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학술

  • 고생을 사서 해야 하나

    옛날 어른들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말씀. 젊었을 땐 사서 고생해야 한다.

    누구나 힘든거 싫어한다. 누구나 편하게 살고 싶어한다. 이건 애나 어른이나 마찬가지다. 나 역시 굉장히 게으르고 나태가 근본인 인간이다.

    온실속의 화초라는 말이 있다. 너무나 좋은 환경인 온실 안에서만 자란 식물은, 온실 밖으로 나왔을 때 적응하지 못하고 금방 시들어 버린다. 그렇기에 온실속의 화초란 말은 세상 물정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말이기도 하다.

    왜?

    고생을 뭐하러 하지? 가장 근본적인 질문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편한것을 추구하는 것인데, 어째서 일부러 고생해야 하는가? 나는 편하게 살고 싶고, 그래서 지금 편하게 살겠다는 것인데 왜 그걸 하지 말라고 하는 건가?

    스스로 고생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다. 어쩌면 그건 자만일 수 있다. 하지만 내가 남의 인생을 살 수 없는데 어떻게 나보다 힘들게 산 사람들을 생각할 수 있을까?

    온실에서 안나가면 되는 거잖아. 안나갈 수 없다고? 온실 문을 열어제끼고 가혹한 환경에 내놓은, 그런 타인들이 나쁜거 아닐까? 난 곱게 온실 속에서만 살고 싶었는데, 조용히 살고 싶은 나를 가만히 놔두지 않은 건 남들 잘못이잖아. 그럼 내가 지금 힘든게 내 잘못이 아니잖아? 내가 살고싶은 대로 살지 못하는게 왜 내 잘못이지?

    편하게 살고 싶고, 놀면서 먹고 싶다.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약한자는 도태되게 마련이지만 나는 강해지지 않고 나약하게 남아있고 싶다. 순진한 건가?

    겁주지 마. 당신도 그렇게 강하지는 않잖아. 남들보다 강한척 하고 있거나, 남들보다 조금 강하거나, 그정도 아닌가? 계획대로 되는 삶도, 계획대로 되지 않는 삶도 온전히 내 것이다. 때로는 누가 나를 도와줘서 편하게 성공할 수도 있고, 죽어라 고생했는데 그냥 고생만 하다 죽을수도 있다. 편차가 너무 커서, 잘못되는 경우가 너무 두려우니까 가장 안정적인 길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안정적이라는 거, 사실은 바닥이라는 거 아닌가? 더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바닥 상태가 가장 안정적인 상태인 법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옛말은 아마 잘못 전해졌던 것이다. 올라갔다가 내려올 자신이 없으면 쳐다보지도 말았어야 한다.

    고생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충분히 두려워 하고, 두려움에 덜덜 떨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다. 언젠가 빛이 비추리라는 희망도 무작정 가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길을 찾는 건 멈추지 말아야 한다. 언제까지 힘들게 살아야 하냐면, 음, 그건 내가 고요한 마음을 되찾을 때 까지.

  • 어려운 수학문제 : 임의의 n분 만들기


    수학자들은 습관적을 일반화시키기를 좋아한다. (거의 직업병임.)


    http://snowall.tistory.com/1852

    일단 이 글을 읽고나서, 다음과 같은 문제를 풀어보자.

    정확히 1시간동안 타는 도화선이 여러개 있다. (얼마든지 쓸 수 있다.)

    이 도화선을 이용해서 1분부터 59분까지, 각 1분 간격으로 모든 시간을 잴 수 있을까?

    잴 수 있다면 어떻게 가능한가?

    모든 경우에 대해서 불가능하다면, 가능한 경우가 있고 불가능한 경우가 있을 것인데,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것인가?

    일단, 앞에 이미 썼던 쉬운 경우의 문제에 대해서, 15분, 30분, 45분이 가능함은 쉽게 증명할 수 있다. 또한, 만약 n분을 잴 수 있다면 n+15분, n+30분, n+45분을 잴 수 있다. (이것은 쉽게 증명된다.) 따라서 1분부터 14분까지 잴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또한, 만약 n분을 잴 수 있다면 15-n분도 잴 수 있다. (이것 또한 쉽게 증명된다. 15분과 n분을 동시에 재기 시작한 후, n분이 다 끝난 시간부터 15분이 끝날 시간까지 재면 15-n분이 된다.) 따라서 1분부터 7분까지 잴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하면 된다.

    n분을 잴 수 있고 m분을 잴 수 있다고 하자. 여기서 m과 n은 둘 다 임의의 자연수이고 m>n이라고 하자. 그럼 m-n분도 잴 수 있다. (앞에서 15-n분을 잰 것과 같다.)

    만약 n분을 잴 수 있다면 임의의 자연수 m에 대해서 m*n분도 잴 수 있다.(n분을 재는 것을 m번 반복하면 됨.) 따라서 1분을 잴 수 있다면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7분을 잴 수 있다고 하자. 그럼 앞에서 말한 방법을 통해 15-7=8분을 잴 수 있다. 그럼, 따라서, 8-7=1분도 잴 수 있다.

    따라서 7분을 잴 수 있다는 것만 증명해도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만약 4분을 잴 수 있으면 8분을 잴 수 있다. 그럼 7분도 잴 수 있고, 따라서 이 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만약 2분을 잴 수 있으면 4분을 잴 수 있으므로 문제가 해결된다.

    즉, 1분, 2분, 4분, 7분 중의 하나만 잴 수 있어도 이 문제가 해결된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3과 5의 배수가 아닌 분 중의 하나라도 잴 수만 있으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이후로는…아직 생각이 안난다.

    그럼, 이제 좀 더 어려운 문제에 도전해 볼 수 있다.

    정확히 1시간동안 타는 도화선이 여러개 있다. 이 도화선을 이용해서 주어진 유리수 k에 대해서 k분의 시간을 잴 수 있을까?

    그리고 좀 더 자극적인 것을 원하는 사람을 위하여 다음과 같은 문제를 준비해볼 수 있다.

    정확히 1시간동안 타는 도화선이 여러개 있다. 이 도화선을 이용해서 주어진 실수 k에 대해서 k분의 시간을 잴 수 있을까?

    추가하자면, 이 문제는 대수학 문제다. 군의 정의와 확장이 필요하다.

  • 간단한 수학 문제 : 45분 만들기

    어느 회사의 면접 문제였다고 한다.

    도화선 두 가닥이 있습니다. 둘다 한 시간만에 완전히 타서 없어집니다.

    하지만, 도화선의 두께가 일정치 않아서, 타는 속도는 제멋대로입니다.

    10분동안 절반이 타버릴수도, 1/20만 타서 사라질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불을 붙이면 정확히 한 시간 후에는 모두 탑니다.

    이 두 가닥의 도화선을 이용해서, 45분을 측정해 보세요.


    http://kldp.org/node/113998

    KLDP의 회원들은 이것저것 따지고 있는데, 어쨌든 이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제시된 것 이외에는 그냥 이상적인 상황을 가정하는 것이 좋다. 문제에 제시된 것 이외의 내용을 임의로 가정할 필요는 없다.

    풀이는 나중에.

    풀이

    *이 풀이는 KLDP의 해당 글타래에 이미 제시된 풀이이다. 그닥 snowall만의 독창적인 풀이는 아님.




    도화선 1개를 양쪽에서 동시에 불을 붙인다. 그럼, 이 도화선이 다 타는데에는 정확히 30분이 걸린다. (고정점 정리)




    도화선 1개를 양쪽에서 동시에 불을 붙일 때, 동시에 남은 하나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다. 그럼 이 도화선은, 양쪽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다 탔던 순간, 남은 부분은 30동안 타게 된다. 이제, 양쪽에 불을 붙인 도화선이 다 타는 순간에 한쪽에서만 불을 붙인 도화선의 반대쪽 끝에 불을 붙인다.

    위 부분을 마우스로 긁어보면 풀이가 보임. 너무 쉬운 문제이기 때문에, 최소한 2시간 이상 고민 해보고 풀이를 볼 것을 권장함.




  • 중성미자 Ansatz 만들기

    Ansatz란, 그냥 그럴듯한 해답이랄까, 뭐 그런 것이다.

    PRD 63, 093002 (2003) A. Zee 의 논문을 참고했다.

    오랜만에 입자물리를 발표했더니 재밌다. 옛날에는 중성미자를 그렇게까지 좋아하진 않았는데 -_-;

    A. Zee의 2003년 논문을 발표하려고 요약한 자료이다. 내가 작성한 PDF 파일과 TeX 원본 파일을 올린다.

    원문을 읽고 싶으면


    http://arxiv.org/abs/hep-ph/0307323

    이 논문은 Physical Review D에 2003년에 실렸다. PRD가서 읽으려면 유료임. 위의 arXiv 링크로 보면 공짜이므로 관심있으면 가볼 것.

    내용은, “Ansatz”를 만들고 싶으면 1. Mixing matrix에서 숫자 3개를 실험값과 맞추고 2. Matrix를 Orthonomal matrix로 바꾸면 됨. 이때, 실험값과 맞출 때 중요한건 행렬의 성분이 되도록이면 정수와 정수의 제곱근만 포함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든 Ansatz은 Invariant Group Distance를 이용해서 다른 행렬과, 또는 실험값과, 거리를 비교할 수 있다.

    잘 읽어보면 느낄 수 있는건데, “헐, 이런게 PRD에 실려?!”라는 생각이 든다. 아이디어와 그 계산이 좀 심하게 쉽다. 물론 쉽다고 해서 중요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F=ma는 매우 쉽지만, 매우 중요하다. 마찬가지로.)

    그러니까 물리 공부도 쉽게쉽게 합시다~

  • LHC 실험 개시!


    http://webcast.cern.ch/lhcfirstphysics/

    오오…

    이제 유럽에서 일어나는 엄청난 실험을 라이브로, 생중계로, 집에서 볼 수 있다.


    물론 LHC는 고장나지 않았다.-_-; 왜냐하면 4월 1일 00시 01분에 고장나는 입자가속기는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 생각대로, 결론


    우선, 앞의 ”






    생각대로


    ” 글에 댓글 달아 주신 분들과 조언해준 친구들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댓글에 일일이 답을 하지 않는 것은 한번에 결론을 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

    많은 사람들이 나의 생각을 지지해 주었고, 의외(?)일지 모르겠지만 후배를 지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물론, 후배의 말을 그냥 무시할만한 것은 아니고 적절히 받아들여서 나의 발전에 사용해야 할 것도 있다.

    이런 경우, 가장 쉽게 빠지기 쉬운 함정은 “위선”의 함정이다. 즉, 다른 사람들이 나를 지지하는 것이 그들의 위선적인 모습은 아닐까? 생각해 볼 수 있다. 물론 그건 불가능하다. 친한 친구, 시니컬한 친구, 이 블로그에 거의 처음 온 손님, 블로거로만 알고 지낸 손님, 그럭저럭 친하게 지내는 친구 등등 (댓글 및 오프라인 상담 포함) 아무 연관성 없는 개개인이 모두 위선적으로 나를 지지할 수는 없다. 어쩌다 몇명은 모를까, 그들 모두가 위선은 아니라는 것이 분명하다. 더군다나, 난 누구에게도 아첨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난 아무런 권력을 갖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로 생각해 볼 점은, 내가 친구를 가려사귀었기 때문에 나를 지지하는 사람만이 내 주변에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것은 사실이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기 때문에 크게 문제는 없다. 친구라는 것은 어느 한쪽이 친한척 한다고 해서 만들어지는 관계가 아니다. 서로에게 어느정도의 충실함과 믿음을 제공하지 않으면 친구관계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내가 친구를 가리지 않았다 하더라도 내 주변에 있는 친구들은 나와 비슷한 사고방식과 사상을 가진 사람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세번째로, 나를 비롯해서 나를 지지하는 사람 모두가 틀릴 가능성이 있다. 즉, 나처럼 생각하는 그런 사고방식 자체가 오류에 빠져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가능성이 낮다. 그 이유는, 조언을 해준 사람들의 경험이 대단히 다양하기 때문이다. 친구를 가려사귈 수는 있지만, 내가 친구를 사귈 때 보는 것은 그 친구가 나와 잘 맞는 사람인지를 볼 뿐이다. 그 친구가 어떤 일을 하고 있고, 어떤 학교를 나왔고, 돈을 얼마나 벌고, 어떤 경험을 했는지는 신경쓰지 않는다. 따라서, 내 친구와 조언자들의 경험은 굉장히 다양하다. 그런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토론하여 합의한 것도 아닌 상황인데, 다양한 답이 가능한 문제에 대해서 동일한 결론을 내는 것도 역시 어려운 일이다.

    즉, 내가 “생각대로” 글에서 작성한 내용이 올바른 방향임을 충분히 믿을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완전한 결론은 아니다. 항상 끊임없이 무엇이 올바른지 고민하고, 적용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 나중에도 올바를 것이라고 생각하는 건 고정관념이다.

    그런식으로, 남들처럼 살지 않아도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고 싶다. 어차피, 지금은 이렇게 말해봐야 “넌 어려서 몰라”라는 말을 들을 뿐이니 말이다.

  • 생각대로

    어제 대학교 후배와 긴 대화를 나누었다. 쓸데없이 얘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결국 새벽에 자게 되었다. 그 대화의 요점은, “너 그렇게 살지 마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너”는 snowall이다. (후배 주제에 나한테 그런 얘기를 하는 후배가 누구인지는 내 동기와 선배님들은 알 것이다. 나도 개념은 국끓여먹은 인간이지만 말이다.)

    그 후배가 주장하는 것은, 내가 너무 저평가 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멍청하게 살고 있으며, 조금만 신경쓰면 더 편하게 살고 더 확실하게 미래를 보장받을 수 있는데 그런것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학원 다닐 때 지도교수님이랑 싸운 것도 그렇고, 교수님이 나 말고 다른 학생을 좀 더 밀어줬다는 것도 그렇다. (심지어 그 학생은 다른 유명 대학의 대학원으로 진학한 상태였는데도.)

    구구절절히 맞는 말이다. 근데 편하게 살거였으면 굳이 이러고 살 이유가 없다. 그 후배가 아마 고등학교때 나를 봤으면 미친놈이라고 했을 듯 싶다. 그건 내가 서울대나 연세대 또는 고려대 정도의 학교를 충분히 갈 수 있는 실력이었지만, 1학기 수시모집에 합격했다는 이유만으로 전혀 아쉬움 없이 중앙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1학기 수시모집에 합격했더라도 포기하고 2학기 수시모집 또는 정시에 지원할 수 있었다.) 그때 중앙대를 가기로 선택한 것은 지금도 전혀 후회가 되지 않는다. 내가 중앙대를 가기로 한 것은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해서 과학/수학 이외의 다른 과목을 공부해야 한다는 것이 짜증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미 대학에 합격했는데, 그걸 포기하고 공부를 더 한다고 하는 것도 싫었고, 그렇게 공부를 한다고 해서 합격이 보장되는 것도 아니다. 난 절대로 배수의 진을 치지 않는다.

    그 후배는 나에게 어떻게 그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드는지 매우 자세한 얘기를 해 주었다. 철저한 사람일수록 오히려 선물이 먹히는 것이고, 뒤가 켕기게 되는 법이라고 얘기를 했다. 나에게 윗사람들에게 양주 선물도 주고, 사모님한테 꽃다발도 보내고, 갖은 아첨을 떨면서, 그 사람을 자기 편으로 만들라고 충고했다. 자기는 그렇게 살고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지도교수라고 해서 그냥 추천서 써주고 마는게 아니라, 학회 가서 세미나 하나를 더 잡아주고, 학교에서 강연에 한번 더 초청해주고, 그런식으로 자기를 이끌어 줄 자기편 하나가 생긴다고 한다. 소위, 배째줄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내가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은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고, 자신의 삶을 사랑한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온갖 것을 다 해야 한다고 조언해 줬다.

    결국은 가치관의 차이인데, 난 전혀 그렇게 살 생각이 없다. 3시간동안 붙들고 날 설득한 그 후배한테는 미안하지만, 남들이 그렇게 사는 것에 대해서 좋다 나쁘다 평할 생각은 없지만, 난 그렇게 살고싶지 않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더라도 성공할 수 있는 길은 많다. 아니, 심지어 난 성공할 생각도 강하지 않다. 물리 생각하기에도 복잡한 머리에, 누구한테 어떻게 말하고 누구의 어떤 기념일을 챙길지까지 생각해야 하나? 이미 17살 때 이후로는, 신경쓰지 않아도 먹고 사는데 지장없는 것들은 철저하게 신경쓰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어쩌면, 나는 “난 깨끗한 놈이야”라는 허세나 오만 같은 것에 빠져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건 내가 가장 경계하는 것이다. 내 인생에 중요한 건 내가 납득할 수 있는 모습으로 사는 것이다.

    앞에서 했던 얘기를 다시 꺼내오자면, 지도교수님이 다른 학생이랑 쓴 논문은 PR E에 실렸다. 이 저널은 입자 물리학 쪽에서 어느정도 인지도가 있는 꽤 중요한 저널이다. 그것에 대한 중요 아이디어를 내던 자리에 나도 있었다. 하지만 그 뒤로 나는 졸업논문과 관련된 주제에 집중했고 (교수님도 그렇게 시켰고), 그 학생은 그 주제로 계속 연구를 해서 결국 학부생으로서 PR E에 그 결과를 실었다. 그것도 제1저자로서. 내가 연구하던 주제는 JKPS에 실렸다. JKPS도 괜찮은 저널이지만 PR E보다는 떨어지는 것으로 사람들은 생각한다. 난 그 논문에 제2저자로 실렸다. 후배의 말에 의하면, 내가 교수님에게 잘보였다면 그 주제가 내 것이 되었을 거라는 것이다. 그건 사실이긴 하다. 당시 난 교수님이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입자물리를 포기할까도 심각하게 여러번 고민했었고, 대학원 때려치고 군대로 도망갈까 생각도 하루에 수십번씩 생각했다. 아무튼간에 난 계속 붙어 있었고, 그럭저럭 졸업논문을 완성해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분명한건, 도대체 내가 뭘 잘못한건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실수하고, 잘못하고, 싫어하고, 거부하고, 차단하고, 멀어지려고 노력한 건 사실이다. 그럼 그것이, 내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증거일까? 무의식적으로 나는 스스로를 학대하는 것일까?

    까놓고 말해서, 내가 서울대를 갔으면, 난 행복했을까?

    그 후배 말대로, 윗사람들 똥꼬 빨아주면서 내 뒤좀 잘 봐달라고 얘기하면, 내가 행복할까? 그 후배는 내가 거기서 왜 고민하는지 도저히 이해 못할 것이다. 편하게 성공할 수 있는 길을 놔두고 뭐하러 괜히 고생하는지 평생 얘기해줘도 납득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도 그 후배의 말을 받아들일 수 없으니까.

    예전에 이 블로그의 글 중에, 기독교인을 싫어하는 이유중의 하나로 든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행복을 남에게 강요한다”는 점이다. 난 자유로울 때 비로소 행복하다. 몸은 비록 자유로울 수 없지만, 난 내가 생각하는 바에 있어서는 어떠한 제한도 제약도 두지 않고 모든 자유로운 생각을 다 하고 싶다. 이것은 나의 모든 가치관에 우선하는 절대적인 가치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종교적 신념에 가깝다고 할 수도 있다. 그 후배는 나에게 자기가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그것을 강요하고 있었다.

    행복해지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쉽다. 그냥 지금 이순간 행복하다고 느끼면 된다. “느낌”이란 가장 주관적인 항목이기 때문에, 생각 한끗발만 고쳐먹으면 순식간에 행복해질 수 있다. “난 xxx해서 행복해”라고 말한다면, xxx라는 조건이 사라지는 경우에 불행해질 것인가? 윗사람들한테 그렇게 부탁하고 잘 얘기해서 성공했다면, 반대로 그 사람들이 나에게 적대적인 사람한테서 더 괜찮은 선물과 함께 청탁을 받고 날 무너트릴 수도 있다. 그럼 불행해질 수밖에 없는 삶이다. 난 그렇게 살고싶지 않다.

    난 참 소심한 사람이다. 남들에게 짜증을 내지 못하고, 싫은소리 하지 못하고, 남을 미워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여리고 착하다. 현재에 항상 만족하고, 손해를 보더라도 묵묵히 감수하며, 남이 부탁한건 다 들어주며, 제 몫을 챙기지 못한다. 한마디로, 좀 병신같은 놈이다. 많은 사람들이 나와 반대로 살고 있다. 자기 몫은 다 챙기고, 남이 부탁할 때 항상 댓가를 바라고, 미운 사람과 좋은 사람을 뚜렷이 구별한다. 가끔은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부러울 때도 있었다. 손해를 보는게 너무 많았던 적도 있으니까. 하지만 나는 다르게 생각한다. 드라마 속에 나오는 주인공을 부러워만 할 텐가?

    내가 “옳은지” 또는 “틀렸는지”는 스스로 판단할 수 없다. 그리고 그 답이 내가 이렇게 살겠다는 결심에 영향을 줄 것 같지도 않다. 틀렸더라도 이렇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누구나 인간은 스스로가 맞다고 생각하는 삶을 살아간다. (적어도, 그렇게 살아가려고 노력은 해봤었을 것이다.) 태어날때부터 좌절하면서 태어난 사람은 없다. 자신이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욕망이 생긴 후에, 비로소 그는 좌절할 수 있게 된다. 좌절하지 말라는 소리가 아니다. 무언가를 바란 이상, 좌절하는건 당연한 결론이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제대로 성취하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없지 싶다. 특히 현대, 한국에서는. 대다수의 사람이 좌절하는데 자신이 좌절했다는 것은 결국 자기 일이니까 엄청난 일이지 전체로 보면 별것 아니다.

    그래서 나는 소심한 성격을 단점이 아니라 장점으로 바라보려고 한다. 그건 나의 “특징”이지 “단점”이 아니다. 마치, 내가 남자이고, 한국인이라는 것과 같은, 나를 구성하는 하나의 구성요소일 뿐이다. 그것을 어떻게 활용하고 어떻게 바꿔 나가느냐는 전적으로 나에게 달린 문제다. 성격이라는 것이 참 바꾸기 힘든 것인데, 바꾸려고 해도 바꿀수 없는 부분이라면 관점을 바꿔서 그것을 장점으로 바라볼 수 있다. 나의 소심함은 깊이 생각하는 것으로 치환시킬 예정이다. 아직은 생각의 깊이가 그다지 깊지는 않다. 조금 더 경험이 쌓이면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그 후배가 한 얘기 중, 하나를 더 짚어보자면 내가 저평가 받고 있다는 것이다. 내가 가진 능력에 비해서 저평가 받고 있기 때문에 착취당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을 하지 못하며 고생만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렇게 보여질 수 있다. 그리고 사실 그렇다. 솔직히 말해서 그래프 1000개 그리는 삽질을 할 때는 손목 부러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내 나이 또래의 대다수의 신입사원들 또한 그들이 들어간 회사에서 스프레드시트로 그래프 그리고, 마케팅 자료에서 통계 처리를 하고(분석은 안함), 아무 의미 없어 보이는 쓸데없는 서류들을 복사하고 처리하는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회사에서 하는 일의 대부분은 고등학교까지만 배웠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업무다. 대학교, 대학원까지 마친 그들이 쓸데없는 그런 일을 하고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저평가일 것이다. 참고로, 난 그래프 1000개 그리기 같은 거의 기계화되었어야 할 단순 사무, 실험실에서 실험 장비 세팅하고 점검하고 운영하는 노가다성 업무, 실험에 관련된 특허 문서를 작성하는 정신 노동까지 다 한다. 아주 쉬운 것부터 아주 어려운것까지 전부. 이젠 레이저-플라즈마 상호작용의 컴퓨터 시뮬레이션까지 시킬 테세다. 내가 저평가 되었다면 그냥 단순한 노가다만 시켰을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시킨다고 다 잘해버리는 나도 내가 어디까지가 한계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에 관심이 있다. 입자물리학 전공을 하고 싶은건 사실이고, 연구소에서 연구하는 주제들은 사실 내가 하려는 입자물리와는 거리가 있긴 하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에 전혀 흥미가 없거나 재미가 없는건 아니다. 해서 나쁠게 뭔가. 그냥 하면 되는거지.

    모 통신사에서 “생각대로 해, 그게 정답이야”라는 문구로 광고를 했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생각대로 해서 뭐가 되겠어?”라든가 “병신아, 생각대로 하면 망해”라든가, 그렇게 생각한다. 나는 진짜로 “생각 그대로” 하고싶다. 물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내가 도대체 생각하고 있는 것이 진짜로 무엇인가에 대해서 알아야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진짜로 내 생각대로 살 생각이다. 비웃든, 부러워하든, 망하든, 성공하든.

    조상님중의 한분인 남이 장군의 “북정가”로 이 글을 마무리 짓는다.

    “백두산 돌은 칼을 갈아 없애고

    두만강 물은 말을 먹여 없애리

    남자가 스무살에 나를 평정치 못하면

    후세에 누가 대장부라 칭하랴”


    http://snowall.tistory.com/926

  • 그림 공부

    이 한장의 사진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다. sqrt는 제곱근, abs는 절대값 함수다. 아직 gnuplot에서 저기에 수식을 어떻게 쓰는지 잘 모르겠다. (LaTeX도 설치를 아직 안해서…)

    아무튼.

    $f(x)=\sqrt{|x|-1}$과 $g(x)=\sqrt{|x-1|}$의 차이는, x>1인 영역에서는 두 함수가 같지만 x<1인 영역에서 달라진다. x<1인 경우, f(x) (빨간색) 는 $\sqrt{-x-1}$이다. 알다시피 제곱근 함수는 그 안에 있는 놈이 음수가 되면 값이 안나온다. (정확히는 복소수 값을 갖게 된다. 아무튼 실수가 아니라는거...) 따라서 -1부터 1사이에는 그래프가 아예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다시 -1이 되어서 x<-1인 상태가 되면, 이제 그래프가 다시 생긴다. 이 함수는 x=0에 대해서 y축 대칭이다. g(x) (초록색) 는 x<1인 경우에 $\sqrt{-x+1}$이다. 따라서 이 함수에 있는 제곱근 안에는 음수가 올 수 없다. 따라서 1부터 다시 그래프가 그려지고, 이 그래프는 x=1에 대해서 y축 대칭이 된다. 그림 그려보면 쉽다. 이렇게 그림을 그려서 함수를 분석하는 분야를 해석 기하학(Analytic Geometry)이라고 한다.

  • 자외선 차단 코팅에 관한…

    일단 복습


    http://snowall.tistory.com/1386



    http://snowall.tistory.com/1405



    http://snowall.tistory.com/1408


    방명록에 질문이 들어왔다. 반갑다. ㅜ_ㅜ

    안녕하세요. 자외선 차단 코팅 관련한 글을 읽고 질문드릴게 있어서 글 남깁니다.

    빛이 코팅된 렌즈에 들어가면 반사가 되는데
    코팅막에서 반사되는것과 렌즈에서 반사되는거 중에 어떤 곳에서 반사되는것이 더 많은건가여?? 또한 흡수는 렌즈에서 흡수하는거
    코팅막에서 흡수하는거 어떠한 것을 뜻하는건가요??

    그리고 제일 궁금한건데 자외선의 투과를 낮추기 위해서 반사율을 높이는데 이
    의미가 잘 이해가 안갑니다. 만약 들어오는 빛이 총 20이라고하면 투과가 6 , 흡수가 8이되며 반사가 6이되는데 즉
    코팅막에서 반사되는 것과 렌즈에서 반사되는 것 총 반사되는 것이 6이되는 것인데 보강 간섭이 안되어도 렌즈와 코팅막에서 나가는 총
    양은 항상 6이되는 것인데 보강간섭이 아니더라도 나가는 빛의 양은 6으로 같은거 아닌가요?? 궁금증좀 풀어주세요~~ 그럼
    안녕히계십시요!!

    빛이 코팅된 렌즈에 들어가면 반사가 되는데, 반사는 두 부분에서 일어난다. 하나는 코팅의 표면이고, 다른 하나는 렌즈의 표면이다. (물론 렌즈를 다 지나쳐서 반대쪽 표면에서 반사되는 것도 있긴 하지만, 그건 넘어가자.) 이때, 반사되는 면이 얼마나 반사하는지는 모르겠다. 그건 물질마다 다르다. 중요한건, 반사하는 코팅의 막 두께에 따라서 반사되는 빛의 양이 달라진다는 점이다. 이것은 빛의 파동성 때문이다. (참고로 물질마다 반사되는 양이 달라지는건 빛의 입자성 때문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금속같은 것들은 빛을 거의 100% 반사한다.

    이 글에서는 좀 더 분명하게 설명해 보려고 시도하도록 하겠다.

    처음에 빛이 A만큼 들어왔다고 하자. 박막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B라고 하고, 렌즈 표면에서 반사된 빛이 C라고 하자. 그럼, 당연히 A-(B+C)만큼의 빛이 통과하였을 것이다. 과연 그런가?

    이렇게 생각하는건 간섭 효과를 고려하지 않았을 경우이다.

    간섭 효과 자체를 다시 살펴보자. B라는 진폭을 가지는 빛과 C라는 진폭을 가지는 빛이 만났다면, 이 두 빛이 간섭을 일으켰을 때, 보강간섭을 일으킨다면 얻을 수 있는 최대 진폭은 얼마일까? 당연히 B+C이다. 반대로, 상쇄간섭인 경우에는 |B-C|이다. 여기서 |x|는 x의 절대값이다. (여기서, B가 더 큰가 C가 더 큰가에 관한 질문이 첫번째 질문이다. 이건 진짜 그때그때 다르다.)

    따라서, 반사된 두 빛이 완전히 상쇄간섭을 하게 된다면, A-|B-C|만큼의 빛이 투과하게 된다. A-(B+C)만큼 투과하는 경우는 완전
    보강간섭이 일어났을 경우이다. (물론 빛의 파장에 따라서, 박막의 두께에 따라서 실제 반사되는 빛의 양은 달라질 것이다. 여기서는
    “자외선”이라고 부르는 특정한 파장 대역에 대해서만 논의하자.)

    질문하신 분이 들어준 예를 살펴본다면, 20의 빛이 들어왔고, 박막에서 4만큼의 빛이 반사되고 렌즈에서 2만큼의 빛이 반사된다면, 보강간섭이 일어났을 경우에는 6만큼이 반사되어 14만큼의 빛이 투과할 수 있는데, 상쇄간섭이 일어난다면 4에서 2가 상쇄되고 2만이 반사되어, 결과적으로 18의 빛이 들어오게 된다. 이건 렌즈에서 원래 반사시키는 것과 마찬가지이고, 코팅이 의미가 없게 된 경우이다.

    즉, 박막에서 최대한의 보강간섭이 일어나봐야 얻을 수 있는 최적의 반사율은 원래 렌즈 표면의 반사율과 박막 표면의 반사율을 합한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 박막을 왜 쓸까? 반사가 더 잘되어야 하는거 아닌가?

    박막이 없으면 렌즈만으로 얻을 수 있는 반사율은 당연히 박막과 합쳐졌을 때 나오는 반사율보다 작다. 자외선 반사를 더 크게 하기 위해서는 자외선을 반사해주는 다른 물질을 덧씌워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물질의 코팅을 너무 두껍게 하면 다른 빛도 통과하지 못할 수 있다. 그럼 얇게 해야 하는데, 무턱대고 얇게 하다가, 만약 이게 두께가 기가막히게 맞아떨어져서 반사되는 빛이 상쇄간섭이 이뤄진다면, 이 코팅 렌즈는 자외선 영역에 대해 100% 투과율이 보장되는 멋진 렌즈가 될 수 있다. 이런걸로 안경을 만들었다간 당신의 망막이 타버릴 것이다. 따라서, 박막을 씌울거면 최적의 두께로 덧씌워야 하는데 그 두께가 바로 보강간섭이 일어나는 두께이다.

    물론 반대로 상쇄간섭을 최대화 시켜서 렌즈를 만드는 경우도 있다. 카메라 렌즈에 쓰이는 무반사 코팅이 바로 그것이다. 이 경우에는 빛이 너무 어두운 경우에 그나마 없는 빛이라도 최대한 투과시켜서 조금 더 밝게 사진이 찍히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박막 간섭에 대해서는 이곳에서 좀 더 자세히 공부해 볼 수 있다.


    http://physica.gsnu.ac.kr/phtml/optics/interference/thinfilm/thinfilm2.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