨 화려한 효과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그냥 링크인데도 말이다. 물론 도너스캠프에서 이 홈페이지를 직접 모두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고 외주를 줘서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외주 제작 업체에게 브라우저에 상관 없이 대체로 잘 작동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클라이언트(=갑) 입장에서 당연히 할 수 있는 요구일 것이다. 어쨌거나 관심의 차이다. 힘들다거나 단가가 너무 비싸진다거나 말하지는 말자. 인터넷 익스플로러의 제작사인 마이크로소프트의 홈페이지는 파이어폭스에서 잘 돌아간다.

    도너스캠프를 특정 대상으로 삼아서 얘기했지만, 이 문제는 사실 우리나라 웹 환경의 전반적인 문제이다. 그리고 고질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화려함을 추구하다보니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이다. 누구나 IE를 사용하고 누구나 윈도우즈를 사용할 수 있다면 이 문제는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가 않다.

    사기업들이야 돈 있는 사람들에게 물건을 팔아야 하니까 돈 있는 사람들을 위한 웹 페이지를 만들어도 좋다. 하지만 공익사업의 홈페이지라면 돈 없는 사람들에게도 개방적으로 운영되어야 하지 않을까?

    뱀다리 : 그건 그렇고, 버그 찾다가 회원가입도 하고 이것저것 둘러보게 되었다. 그것도 꽤 상세하게 -_-; 나중에 정신적인 여유가 되면 활동을 해 보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 완전히 같게 보이는 것은 텍스트만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웹 브라우저마다 HTML을 해석하는 방식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 시 제15호

    시제 15호

    1

    나는 거울 없는 실내에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역시 외출중이다. 나는 지금 거울 속의 나를 무서워하며 떨고 있다. 거울 속의 나는 어디 가서 나를 어떻게 하려는 음모를 하는 중일까.

    2

    죄를 품고 식은 침상에서 잤다. 확실한 내 꿈에 나는 결석하였고 의족을 담은 군용 장화가 내 꿈의 백지를 더렵혀 놓았다.

    3

    나는 거울 있는 실내로 몰래 들어간다. 나를 거울에서 해방하려고. 그러나 거울 속의 나는 침울한 얼굴로 동시에 꼭 들어온다. 거울 속의 나는 내게 미안한 뜻을 전한다. 내가 그 때문에 영어되어 있드키 그도 나 때문에 영어되어 떨고 있다.

    4

    내가 결석한 나의 꿈. 내 위조가 등장하지 않는 내 거울. 무능이라도 좋은 나의 고독의 갈망자다. 나는 드디어 거울 속의 나에게 자살을 권유하기로 결심하였다. 나는 그에게 시야도 없는 들창을 가리키었다. 그 들창은 자살만을 위한 들창이다. 그러나 내가 자살하지 아니하면 그가 자살할 수 없음을 그는 네게 가리친다. 거울 속의 나는 불사조에 가깝다.

    5

    내 왼편 가슴 심장의 위치를 방탄 금속으로 엄폐하고 나는 거울 속의 내 왼편 가슴을 겨누어 권총을 발사하였다. 탄환은 그의 왼편 가슴을 관통하였으나 그의 심장은 바른편에 있다.

    6

    모형 심장에서 붉은 잉크가 엎질러졌다. 내가 지각한 내 꿈에서 나는 극형을 받았다. 내 꿈을 지배하는 자는 내가 아니다. 악수할 수조차 없는 두 사람을 봉쇄한 거대한 죄가 있다.

    ——

    국어 선생님들이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시였는지, 교과서적인 해석을 찾기 힘들다.

    거울속의 나는 내가 죽지 않는한 죽지 않는다.

  • 시 제1호 (이상)

    시 제 1 호

    13인의아해(兒孩)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 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

    교과서적인 해석

    http://www.woorimal.net/hangul/hyundai-poem/ogamdo.htm

    이상의 시집 “오감도”에 실린 시의 1번 시이다.

    그냥 질주하는 아해들과, 아무튼 신경 안쓴다는 화자.

  • 거울 (by 이상)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握手)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요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료마는

    거울이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라도했겠소

    나는지금(至今)거울을안가졌소마는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事業)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反對)요마는

    또괘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診察)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

    교과서적인 이해

    http://www.seelotus.com/gojeon/hyeon-dae/si/si-new/lee-sang-geo-ul.htm

    나는 이상 시인의 시를 참 좋아한다. 끝없는 절망, 남들이 감히 밑바닥이라 부르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이있는 좌절상태. 인간이 살아가면서 그렇게 좌절할 수도 없을 것이다. 그의 산문 “권태”를 읽다보면 정말 아무리 활기찬 사람이라도 읽다보면 권태롭게 만드는 힘이 있다.

    암울한 시대이다. 그 누구도 좌절하기 쉬운 시대. 하지만 이상이 표현한 좌절만큼 깊이 절망할 사람도 흔하지는 않을 것이다.

    시 “거울”에서, 화자는 거울 속의 나를 친근하게 여긴다. 거울속의 나는 타자로서의 자신인데, 남들이 바라보는 내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나 자신을 알지만 남들이 바라보는 나와 다르다는 것도 안다. 남들이 바라보는 나는 나 자신의 말을 듣지 않고 나 자신과 악수도 하지 않으며 친할 수도 없다. 하지만 거울이 아니면 만나보기라도 할 수 있었겠는가. 거울에 의해 나는 나 자신과 만져볼 수도 없지만 말이다.

    참 딱한 자신이다. 자신에 대한 무한한 연민과 사랑이 없다면 이 시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겉보기에는 그냥 우울하고 절망에 관한 시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굉장히 강한 의지를 보여준다. 왜? 나 자신이 어디있는지 알거든. 나를 찾아 헤메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은 거울 앞에서 만나볼 수 있거든.

  • 개벽

    오늘은 증산도 계통의 사람을 만났다. 이쪽 사람들이랑 만난 것은 이번이 3번째다. 아마 다음번 부터는 세지 못하게 될 것 같다.

    이 사람들이 내게 해준 스토리는 두개의 큰 줄기가 있는데, 하나는 지금이 우주의 가을이니 추수의 때라 추수해야 할 것이고, 다른 하나는 조상의 업보를 내가 풀어줘야 조상과 집안에 대한 가장 큰 효도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답변은 “상관 없다, 아무리 진지하게 생각해 봐도 신경쓰고 싶지 않다. 귀찮아서 놔두는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에 의해 적극적으로 거부하겠다”이다.

    뭐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물어둔 떡밥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심정으로 계속 말을 걸어와서 대략 1시간 정도를 추위에 떨어야 했다.

    이치를 아느냐고 물어봤더니 스스로 공부하는 중이라 아직 깨달음은 얻지 못하였다고 한다. 이치를 알지 못하는데 나한테 가르칠 만큼은 이치를 터득한 것일까? 내가 그냥 인생에 대해 별 고민없이 살아가는 어중이떠중이 정도인 것으로 보였던 것일까. 나의 감정과 나의 사상과 나의 철학과 나의 종교를 모르면서 그렇게 밀어붙이기 식으로 내가 잘되는 법을 알려주겠다고 한다면, 나 역시 그 사람에게 성공하는 방법을 두시간동안 강의해줄 수 있다. 세상의 이치와 자연의 이치에 대해서는, 나 역시 자연과학을 전공하고 있고 인간 본연의 특징과 사회 전반이 굴러가는 현상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기에 내가 딱히 남들보다 잘난건 없지만 최소한 남의 얘기를 무작정 믿고 받아들여야 할 정도로 무지하지는 않다. 그 사람은 나를 무시하지 않고 얘기한다고 말했지만 얘기하는 내내 자신이 공부를 많이 하고 내가 모르는 뭔가를 자신이 알고 있다는 듯한 식으로 얘기를 했다. 도를 공부한다는 사람이 어째서 그렇게 강경한지 모르겠다. 내가 아는 도는 흐르는 물과 같아서 자신을 낮추기에 가장 위대하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그 모습을 바꾸기에 가장 강하다고 알고 있는데 이 사람이 말하는 도는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도였다.

    뭔가 그럴듯한 얘기를 하고 있기에 들어보려고 했으나, 이야기가 깊이있게 흘러가지 않고 겉돌았다.

    본연을 얘기하지 않고 사변적인 것만 얘기해서, 천년전의 중국의 어떤 학자가 우주의 주기를 예측하고 가을이 온다는 것을 예측했다든가, 소빙기와 대빙기는 우주의 주기에 따른 현상이라든가, 업보, 인생, 조상 등등. 조상님 잘 모셔야 내가 잘 된다는 얘기를 계속 했다. 그럼, 내가 나 자신이 잘되기를 포기하면? 그래도 조상님을 잘 모셔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 된다”라는 말의 뜻이 내가 생각하는 뜻과 다르다는 건 알고 있다. 그쪽에서 말하는 “잘 된다”는 뜻에 대해 정확히는 모르지만 최소한 어떤 맥락에서 말하고 있는지는 안다. 그러나 그 사람은 계속 내게 뭔가를 가르치려고 했다.

    내가 바란 것은 깨달음이었는데, 그 사람은 자신의 깨달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보고 들어서 암기한 것을 전달하려고 했다. 결국 그 사람한테 얘기를 듣지 않더라도 내가 책을 읽거나 정보를 찾아보면 알 수 있는 내용들이다. 따라서 그 사람은 내게 전혀 소중한 사람이 되지 못했다. 그 사람은 사람이 지나치다가 대화를 하게 되는 것이 모두 전생의 인연에 의한 것이고 결코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렇지만 그게 인연이었다면 내게도 느낌이 있어서 이 사람이 내게 정말 소중한 것을 전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해주었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

    사실은 지난 8월쯤에 대략 사기를 당했다. 콘도 회원권 1년에 30번 쓸 수 있는 10년짜리 회원권을 무슨 행사에 당첨되어 70만원에 판다고 했는데, 막상 질러놓고 나니까 1년에 한번도 못가게 생겼다. 갈 수도 없고. 명분도 없고 여유도 없고 사실은 관심도 없다. 그런데 그 영업 사원이 내게 했던 얘기가 가족들이나 친구들에게 빌려줘도 충분히 1년에 30번은 채운다고 했다. 사기를 당한건 아무튼 안타깝지만. 뭐, 그 영업 사원이 아주아주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불길한 예감을 느끼고 딱 접었어야 했는데. (썅)

    아무튼 스토리의 플롯이 똑같다.

    길거리 가는 사람중에 적당한 사람 붙잡아서 : 전화번호부에서 적당한 번호 골라서 행사에 당첨!

    이거 하면 집안 전체가 잘돼요 : 이거 회원권 있으면 친구랑 가족이랑 집안사람들 한번씩 다 놀러갈 수 있어요

    100만원 : 70만원 = 겁나게 큰돈은 아닌데 그렇다고 만만한 돈도 아니고, 지르자면 지르겠지만 지르고나면 가슴아픈 것.

    사실 대부분의 맥락을 지난번에 개벽을 내게 얘기했던 사람에게 자세히 들었기 때문에 알고 있었다. “도법”을 전수한다는 것이 뭔지도 안다. 그 내용은 대략 조상님들에게 거하게 제사 한번 올린다는 건데, 이미 우리 집안은 집안 내력 자체가 제사가 조상님을 기리는 의미보다 살아있는 친척들이 얼굴한번 보러 오는 것이다. 가풍이 이런 상황이면 조상님도 저승에서 그다지 제삿상을 기대하고 계시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집안을 돌봐주는 여러 신들에게도 제사를 올린다는데, 제사를 올리지 않더라도 그 신들은 우리 집안을 폭삭 망하게 할 수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자연에 이치에 따르면, 자연이 하는 일은 순리에 바른 일만 행하고 맞지 않는 일은 오래 행하지 못한다. 폭풍우가 거세게 몰아쳐도 하루 종일 몰아칠 수는 없고, 날이 가물어도 1년 내내 가물 수는 없는 일이다. 신들이 집안을 아무 이유 없이 망하게 하는 것은 순리에 맞지 않다. 제사를 올리지 않았다고 하여 그 죄를 물어 망하게 한다면, 자릿세나 보호세를 상납하지 않았다고 거리의 노점상을 부수는 조직폭력배와 다를 것이 무엇인가? 조상신들이나 집안의 신들이 조직폭력배인가? 그건 아니잖은가. 만약 내가, 또는 가족의 어떤 사람이 순리에 어긋나는 일을 했기에 집안이 망한다면 이것은 신에게 제사를 올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자신의 잘못 때문이다. 할말 없다.

    나 역시 깨달음을 얻은 것은 아니지만, 그렇게 남에게 가르칠 정도의 깨달음을 얻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 강요하는 증명법

    이재율씨의 논리는 자명한 것을 자명하다고 주장하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어, 정말 그런가?” 생각하게 만든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연하잖아, 그거 당연해. 모르는 니가 바보야”라고 주장한다.

    “어, 정말 그런가?”라고 생각하는건 맞는데, 이재율씨의 논리를 쭉 읽다보면 자명하다고 건너뛴 부분이 너무 많다.

    대한수학회는 그 부분을 입증할 것을 요구했고, 이재율씨는 더 자세한 설명 없이 자명하다고만 한다. 근데 사실 수식이 조금만 복잡해져도 이해하기 힘든 것은 사실이고, 이 부분을 입증할 책임은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지 그것을 심사하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거든. 설령, 백만명이든 천만명이든 그 부분을 자명하다고 넘어갔다 해도 단 한명이 이해 못하겠다고 하면 더 자세하고 더 상세하고 더 명확하게 설명하는 것이 그야말로 자명한 이치인데 그걸 하지 못하겠다고 한다.

    이재율씨는 지금 나에게 자신의 주장을 “증명”할 것을 강요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을 거라면 조용히 자신의 논리를 인정하라고 한다. 물론 당연히 되겠지. 아마 맞겠지. 근데 난 그걸 내가 직접 “증명”할 생각은 없고, 따라서 그걸 받아들일 생각도 없거든. 시간도 없다.

    끝까지 해보자고? 그럼 20년만 기다려 주세요. 20년쯤 후에 시간이 좀 되면 그때 천천히 생각해 보려구요. 이재율씨가 160억원의 경제적 빛을 진 건 불쌍해 보이긴 하는데, 이렇게 제 여가활동을 방해하면 제 생활에서의 생산성이 저하되어 제 미래와 생계에 악영향을 미칠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