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자:] snowall

  • 대입

    공부가 안되니 잡념만 떠오른다.

    요새 대학 입시 제도에 대해서 논란이 많다. 내신 죽이기, 수능 무시하기, 뭐 이런건가. 내신 1등급이 수능 7등급이면 이상하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래서 생각해봤다.

    대학에 가는데, 대학은 우수한 학생을 뽑기를 원한다. 평가 기준은 세가지 정도가 있다. 고등학교에서 올라온 것, 국가에서 보증한 것, 대학 자체에서 평가한 것. 이른바, 내신, 수능, 본고사(및 면접, 논술 등등 포함)를 말한다. 그럼 어떤게 가장 믿을만할까? 당연히 대학 자체에서 평가한 것이다. 왜냐하면 대학마다 갖고 있는 인재상이 있고, 그 인재상에 맞게 평가했을 테니까 당연히 대학 자체에서 평가한 것이 대학이 원하는 우수한 학생을 선발하는데에는 가장 정확할 것이다.



    [각주:

    1

    ]


    그러나 본고사 금지. 대학 좌절.

    내신과 수능, 두가지 기준을 두고서 뭐가 더 정확하냐, 이걸 봐야 하는데. 수능은 전국구 줄세우기고 내신은 동네 줄세우기다. 당연히 수능이 더 정확하다.

    해서 수능을 보려고 했는데 등급제 전환. 대학 또 좌절.

    볼건 내신뿐이다. 교육부는 내신을 50%이상 반영하라고 친절하게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허나 내신은 대학에서 별로 보고싶어하지 않는다. 따라서 대학에서는 뽑을 수 있는 기준이 사라졌다.

    결론은 수험생 좌절.

    자, 누가 우수한 학생일까? 아니, 그보다, 더 중요한 질문. 누가 대학에 가야 할까?

    생각해 보자. 학부모들은 자식이 좋은 대학에 가길 원한다. 자신이 키워낸 자식이기에, 자신이 얼마나 잘 키웠는지를 평가받고 싶은 것이다.



    [각주:

    2

    ]



    서울대에서 기준을 엄격하게 올려서 진짜 천재들만 진학하게 되면 서울대 수준은 확실하게 올라간다. 하지만 학부모들이 애들을 서울대에 보내기 위해 노력하는 만큼 애들의 고통은 올라간다. 애초에 서울대에 갈 생각도 없고, 서울대에 갈 능력도 없고, 또는 그 시간에 다른 일을 하는 것이 더 나은, 그런 아이들까지 모두 서울대에 갈 것을 요구받으며 고통속에서 살아간다. 운이 좋아서 합격하면 다행이지만, 그게 안되면 그동안의 노력은 누구한테 보상받나? 고등학교 3년간 수많은 경험을 할 수 있을텐데, 그걸 오직 대학교 합격이라는 엽기적인 목표 하나만 두고서 다른 경험을 하지 않는다면 그 학생의 잃어버린 3년은 누가 보상해줄 것인가. 스스로가 원해서 그렇게 했다면 모를까, 유언 무언의 강요를 받아서 공부한 학생은 참 힘들지 않을까. 시간 낭비고. 반대로, 서울대가 시험 기준을 느슨하게 해서 많은 학생들이 진학하게 되면, 어쩌다가 진짜 천재들이 못 가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이건 국가적 손실이다. 그리고 평가가 공정하지 않다고 수많은 사람들이 성토할 것이다.

    애초에, 서울대에 가야 한다는 것, 명문대에 가야 하는 것이 공부의 목적이 아니고 인생의 목적이 아니다. 심지어 성공적인 삶을 사는 것 조차 인생의 목적이 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만의 생각과 철학을 갖고 개개인으로서 살아가는 것이 그 자체로 인생의 목적이다.



    [각주:

    3

    ]


    진짜로 세계 100대 대학이 나오려면, 대학은 진짜 천재들이나, 진짜 노력하는 사람들이나, 아무튼 될성 싶은 학생들만 입학하고, 들어와서도 베낀 레포트나 부정 시험같은 대충대충 넘어가는 공부가 아니라 제대로 된 공부를 시켜야 한다. 그리고 대학에 가는 것만이 지상 목표가 아니라, 대학에 가지 않아도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키워줘야 한다. 이미 “대입”이라는 것으로 목표를 한정하는 순간, 다른 꿈은 모두 죽어버린다. 다른 나라에서는 대학을 졸업하지 않고도 성공한 사람들이 많은데 왜 우리나라는 멀쩡한 대학 졸업하고서도 취직에 목을 매다가 자살하나?

    그리고 공교육. 고등학교 교육. 여기도 문제가 많다. 고등학교의 이름이 대학교 진학률 하나만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내신 부풀리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건 알고 있다. 어느 한 고등학교가 시작하면 다른 모든 고등학교가 따라하게 마련이다. 여기에 가장 좋은 해법은 제대로 된 평가 문제를 내는 것이다. 학생들이 빵점을 맞건 5점을 맞건, 100점짜리 시험에 평균이 10점이 되든 말든, 학부모들이 욕하건 말건, 배워야 하고 공부해야 하는 내용을 시험에 내라. 가혹하다고? 학생들은 따라오게 마련이다. 그럼 진짜 쉬운 수능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서 10년정도 지나면 진짜 명문 고등학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당장 피해보는 학생들은 어쩔 거냐고? 내년에 입학하는 신입생부터 시작하면 되지 않겠는가. 현 재학생들은 그냥 하던대로 하고.

    대학도 취업률 하나만으로 평가받는 세상에서 학점 부풀리기의 유혹을 뿌리치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 마찬가지다. 제대로 가라.

    어중이 떠중이 대졸자를 생산하느니, 애초에 안될 사람들을 일찍 포기시키고 다른 길 찾게 하고, 그 고난을 이겨낸 악착같은 사람들만 성공하는 것이 더 낫다.

    1. 이 부분이 본고사를 부활시키자거나 옹호하는 것은 아니다. 대학이 원하는 학생 선발은 대학이 원하는대로 뽑는 것이 가장 정확할 것이라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본문으로]
    2. 원래 그게 평가기준이 될 리가 없지만.

      [본문으로]
    3. …라고 나는 생각한다.

      [본문으로]

  • 한반도 운하. 만드는 건 좋은데…

    간만에 적는 정치 글이다.

    한반도 운하에 대해서 관심이 뜨거워지고 있다. 되든 안되든 이씨 아저씨가 떡밥 하나는 제대로 던진 셈이다. 원래 정치얘기 안하려고 했지만, 워낙 말이 많아서…-_-;

    대체적으로, 난 운하의 효용성에 대해서 부정적이다. (대단히 부정적이다)

    산줄기 달리는데 이미 기차와 자동차가 있다. 여기에 기차나 자동차보다 느린 배까지 다녀야 하는건가? 게다가 배의 크기가 제한되기 때문에 대용량 수송도 불가능하여 규모의 경제도 실현이 안된다.

    그러나, 이걸 굳이 해보겠다는 건 뭔가 믿는 구석이 있어서겠지?

    자, 만약에 이씨 아저씨가 대통령이 되었다고 하면, 부탁이 있다. 추진 하세요. 꼭.

    대신, 일단 다 짓고나서 빼기 없기예요. 잘되든 쪽박나든 책임지라는 겁니다.

    뭐, 한 10년쯤 후에 경부운하의 수익률이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하군요. 흥미롭게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아, 그 전에 저는 남자후보는 찍지 않기로 했기 때문에 이씨 아저씨를 찍어드리지는 않겠지만, 일단 당선되시고요, 꼭 만드세요. 꼭이요.

  • 종교의 자유

    헌법에도 보장되어 있다는 종교의 자유. 그건 뭘까.

    종교도 자유도 어느 하나 가볍게 다룰만한 주제는 아니지만, 그냥 가볍게 생각해 보자. 종교를 가진 사람들에게 종교의 자유가 있을까?

    이 질문은, 오늘 또 만난, 예전부터 알고 지내던, 내게 계속 교회 다닐 것을 얘기하는 아저씨를 만났기 때문에 떠올랐다. 교회 나오면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이 있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며,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을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물리학에도 똑같은 것이 있다는 점. 물리학에는 내가 모르는 많은 것이 있고, 새로운 세상이 펼쳐지며, 참된 평화와 안식을 얻는다.

    근데, 종교는 그 종교 자체로부터 자유로운가? 즉, 어느날 갑자기 신앙이 사라져서 그 종교의 교의를 따르지 않게 되는 경우, 그 종교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가? 내가 한때 몇번 낚여서 교회에 나갔던 경우, 일요일날 한번 갔다가 그 다음주에 안나가니 전화가 온다. 교회 오라고. 그럼 나가야 하나? 왜?

    난 내가 교회를 다니게 된다면 순수한 자유 의지로서 가기를 원한다. 그런데, 내게 전도하는 사람들은 나의 의지를 왜곡한다. 내가 가고 싶어서 가는 건지 누가 얘기했기 때문에 가고싶어진ㄷ건지 구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내가 권유를 받는 한 교회에 나가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다. 물론 권유하지 않는데 나갈 이유도 없겠지만.

    이상하다.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은 참 행복한 것 같다. 그런데, 그들은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나도 행복해지게 만들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한다. 내가 지금 행복하다고 하면, 그건 착각이며 참행복은 교회에 있다고 한다. 아니, 뭐, 그렇겠지. 근데 그렇다고 날 억지로 끌고 가려 하시면 곤란하지요. 할머니들의 이야기는 맨날 같은 레퍼토리다. “교회다니고 복받으세요”

    내가 괴로운 이유는, 자꾸만 나를 귀찮게 하기 때문이다. 가장 강력한 적이다.

    내가 신에게 원하는 단 한가지는, 신이 없는 세상에서 사는 것이다. 없는척이라도 좀 해주던가.

    여전히 교회에 다닐 것을 권유받는 나에게, 종교의 자유는 없다. 전 세계인을 교회에 다니게 만들라는 교리가 이상한 거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하는 내가 이상한 건가?

    한국 교회인들이여, 나에게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라. 자꾸 얘기해서 세뇌시키는 건 통하지 않으리라.

  • 초대칭성(Supersymmetry)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입자로 표현된다. 이 말은 입자물리학의 표준 모형의 기본 가설이다.


    http://snowall.tistory.com/8

    우리 우주에 어떤 입자들이 있는지는 위의 글을 참고해 주기 바란다.

    간략히 보자면, 페르미온과 보존으로 나눠지고, 페르미온들은 쿼크와 렙톤으로 나눠진다. 보존은 빛, W, Z 보존, 글루온, 중력자가 있다. 그리고 각각의 입자들은 모두 각각의 반입자를 갖고 있어서 그 종류가 두배로 뻥튀기 된다.

    초대칭성은, 이 모든 입자에 초대칭 짝(Super Partner)이 있다고 하는 가정이다. 즉, 페르미온은 보존 짝들이 있고, 보존은 페르미온 짝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힘을 전달하는 게이지 보존들의 초대칭 짝들은 뒤에 ino를 붙인다. 즉, Photino, Wino, Zino, Bino, Gluino, Gravitino라고 한다. 반대로, 우리가 아는 입자들의 초대칭 짝들은 앞에 s를 붙인다. 즉, squark, sup, sdown, scharm, sstrange(?), stop, sbottom, slepton, selectron, smuon, stau, sneutrino등등.

    아무튼, 이걸 보고서 느껴지는 것.

    사실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페르미온으로 되어 있고, 우리가 “힘”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보존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모든 페르미온에 보존 짝이 있고, 모든 보존에 페르미온 짝이 있다면, 물질은 힘이고 힘은 물질이라는 얘기가 된다.

    여기까지 얘기했을 때 딱 떠오르는 말이 있는데, 일부 영화 제목으로도 쓰인 바로 그 유명한 글귀이다.



    色不異空 (색불이공)

    空不異色 (공불이색)

    色卽是空 (색즉시공)

    空卽是色 (공즉시색)

    색은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은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은 공이며 공은 곧 색이다.

    이때, “색”은 물질적 실체이고 “공”은 마음이다. 이 말을 한 사람이 양자역학이나 초대칭성 이론을 알았을리는 전혀 없지만, 어딘가 통하는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은 순수하게 과학적인 사고방식으로만 접근해야 하고, 철학이나 다른 감성적인 비유들이 끼게 되면 오해의 여지가 생기기 때문에 주의해야 한다. 하지만 가끔은 이렇게 인간세상의 일들과 연관시켜서 생각해 보면 흥미로운 생각들을 할 수 있게 된다.

  • 양자, 파동, 입자

    양자역학을 배우다보면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은 개콘의 “같기도”를 수행하는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양자역학은 모든 입자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했다. 이건 정말 본질적인 “같기도” 스타일의 과학이다. 개그 코너가 웬 과학을 의미하냐고? 글쎄. 내 생각엔, 우주 만물은 입자도 아니고 파동도 아니다. 아니, 입자인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것 같기도 하다. 사실 이게 둘 다 성립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 과학을 잘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 설명을 해 주겠다.

    파동은 소리이고, 입자는 덩어리이다. 소리, 하면 생각나는게 “노래”다. 내가 만약 노래를 부른다면 내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 노래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이것은 파동의 특성이다. 내가 부른 노래를 듣고 감동해서 사람들이 동전을 던져준다면, 그 동전은 반드시 내 주머니 속으로 들어와야 하며 다른 곳에 있을 수 없다. 이것은 입자의 특성이다. 입자인 것 같기도 하고 파동인 것 같기도 하다는 뜻은 이제 이렇게 이해할 수 있다. 내가 노래를 했는데, 내 주변을 지나가는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딱 한명만 들은 것이다. 그 사람이 내 노래를 들었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나의 노래를 들었으며 반대로 다른 사람은 그 어떤 누구도 내 노래를 들은적이 없다. 노래가 파동인 것은 맞긴 한데, 다른 사람은 내 노래를 들은 사람이 없고, 적어도 한명은 내 노래를 들었으며, 더군다나 정확히 한명만 내 노래를 들었다면, 내 노래는 입자의 특성을 갖게 되어버린 것이다.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건 잘 모르겠다. 자연의 본질이 그렇다는 말 밖에는 모르겠다. 최근에 MS인가 하는 회사에서는 개방형 스피커에서 나온 소리를 단 한사람에게만 들리도록 하고 그 주변에서는 들리지 않도록 하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는데, 이것이 바로 내가 얘기한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지는 것이다.

    입자는 발견되는 경우 단 한곳에서만 발견된다. 파동은 모든곳에서 발견될 수 있다.

    입자-파동 이중성을 가졌다는 뜻은, 발견되기 전에는 어디서든지 발견될 가능성이 있지만 만약 발견된다면 다른 곳에서는 절대로 발견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플랑크 상수가 조금 컸다면, MS가 지향성 스피커를 개발하는데 도움이 되었을까?

  • 말하기와 글쓰기

    누가 그랬더라, 사람이 귀가 두개고 입이 하나인건 말하기보다 두배 더 많이 들으라는 뜻이라고.

    오늘은 교수님한테 미친듯이 혼났다.

    내가 내뱉는 말은 하나하나가 독설이라는 건 알고 있다. 그점에 대해서 한소리 들은 거니까 딱히 변명할 건 없다.

    고치는 방법을 알고 싶다.

    내가 블로그에 쓴 글들과, 그 글에 많은 분들이 달아주신 댓글을 보면, 나는 글은 잘 쓰는 편인 것 같다. 하지만 오늘 교수님이 말씀하신 것을 비롯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내게 화내는 걸 보면, 나는 말하는 것은 최악인 것 같다. 다른건 모르겠고, 전부터 교수님이 계속 얘기해 왔던 점이 나랑 있다보면 화가 난다고 하시는 것이다.

    온라인에서 나를 보는 사람들은 오프라인의 나를 모를 것이고, 오프라인의 내 친구들은 온라인의 나를 잘 모를 것이다. 두 모습의 나를 모두 아는 사람은 둘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믿기 힘들어 하기도 한다. 그러나 내가 딱히 이중인격인 것 같지는 않다. 그냥 나는 하고 싶은 얘기를 할 뿐이고, 말은 순간이고 글은 남기 때문이다. 아예 말을 말자.

    그러나 내가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고치긴 고쳐야겠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내가 말하는 습관이 바로잡힐지, 적어도 남들이 화를 내는 말투는 고쳐보고 싶은데, 이거 참 문제다. 솔직한 성격부터 바꿔야 하나. 꾸미고 입에 발린 말을 해야하나. 아, 이런식으로 블로그에 글로 남기면 내가 진솔한데 다른 사람들이 위선자인 것처럼 오해하겠다. 그런건 아니다. 나의 독설에서 독을 빼야 한다. 근데 단어 하나하나가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다른 단어가 튀어나오니, 난감할 따름이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 자연스럽게 그것이 가능할까. 남을 배려하는 말투는 어떻게 가능한 걸까.

    오늘 점심 먹으면서 잠깐 생각해봤던 건데, 나는 내 마음을 내놓고 다니는 것 같다. 마음을 감추는 법을 배워야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이 힘들기 때문에 내뱉는 푸념일 수도 있다. 나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하는 헛소리일지도 모른다. 아니, 그냥 그렇겠지. 위험한걸까.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화가 나는 건가? 교수님한테 아주 많이 혼나고 나면, 일단은 반성하는게 아니라 화를 내나? 그렇다고 내가 진심으로 반성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약간의 감정적 동요를 느끼면서, 고치긴 고쳐야 겠다고 진심으로 느끼고는 있지만, 진심으로 내가 큰 잘못을 했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는다. 그런데 답답하긴 하다. 내 머릿속에 있는 모든 생각을 그냥 교수님께 전해드리고 싶다. 그런데 그걸 말로 전할 수는 없다. 말로 전하면 또 기분이 나빠지실 테니까. 뭔가를 바꾸긴 해야 한다.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불가능하다지만, 난 지금 당장 내일 아침부터 나 자신의 바뀐 모습을 만들어 놔야 하는 강한 정신적 압박을 받고 있다.

    알고 있다. 난 “관습”이나 “예절” 같은걸 배운적이 없다. 나 스스로가 그것을 거부했다. 내가 잘난놈이어서 그런것도 아니다. 그냥 남들이랑 똑같은건 다 싫었고, 남들이 하는걸 싫어했다. 그 결과, 사회에 익숙해지지 않는다. 24년간 살았는데 난 아직도 사회가 어색하다. 내 관점에서 보면 참 세상은 이상하다. 나를 바꾸기도 힘든 일이고, 세상을 바꾸기도 힘든 일이다.

    보통은 이런 상황에서 사람들은 극단적인 생각을 하나? 자살? 자퇴? 근데 난 왜 극단적인 낙관을 하고 있을까. 놀랍게도, 난 이 헛소리를 쓰면서도 미래를 낙관한다. 그것이 내가 나 자신을 고치지 못하는 이유인 것 같다.

    오늘 교수님은 내 마음 속에 있는 상처를 후벼 팠고. 아무튼 교수님께서도 화나시고 답답하시니까 말씀하셨겠지만, 나 역시 힘들다.

    내가 소심하긴 한가보다. A형이라 그런가.

  • 모르는 것은 보약이다

    아이들이 창의력 문제의 답안이라고 쓴 글들을 쭉 읽다보면 흥미로운 점을 알아차릴 수 있다. 그 아이디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더 흥미로운 점은 그 수많은 아이들이 미처 내가 생각하지 못한 기발한 부분이랍시고 생각해낸 생각이 다 똑같다는 점이다. 어찌 그리 비슷할 수 있을까.

    문제 유형이, 가령 “이것을 실현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찾아보세요”라고 했으면, 최소한 문제에 제시된 예제는 쓰지 말아야 하지 않은가. 아니면 예제를 아주 확실하게 발전시키든가. 인터넷 검색이 아주 좋아진 것도 좋고, 지식인 사이트가 있어서 문제의 답을 물어볼 곳이 있는 것도 좋은데, 이건 문제를 우수답안을 선정되는 게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것 자체를 즐기는 방법을 배워야 옳은 것이다. 그게 없으니 창의력이 죽지. 몰개성화 된 답안만 나올 수밖에 없다.

    문제 푸는게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야 배울 수 있을까. 그것도, 답안을 남들과 다르게 내는 것이 더 재미있다는 건 어디가서 배우려나. 나만 해도 당장 너무 아는게 많아서 되는 것과 되지 않는 것을 구별한다. 새로운 것을 생각해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잘해봐야 남들이 생각했던 아이디어를 어디서 주워들어서 그에 대한 조금 발전된 답을 내놓는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잘 모르는 초보들이다. 이런 때 아니면 창의력을 발전시킬 시기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다들 똑같은 생각만 하는 걸까.

    선행학습은 중요하지 않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다. 몇년 이후에나 배울 내용을 미리 알아봐야 쓸데가 없다. 쓸 수도 없다. 어차피 몇년 후에 다시 배울 텐데. 의미도 없다.



    [각주:

    1

    ]



    모르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도 많다. 하룻강아지는 범 무서운줄 모르기 때문에 덤비는 것 아니던가. 젊을 때는 세상이 무서운 걸 모르기 때문에 도전하는 것 아니던가. 창의력은 아직 되는지 안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더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것 아닌가. 사람의 뇌는 한번 알게 된 것을 모르게 되기는 힘들다. 이것은 기억과는 다른 얘기다. 기억은 잊혀질 수 있지만, 지식으로서 알게 된 것들은 모르는 상태로 되돌아갈 수가 없다. 아직 아무것도 모를 때, 그때야말로 가장 많은 것을 상상할 수 있는 시기이다. 대부분 이 시기에 상상했던 것들이 평생 써먹는 상상력의 밑천이 될 텐데. 그것은 많은 것을 알게 되면 불가능한 것이다. 피터팬을 보자. 그는 모르기 때문에 날아다니는 것이다. 만일 그가, 사람은 하늘을 날아다닐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 이후로는 날아다닐 수 없게 된다. 누가 그에게 하늘을 날 수 없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면 여전히 날아다닐수 있을까?



    [각주:

    2

    ]


    더이상 남들과 같은 생각으로는 남들보다 앞서갈 수 없다. 남들과 같은 수준조차 되지 않는다. 뒤처질 따름이다. 무식한 건 죄가 될 수도 있지만, 모르는 것 자체도 자신의 잇점으로 활용해야 진정 성공할 수 있지 않을까.

    1. 야오이인가.

      [본문으로]
    2. 이런점에서 후크는 바보다.

      [본문으로]

  • 믿음

    요새 이슈들을 보자.

    1. 황우석 아저씨 지지자들

    2. 이명박 아저씨 사인 위조

    3. 창조론의 창궐

    선정 순서나 방법은 없다. 그냥 생각나는대로 보이는대로 적어 본 것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멀더와 스컬리의 주장과는 다르게, 진실은 저기에 없다는 것이다. 아니, 적어도 진실은 결코 밝혀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진실이 밝혀지길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몇몇 사람들은 진실은 반드시 승리하고, 언젠가 반드시 밝혀질 것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지만 내가 볼 때, 저런 류의 거짓말들은 정답을 아는 사람은 딱 한 사람 뿐이고, 과연 그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싶어 할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더군다나 창조론 얘기 같은 경우, 진실을 아는 것이 신밖에 없는데 과연 그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싶어할지 모르겠다. 신이 직접 계시를 내려서 진화론이 맞다고 하면 창조론자들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럴리 없다고? 글쎄. 신이 모든 생명체를 창조했다는 건 누구 말마따나 진화론이랑 똑같은 수준으로 다뤄져야 한다. 여기다가 신이 쐐기를 딱 박아서 “내가 창조 안했다”고 얘기하는데 여기다가 대고 토를 다는 사람은 지옥에나 떨어지겠지.

    나 역시 무언가를 믿고 있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나로서는 구별할 방법이 없다. 더군다나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구별해줄 사람도 없다. 누군가 “그거 구라야, 넌 이미 낚였어”라고 확인해 준다고 해도, 그 사람이 거짓말을 하는지 알게 뭔가. 단지 여기저기서 주워 들은 얘기와, 어딘가에서 읽어본 얘기와, 내 머릿속에서 적당히 꾸며 본 가설과 이유를 근거로 하여 논리로 포장하여 맞다고 믿고 있을 뿐이다. 난 창조론은 틀렸고 진화론이 맞다고 믿는다. 난 황우석 아저씨는 아무튼 구라를 쳤다고 믿는다. 이명박 아저씨는 사인을 위조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믿는다. 전부 믿음이다. 이 믿음에 무언가 근거가 있긴 하지만, 그걸 다른 사람한테 믿으라고 얘기하려면 뭔가 부족하다. 내가 믿는 것을 남들도 믿으라고, 내가 아는 것을 남들도 알아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당장, 위태위태한 신의 존재만 해도 그렇다. 요즘같은 세상, 신이 있었다면 이딴 세상을 이대로놔두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도 들고, 신이 있어서 부도덕한 우리에게 형벌을 내리는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근데 그건 일단 신이 있다고 믿으니까 그런 거고, 신이 없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세상의 혼란은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된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아무 이유 없다. 차라리 그게 더 낫지 않을까. 이 세상이 혼란스러워진 이유를 굳이 신의 권능이라든가 누군가의 음모로 얘기하기보다는 그냥 저절로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는 쪽이 더 간편하다. 딱히 근거도 없지 않은가. 신의 이야기를 하는 쪽이 내세우는 근거라고 해 봐야 성경의 어떤 구절들인데, 그건 이미 예전에 일어났던 일들이고 벌써 수천년이 지난 얘기다. 그걸 믿는거나 단군 신화를 믿는 거나 거기서 거기다.

    미국 속담인가? 보는 것이 믿는 것이라고



    [각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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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반대 얘기도 있던데. 믿는 것만 본다고. 무엇이 진리인가, 무엇이 진실인가는 이미 결정된 일이다. 진리든 진실이든 바꿀 수는 없으며 변할 수 있다면 그건 이미 진리와 진실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을 믿는 것은 사람의 결정이다. 진실만 보는 것도 아니고 진리만 믿는 것도 아니다. 자신이 믿는 것을 진리라고 생각하고 자신이 본 것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게, 그럴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세상에는 믿을 놈 하나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그 속에서 아집과 독선에 빠질 수밖에 없고, 그런 사람들 중에 열린 마음을 갖고 남들의 믿음과 생각을 인정하고 적절한 선에서 타협하고 넘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있다고 해도 줏대 없다고 욕을 먹는다. 자신이 믿고 있는 것이 대다수의 의견과 다르다면, 일단 자신이 믿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닌지 의심해야 할 것이고, 틀린 것 같다면 자신의 믿음을 고쳐야 할 것이고, 맞는 것 같다면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켜서 다른 사람의 믿음을 바꿔야 할 것이다. 문제는 둘 다 힘들다는 것.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 방법으로 큰소리 치는 것 보다 효과적인 방법을 아직 보지 못했다. 진짜 순수한 논리만으로 사람을 설득하려면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상당히 논리적이어야 하는데 그런 사람이 어디 많은가. 다 자기 고집에 빠져 사는데, 논리가 부족한 것을 믿음으로 메꿀 따름일 뿐이다.

    인터넷 돌아다니면서 수많은 정보를 접하고, 수많은 소식을 접하고, 아주 많은 낚시글들을 보고 있다보면 내가 보는 것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혼동된다. 이에 대해서, 나는 그것이 진실인지 여부를 따지지 않기로 했다. 그 정보는 누군가에게는 진실이라고 믿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정보가 내게 흘러들어왔겠지. 그걸 전부 진위를 따지는 것은 무의미하다. 진짜로 의미있는 것은 그 속에서 진실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진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항상 의심하는 것이다. 세상에는 절대 밝혀지지 않을 진실이 있다는 점에서, 그리고 내가 진실이라고 생각한 것이 언젠가 진짜 진실이 밝혀져서 틀릴 수도 있다는 점에서, 이러한 점에서 진실은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플라톤의 “이데아” 얘기를 다시 했다는 생각이 든다. 진실은 이데아의 세상에 살고 있고 나는 그 밑에서 진실의 그림자만 보면서 진실이 어떻게 생겼는지 추측할 따름이다. 다 틀렸다. 이건 이미 장님 코끼리 만지기 수준을 뛰어 넘은 엽기적인 추측에 다름아니다.

    데카르트가 이 방법론을 처음으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그 아저씨는 맨날 의심했다. 자신이 존재하는지 조차도 의심했고. 그치만 자기 존재에 대한 의심은 답이 없거나 자기가 답이라고 생각하는게 답이니까 별로 의심한 의미가 없다. 진짜 의심은, 자신이 믿는 모든 진실을 의심하고, 그것이 정답이 아닐 수 있음을 의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불신하라는 뜻은 아니다. 의심만 하라는 뜻이다.

    뭐, 이게 사람들 사이에서 상대방의 우정이나 애정을 의심하는 쪽으로 가 버리게 되면 의처증이 나오고 친구랑 절교하고 그러는 거지만. 그건 그 사람이 진실을 의심했기 때문이 아니라 사람의 진짜 마음을 알 수 없기에, 자신이 믿는 것이 전부고 진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배우자가 바람 피운게 의심을 넘어서 진실이라고 믿는다면, 깨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의심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면 사람이 불안하게 마련이지만, 한번쯤은, 자신이 당연하다고 생각해 온 모든것을 싸그리 의심해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

    세상에 진실 중에서는 결코 알 수 없는 것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예를 들어, 내가 어제 화장실을 몇번 갔다 왔는지는 내가 까먹어 버리면 절대로 밝혀지지 않을 단 하나의 진실이 있지 않겠는가. 위대한 진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1. Seeing is believing

      [본문으로]

  • 행복론 : 행복은 여기에 멈추는 것이다. 그리고 나는 멈추지 않는다.

    행복이란. 사람들이 항상 원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서 이 세상의 모든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이다. 행복은 그 속성이 악에 가까울 수도 있다. 이것은 노자의 도와 통해 있는 얘기인데, 만약 행복이라는 것을 애초에 원하지 않았다면, 현재의 불행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모든 슬픈 이야기들은 실현되지 않는다.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에 관해서 이야기하고, 행복해지는 법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해 준다. 당장 인터넷을 보면서 행복이라는 단어를 검색해보면 엄청나게 많은 웹 페이지가 검색되어 나온다. 구글에서는 현재


    36,500,000개

    의 웹 페이지가 행복이라는 단어를 포함하고 있다고 자랑한다. 이걸 보면 행복한가?

    행복해지는 방법의 아주 많은 이야기는 대부분 “만족”을 포함한다. 즉, 현재에 만족하지 못하고 욕심을 부리면 그것이 바로 행복에서 벗어나는 지름길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현재의 자신의 상황에 만족하고, 적응하면 그것이 곧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물론 옳은 말이다. 현재에 만족한다면 행복할 것이다. 하지만, 그래서 좋은가? 물론 욕심부리지 않고 현재에 만족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못할만한 어려운 일도 아니다. 어쩌면 쉽고 어쩌면 어려운 일일 것이다. 하지만 현재에 만족했다고 해 보자. 그것은 진정한 행복일까?

    예를 들어보자. 나는 입자 물리학자가 되고 싶은데, 입자물리학자가 되면 참으로 배고프게 살 것 같다. 이래저래 힘들고, 돈도 많이 못 벌 것 같고, 미래는 암담하다. 하지만 지금의 내 능력을 갖고 회사에 들어가거나 사업을 하거나 한다면 어쩌면 좀 더 많은 돈을 모을 수 있을 거고, 그 돈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하게 살 수 있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느쪽이 진짜 행복일까? 사람에 따라서 기준은 다르겠지만, 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행복을 찾아서 헤메는 것 자체가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여기에 머무는 것은 당장 몸이 편하고 마음이 편할 수는 있다. 그걸 행복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그것이 행복이 아니라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다음에,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상태에서 자신의 살아온 길을 돌아본다면 그 과거는 행복할 수 있을까? 사람은 과거의 추억을 뜯어먹고 사는 동물인데 말이다.

    사람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고, 경험을 쌓을 수 있기 때문에 생존율을 높이고 더 많은 개체가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와 더불어, 기억이라는 것은 사람의 마음을 불편하게 한다. 그냥 지금 편하면 좋을 것을, 과거를 회상해 보면 아쉬운 기억들이 한참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그때 그런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때 한번 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하지만 역사에는 만약이 없다. 당신의 과거에도 만약은 없다. 현재 당신이 이렇게 편안하게 앉아 있을 수 있는 이유는 과거에 여러가지 선택 가능성 중에서 당신이 했던 바로 그 선택을 했기 때문에 지금 이 순간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선택을 했을 경우 어떻게 될지는, 당신의 미래 만큼이나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냥 지금 행복하고 지금 괜찮으니까 나오는 배부른 소리라는 얘기다.

    따라서, 그런 후회를 하기 싫으면 애초에 선택을 잘 해야 한다. 현재에 만족하는 것을 선택하지 말고,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선택을 해야 한다. 당신이 원하는 행복은 결코 오지 않는다. 행복한 그 순간, 당신은 그곳에 멈추게 될 것이다. 그것은 당신의 발전을 저해할 것이고, 당신의 생각을 느리게 할 것이며, 당신을 중독시킬 수 있다.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 있는 순간, 그 순간만큼은 영원히 계속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바로 행복을 원하는 마음이다. 그 이상의 무언가를 원하지 않을 때, 거기에 멈추는 것이다.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어서, 분명 충분히 행복한 상황일 것 같은데도 불구하고 더 높은 행복을 찾아서 떠난다. 이것은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선지자들은 행복하기 위해서 현재에 만족하라고 얘기했나보다. 하지만 나는 그것이 무분별하게 적용되는 것에 반대한다. 지금 이 순간에 만족해 버리면, 나는 나의 꿈을 이룰 수 없게 된다.

    따라서, 나는 현재의 행복을 포기하고, 한순간 한순간을 나의 꿈을 향해서 나아간다. 이것을 자각하는 것 자체가 내가 바라보는 현재의 행복이다.

    나는 행복을 바라지 않는다. 그렇기에 행복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