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학술

  • 인간의 가능성

    인간은 자신이 상상하는 것만을 할 수 있다. 상상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할 수 없는 것은 시도할 수 없다. 꼭 그만큼까지가 자신의 한계이다.

    과학은 자연이 무엇을 금지하는지 밝혀내고, 공학은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을 만들어 낸다.

    공학은 과학에 의해서 금지된 것을 제외하고는 무엇이든 할 수 있다.

    상상력이 중요한 이유는, 공학이든 과학이든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상상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상상하지 못하는 것은 결코 해낼 수 없다. 도전할 수도 없고 금지할 수도 없다.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을 불가능하다고 단정지을 수는 없는 것이다. 상상해본 적도 없는 것을 시도할 수는 없다.

    단 한명이라도 어떤 것에 대해 상상해야만 그것은 이루어지거나 불가능해진다.

    불가능?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불가능하다는 그것을 상상이나 해보고 얘기하자.

    자신의 한계를 설정하면, 꼭 그만큼까지가 자신의 능력이 된다. 더이상 자신의 능력이 발전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면, 그 이상의 한계를 상상하라. 그 이상을 상상할 수 있다면, 아직 당신은 당신이 가진 능력을 모두 발휘한 것이 아니다. 도저이 그 이상을 상상하지 못하겠다면, 당신은 거기까지가 한계인 것이 맞다.

  • 전략적으로 신뢰하기

    요즘 사람들은 믿음이 없는건가.


    친구도 애인도 no! ‘나는 나만 믿는다’

    위의 기사를 읽고나니 성공하는 사람들의 일곱가지 습관 중에서 trustworthyness라는 개념이 떠올랐다. trusworthyness는 “믿을만한 가치가 있음”을 뜻한다. trust는 “믿음”인데, trustworthyness가 더 중요한 개념이다.

    아무튼.

    게임 이론에서 말하기를, 협력-배신의 딜레마인 경우 가장 성공적인 전략은 “처음에 협력하고 그 다음부터는 그대로 따라하기”라고 했다.



    [각주:

    1

    ]



    사실 누구나 알다시피 서로 협력하면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항상 딜레마에 빠지게 되는데, 남들이 모두 착하게 살 때 나 혼자 약삭빠르게 살면 나는 더욱 성공할 수 있다. 물론 누군가 다른 한명이 손해를 보겠지만. 따라서 이 경우 모두가 배신하는 쪽으로 결론이 나 버리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지금, 현대에 살아남은 유전자들은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서로 협력하는 행동을 하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서로 협력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 또는 그렇게 하지 않은 유전자들은 이미 수억년 전에 사라진 상태다. 위의 기사를 읽어보면 배신당하는 것을 두려워하여 먼저 배신하고 누구도 믿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만약 그런 전략을 모든 사람이 선택한다면 모두가 같이 멸망하는 길이다. 그리고 그렇게 하지 않은 사람들만 살아남은 사회가 될 것이다. 실제로 유전자 단계에서나 종 단위에서는 그런 것들만 살아남아 왔다. 인간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서로가 이득을 보는 전략을 취하지 않는다면 결국 같이 망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나는 우선 협력하고 그 다음에 상대방의 전략을 따라하는 작전을 선택한다. 그 실천으로, 상대방의 말을 일단 믿는다. (웬만하면 -_-;)

    거짓말에 속는 것은 내가 정보가 부족하기 때문이고, 거짓말을 한 쪽이 나쁜놈이지만 그렇다고 그냥 속지는 않는다. 믿는건 믿는거고 정보는 정보다. 앞서, 이재율씨와의 이메일에서 언급했던 부분이지만, 논문 심사의 과정은 신뢰성이 대략 보장되는 과정이다. 따라서 믿어도 좋다.

    사람들은 이 사회에 대해 최소한의 믿음을 가질 수는 있는데, 바로 그것은 “상대방이 나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을 것”이라고 상대방을 믿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이미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다는 증거다. 만약 상대방이 나를 신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전혀 모르겠다면 나는 어떠한 전략도 수립할 수 없다. 하지만 상대방이 나를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그에 따른 적절한 전략을 선택할 수 있다. 따라서, 위의 기사에 언급된 이야기는 오히려 “믿어도 좋음”에 가깝다. 잘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내 얘기는 모순된 말처럼 들릴 것이다.

    상대방이 일관되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건 그만큼 그 사람이 믿을만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오히려 거짓말을 잘하는 사람들이 하는 말의 대부분은 진실이다. 커다란 거짓말에 속지 않으려면 상대방이 얘기하는 것이 진실에 가까울수록 주의해야 한다.

    그런데, 글을 쓰다보니 시작과 끝이 다른 방향이 되었다. -_-;

    1. 죄수의 딜레마 (윌리엄 파운드스톤) 참고

      [본문으로]

  • 일단 맞고 보자

    권력을 갖고 있다는 것은 참 좋다.

    뭐가 좋냐하면, 일단 때리고 봐도 괜찮다는 것이다.

    예를들어, 경찰 수사를 하는데 여러가지 정황으로 봐서 A라는 사람이 용의자라면, 적법한 절차를 거쳐서 그 사람을 조사하여 처벌하게 된다. 근데 A가 용의자이긴 했으나 조사 결과 무죄인 것이 판명되었다면, 그동안 A가 받은 여러가지 피해는 어디서 구제받아야 하는 것일까? 단, 이 경우 절차상 모든 조사는 적법하고 합법적으로 이루어졌다고 하자. 그럼에도 불구하고 A는 피해를 받을 수밖에 없다. 물론 오해받을만한 짓을 한 A가 오해받을만한 짓을 했으니까 참고 감수하라는 의견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가령 얼굴이 험악하게 생겼다고 오해받은 거라면 얼굴 뜯어고칠 돈은 한푼도 안주면서 남의 얼굴보고 뭐라고 하는 것 같으니 그것도 공평하지는 않다.

    A가 죄가 있는 경우와 죄가 없는 경우, 경찰이 A를 조사하는 경우와 조사하지 않는경우를 따져보면 4가지 경우로 나눠진다.

    1. A가 죄가 있고 경찰이 A를 조사한다.
    2. A가 죄가 없고 경찰이 A를 조사한다.
    3. A가 죄가 있고 경찰이 A를 조사하지 않는다.
    4. A가 죄가 없고 경찰이 A를 조사하지 않는다.

    위의 네가지 경우 중에서, 1번과 4번은 아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가 되는 경우는 2번과 3번인데, 2번과 3번 중에서 어느쪽이 더 나쁜 경우일까? 말할것도 없이 3번이 더 나쁜 경우다. 단, 이 주장이 2번이 나쁘지 않다는 주장은 아니다. 경찰 입장에서는 2번보다 3번이 더 나쁜 경우에 해당되므로 일단 최악에 해당하는 3번을 막기 위해서 A를 조사해야만 한다. 여기까지는 판단에 별다른 하자가 없다.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2번의 경우에 A가 얻게 되는 실제적인 피해는 보상받기 힘들다는 점이다. 물론, 아주 이상적인 사회에서는 죄가 없는 사람이 오해를 받을 필요도 없고, 오해를 받았다고 해서 죄가 없는데 처벌 받을 일도 없으며, 경찰서에 잡혀가서 몇가지 조사를 받고 무죄로 판명받아 풀려났다고 해서 손해를 보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실은 다르다. 경찰서에 조사를 받으러 갔다 오면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안좋아진다. 경찰 역시 아무런 근거 없이 사람을 잡아다가 조사하지는 않겠지만, 조사를 받고 온 사람이 유형, 무형의 손해를 보는 것은 사실이다. 더군다나 사건 자체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도 조사를 받는다면 정말 억울할 것이다.

    대책은 아직 모르겠다. 사람들의 의식이 바뀌어서, 경찰에서 무죄로 판단했다면 아무런 의심도 하지 않는 착한 사람들이 많아져야겠지만 경찰이라는 조직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사람들인지라 그것도 쉽지는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경찰서에서 눈에 보이지도 않는 피해를 보상해줄 수 있는 근거도 없다. 참 어려운 문제다.

    이 글의 아이디어는



    오늘은 네이버에서 전화오네요…


    를 읽고서 떠올랐다. 네이버를 경찰로 놓고, 위 글의 주인공을 용의자 A로 두면 내가 글에서 얘기한 것과 비슷한 경우가 된다.

    이런 문제에 관하여, 과연

    대책

    은 존재할 수 있을까? 즉, 위의 4가지 경우에서 3번을 막기 위해 2번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을 현실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2번에서 발생하는 문제 조차도 피해갈 수 있는 대책은 존재하는가?

    일단, 나는 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누군가 현명한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 그는 누구를 이겼는가?

    아래는 승리를 나타내는 표식이다. 이 손의 주인공은 누구를 이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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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답

    인터넷 여기저기에 돌아다니길래 퍼와봤다.

  • 초 긍정적

    교수님이랑 내 졸업논문에 대해서 토론을 하고 나왔다. 꽤 오래전부터 느끼고 있었던 거지만, 교수님이랑 토론을 하고 있다보면 연구 의욕이 절반씩 깎여나간다. 다행인 것은 지수함수적인 감소라서 0이 되지는 않는다는 점(?) 내 졸업논문은 영어로 되어 있어서 아주 졸작이다. 영어로 되어 있기 때문에 졸작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졸작은 졸업작품의 줄인말이 아니다. 오늘 토론하는데 교수님이 “넌 왜 영어로 써서 너 스스로도 논리 흐름을 놓치냐”라고 하셨다. 옳은 말씀이다. 백만번 되새겨 생각해도 맞는 말이다. 난 영어를 못한다. 근데 저 말을 들을 때의 내 감정은 상당히 속이 쓰린 상태였다. 왜냐하면 저런 말을 한두번 듣는게 아니라 석사 2학기부터 1년 반째 듣고 있기 때문이다. 교수님께서 나에 대해 생각해 주시는 것과 뛰어난 과학자라는 점에 대해서는 추호의 의심도 없다. 그건 지난 2년간 석사 생활하면서 깊이 느낄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그거고 교수님이랑 토론을 하다보면 연구 의욕이 반토막 나는건 내 감정 상태일 뿐이다. 나 스스로에 대한 생각에서 느낀 건데, 이 원인은 분명 연구 과정에서 그냥 건너뛰어버린 논문의 논리적 결함 때문이다. 그건 내가 직접 계산해봤기 때문에 잘 알고 있다. 이 얘기를 교수님께 여러번 말씀드렸지만 결국 그 결함이 문제가 없다는 교수님의 생각을 고칠 수 없었다. 거기서 시작된 내 양심의 가책이랄까, 그런 것이 점점 증폭되어 생각을 정지시켜 버린 것 같다. 정확히는, 그 순간 “이건 과학이 아니다”라는 느낌이 들었고, 그때부터 흥미가 줄어들기 시작했던 것 같다. 물론 이에 대한 책임을 내 감정적으로는 교수님께 떠넘기고 난 그냥 교수님이 시키는대로 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면 문제가 없다. 그렇지만 이미 이 연구가 나의 과제라는 책임감이 생긴 마당에 그냥 넘어가는건 그다지 옳다는 느낌이 들지를 않는다. 사실 지금 내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면, 졸업 논문 끝나고 나면 이 주제에 대해서는 평생 다시 들춰보고 싶지 않다. 입자물리학 말고 고체물리나 플라즈마같은 다른 주제를 하고 싶어지고, 입자물리를 하더라도 중성미자 물리학에 손을 대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빨리 다른걸 하고 싶다. 예전부터 느꼈던 거지만, 교수님이 나한테 칭찬 한마디만 해 주셨으면 내 대학원 생활이 좀 더 긍정적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싶다. 물론 섣부른 칭찬은 독이고 빗나간 자만심은 자살행위다. 내가 칭찬받을만큼 잘한 것도 아니고 그냥저냥 대충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정말 마음속으로는 간절히 바랬었던 것이 단 한마디의 칭찬이었다고 본다. 물론 이 얘기를 교수님께 직접 할 수는 없었는데,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 결국 교수님은 나를 바라보는 관점을 바꾸지 못했고, 그 관점에 따라 나는 별로인 학생이 되었고, 그에 따라 별로인 학생에게 칭찬이 오지 않는지라 나는 더욱 별볼일 없는 학생이 되어가는 것 같다. 그렇지만 교수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나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면, 그다지 나쁘지 않다. 내 앞에서 대놓고 내 욕을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로 다른 그룹의 사람들의 평가가 대부분 일치하는 것을 보면 나는 분명 꽤 괜찮은 인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아니면 교수님의 평가가 진짜이고 나는 그저 내 주변의 거품에 둘러싸인채 자만과 허영의 늪으로 가라앉고 있을 뿐일까? 어느쪽이든, 내가 대학원에서의 2년간의 생활을 견뎌냈다는 것은 중요한 사실이다. 나 자신이 그다지 뛰어나지 못한 학생이었기 때문이어도 좋고, 교수님이랑 나랑 잘 맞지 않았기 때문이어도 좋다. 어쨌거나 대학원에 있었던 2년간의 생활은 정신적으로 대단히 괴로운 시간이었다. 그 괴로운 시간을 견뎌냈다는 것으로 난 그냥 나 자신이 긍정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고도 여전히 물리학을 좋아하고 있는 내가 미친놈이라고 생각하며 위로를 던진다. 다른 선배들도 나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내가 대단한 놈이라고 얘기한다. 나는 나 스스로를 이렇게 긍정해도 되는 걸까? 예전에도 얘기했지만 난 대학원에 들어와서 매일 뛰쳐나가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번 했었고, 그 질문을 마음속으로 던질 때마다 매번 이대로 버텨보자는 대답을 수백번 되새겼었다. 초등학교때 꿈꿨던 “과학자”라는 직업을 갖기 위해, 이제 12년정도 지나왔다. 여기서 포기하는 것은 능동적으로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어쩔 수 없이 포기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것은 결국 세상에 항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말은 멋진걸? 근데 그게 아니다. 이것 때문에 포기해야 했던 또다른 가치있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가장 가치있는 것을 위해서 다른 것을 포기하면서 살아왔는데, 이제 가장 가치있는 것을 포기한다면 난 그것들을 어째서 포기했던 것일까. 유학을 가기 위해서 필요한 추천서와 연구 경험을 얻기 위해서 들어왔고, 이제 그것들이 완성되어 간다. 어떻게든 버티고 나면, 그리고 몇년 후 군대 문제를 해결하면 그때 교수님께서 내게 그럭저럭 괜찮은 추천서를 써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여기서 뛰쳐나가면 다른데 가서 추천서 구할 곳도 없다. 더 잘할 수도 있었던 2년의 대학원 생활을 이제 조금만 더 진행하면 어떻게든 끝이 난다. 물론 내가 감당했던 정신적 고통이 일방적으로 교수님에 의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니다. 내가 게을러져서 맨날 놀기만 했던 것도 있고, 그 덕에 교수님께서 시킨 일이 제때 진행되지 않았던 부분들도 있다. 하지만 그럭저럭 했는데. 교수님께서 언제까지 해 오라고 시키셨던 일들은 정해진 날짜까지 거의 대부분 해냈었다. 막판에 졸업 논문 쓰는게 꼬여서 그렇지, 그다지 일을 못한 것도 아니다. 나름대로는 꽤 잘 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이상, 이 글은 나 스스로를 긍정적으로 바꾸기 위한 자기변명이었다. 며칠째 밤새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스트레스가 쌓이는건 나나 교수님이나 마찬가지일 것이다. 조금 더 해볼까.

    그건 그렇고, 교수님이랑 마주앉아서 며칠 밤샌 퀭한 눈으로 보고 있으면 왜 교수님은 ”

    너 술마셨니?

    “라고 물어보실까. -_-; 하아…이게 제일 힘들다.

  • 사람을 뽑으면 된다 이거지?

    *독자들은 이 글이 “수학”카테고리에 있다는 사실에 주의하기를 바란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선거 얘기에 휩쓸렸다.

    아무튼 그러다가 종합해보니까, “사람”을 뽑으면 된다는 건데.

    이것은 12개의 원소를 가지는 집합에서 1개의 특정 원소를 골라내면 된다는 것이다. 조건은 “사람”일 것.

    그렇다면 우선 후보자 집합에서 사람 집합과의 교집합을 찾아내야 한다.

    증명해야 하는 것은 다음의 두가지 명제이다.

    1. 후보자 집합에 사람은 존재하는가?

    2. 유일하게 존재하는가?

    문항의 난이도는 초등학교 5학년 1학기 수학 문제 정도지만 답을 아는 사람은 없다. -_-;

    아무튼, 정답에 대한 추측은 괴델의 불완전성 정리에서 사용된 의미에서 “증명 불가능함”이 아닐까 싶다. 즉, 위의 두 명제의 답이 Yes이거나 No이거나 기존의 논리체계에

    모순이 없어지지 않는

    다는 것이다.

  • 송유근 군, 포기하지 말기 바람


    물리학을 열심히 공부해보겠다며 인하대에 입학한 06학번 송유근 학생이 지금 다니는 대학을 포기하고 다른 곳으로 옮긴다고 한다.






    전 세계 어디의 물리학과를 가도 교양과목 안배우는데는 없을텐데 -_-;




    그리고 인하대에서 적응 못했으면 어느 대학의 어느 학과를 가도 학교 규칙을 따르기 쉬운 곳은 없을텐데 -_-;






    그냥 교양과목은 대충 배우고 물리학은 열심히 해서 전공학점이 높고 교수님들에게 추천서 잘 받아서 대학원을 진학해야 원하는대로 수준높은 강의를 들으면서 교양은 안배워도 되는 환경에 갈 수 있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였는데. 교양 들으면서 내가 왜 교양을 들어야 하는지 몰랐고, 교양은 지겨웠으며, 교양은 확실히 전공보다 학점이 떨어졌다. (물론 최악의 학점을 받은 과목은 수학에서 한과목이 나왔지만…–;)






    부디, 그가 그곳에서의 학업을 포기하지 않고 꼭 졸업하여 대학원에 진학했으면 좋겠다. 내가 학부때의 고민을 그대로 하고 있는 친구여.

    오보랍니다. 언론이 좀 과잉보도를 했다는군요. -_-;


















  • 나의 열정에 관하여


    나는 참 세상을 쉽게 산다

    .


    대학원
    다니면서 참 많이 깨지고 마음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

    .

    어찌나 힘든지

    ,

    졸업하고서
    물리 그만두고 다른거 할까 하는 생각도 많이 했다

    .
    (

    정말 많이 했다

    )

    다른거
    하더라도 못할 이유는 없어보이고

    ,

    도전해본다고 해서 나쁠 것도 없다

    .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마당에 후회할 이유는
    없었다

    .

    그런데
    물리학이라는 것이 이제 더이상 포기가 안된다

    .

    지금

    ,

    겨우 석사
    졸업 논문을 쓰는데

    ,

    옆방
    선배는 이틀 밤새서 만든 졸업논문을 나는 한달째
    붙잡고 있다

    .



    ,

    그런데 품질은 옆방 선배가 이틀만에 만든 논문이랑
    그다지 달라보이지는 않는다

    .

    내가 왜 이렇게 어려운 길을 걷고 있는지

    ,

    왜 밤새고 있는지 설명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

    그냥

    ,

    나 자신이 나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켰을 뿐이다

    .


    내게는 열정이 있다

    .

    나로하여금 겨우 석사 논문 쓰는데도 몇달 동안
    밤새워서 만들게 하는 열정이 있다

    .

    그런데 이 열정은 차갑게 식은 열정이다

    .

    열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

    열정이 없는 것은 식은 열정과는 또 다른 얘기가
    될 것이다

    .

    나의 열정은
    차갑게 식어서 물리학을 포기하도록 만들 것 같다

    .


    유학간
    선배들이 열심히 하고

    ,

    좋은
    성과를 내고 있는 것은 부러운 일이면서 동시에 나도
    그만큼은 할 수 있다는 기대 또는 희망을 얻는다

    .

    하지만 유학을 갔다가 결국 포기하고 중간에
    되돌아 오는 사람들을 보면

    ,

    나 역시 유학을 가서 좌절하고 돌아올 수도 있다는
    우울함에 빠지게 된다

    .

    유학을 가지 말고

    ,

    우리나라에서 취직해서 적당히 돈 벌면서 살면



    남들이 말하는
    성공



    의 경지에
    도달할 자신은 있다

    .

    물리학
    분야에서는 그만큼 성공할 자신이 없다

    .

    그런데 이렇게 자신이 없어진 나의 태도가

    ,

    분명히 지금 다니는 대학원에 들어오기 전에는
    그다지 부정

    적이지는 않았다


    .


    분명 이렇게 우울하지 않았었다고
    기억한다


    .


    그렇다면
    그때의 자신감은 어디로 갔는가


    ?


    그때의 열정은 다 어디로 숨었는가


    ?


    당연히 아직 내 안에 있을 것이다


    .


    다만 대학원을 다니면서 저절로
    숨어버렸을 뿐이다


    .


    분명히 학부때까지는 상당히 우수한
    학생이었고


    ,


    지금도
    그때의 실력이 없어지지는 않았다


    .


    공부를 안해서 많이 잊어버리긴
    했어도 다시 공부하고 책 읽으면 복구할 수 있는
    실력이다


    .


    대학원 다니면서
    노력을 안했다


    .


    사실
    많이 놀았다


    .


    물리
    공부보다는 다른 걸 더 많이 한 것 같다


    .


    연구하면서 쌓이는 스트레스를
    해결하기 위해서 참 많이 놀았던 것 같다


    .


    놀았다는 사실에 대해 후회하는
    건 아니지만


    ,


    내가
    놀았기 때문에 남들이 석사때 쌓을 수 있는 실력보다
    덜 쌓은 것은 사실이다


    .


    유학가서 어차피 처음부터 새로
    배울 거라는 점을 핑계삼아 공부를 덜 했다


    .


    연습문제도 덜 풀어보고


    ,


    책도 대충 읽었다


    .


    공부에는 시간이 없다는 핑계를
    대고


    ,


    놀기는
    많이 놀았다


    .


    그래서
    나의 열정은 현재

    식은 열정이다


    .

    미래의 내 모습을
    상상할 때

    ,

    나는 유명한
    물리학자가 되어 여기저기서 강연도 하고

    ,

    수십편의 논문을 학술지에 투고하고

    ,

    뭔가 사색에 잠겨서 우주의 구조에 대해 생각하는
    모습을 보았다

    .

    그렇게
    되지 않는 나의 미래의 모습을 상상할 때

    ,

    나는 상상하는 것만으로 갑자기 우울해진다

    .

    물리학을 연구하지 않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은 나 스스로를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 같다

    .

    참 신기하다

    .

    물리학을
    잘 할 거라는 자신감은 점점 없어지지만

    ,

    물리학을 더 많이 공부해 보고 싶다는 욕구만은
    참 많이 생긴다

    .

    어딘가의
    노래 가사에 있듯

    , “

    헛된
    꿈은 독”이 될 수도 있다

    .

    조금씩 물리에 미쳐간다

    .

    물리에 중독은 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있다

    .

    나의 계획은

    10

    년을
    걸고 하나씩 이루어 나가는 계획이다

    .

    이제 겨우

    2

    년이
    지났을 뿐이다

    . 8

    년간
    더 정진해보고

    ,

    물리가
    안되면 그때가서 생각해 보자

    .

    계속 해야 할지

    ,

    그만
    둘지

    .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된다면

    ,

    아마 평생
    물리만 공부하면서 살고 싶다

    .

    사람은 누구나 먹고사는 걱정을 하기에 꿈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다

    .

    물리학이라는 것이 그냥 공부할 때는 재미있지만

    ,

    이것을 “직업”으로 삼아서 자신의 생계를 꾸려
    나가려고 하면 갑자기 가슴이 탁 막히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 같다

    .

    지금의 나는
    그런 공포를 느끼고 있다

    .

    그리고 그 공포를 자만심에 아주 가까운 과도하게
    근거없는 자신감으로 버티는 중이다

    .

    논문을 쓰다가 우울하여
    잡글을 적어본다

    .


  • 불확정성 원리

    질문 :

    전자의 이중슬릿간섭실험에서 전자가 어느 쪽 슬릿을 통과하는지 알기 위해 감식기를 설치하면, 더이상 간섭무늬가 나타나지 않는다.

    이때, 슬릿의 틈은 폭에비해 매우 작다. 이 현상을 ΔxΔp>h와 λ=h/p를 이용하여 설명하라.

    슬릿의 틈이 폭에 비해서 아주 작으면, 틈 방향으로는 위치의 불확정성이 작아지게 된다. 따라서 전자가 가지는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커진다. 이 경우, 전자가 가지는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파장에 영향을 줘서 파장의 불확정성으로 나타나고, 따라서 간섭무늬가 사라지게 된다.

    문제는, “여기서 파장의 불확정성이 어째서 간섭무늬가 사라지는 것과 상관이 있게 되는가?” 이다. 정성적으로는, 여러 종류의 파장이 뒤섞여서 간섭성이 사라지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래도 잘 이해가 안가면 정량적으로(수식을 이용해서) 이해해 보자.

    영의 이중 슬릿 실험과 어차피 공식은 같다. 간섭무늬가 생기는 형태는

    $I(\sin(\theta))=I_0 \cos^2 (\frac{2\pi D\sin(\theta)}{2\lambda})=I_0 \cos^2 (\frac{ pD\sin(\theta)}{2\hbar})=I_0 \cos^2 (Ap)=\frac{I_0}{2} (1+\cos (2Ap))$

    처럼 생긴다. 저기서, 파장에 대한 불확실성을 운동량에 관한 공식으로 바꿨다. 어차피 파장과 운동량은 정확히 반비례하니까 살짝 대입해 주면 된다. 운동량이랑 상관없는 것들은 $A$로 몰아넣었다. 이제, 저기에 $\Delta p$만큼의 $p$에 대한 불확실성이 있다고 하자.

    그럼?

    아니, 그럼? 그래서 뭐가?

    아무튼 그대로 수식을 전개해놓고 보면

    $\frac{I_0}{2} (1+\cos (2A(p+\Delta p)))=\frac{I_0}{2} (1+\cos (2Ap)\cos (2A(\Delta p))-\sin (2Ap)\sin (2A(\Delta p)))$

    이 된다.

    이 실험은 전자 1개만 갖고 하는 실험이 아니라는 점이다. 물론, 전자 1개만 갖고서도 전자의 파동성을 “증명”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 결과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1개씩 따로따로 집어던진 전자를 갖고 하는 실험을 “여러번” 반복해서 해야 한다. 쉽게 얘기하자면, 전자 1개만 갖고도 간섭 현상이 일어나긴 하지만, “간섭 무늬”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전자 1개만 갖고는 알 수가 없다. 따라서, 간섭무늬를 보기 위해서는 여러번 실험을 해야 하고 이 실험을 할 때마다 $\Delta p$가 같으리라는 법이 없게 된다. 그러므로 아주 많은 실험을 한 후에는 $\Delta p$가 아주 다양하게 변화된 상황들이 모두 겹쳐진 후에 결과를 보게 된다.

    좀 더 정확히 얘기해 보자. 저기에 들어있는 변수중에 $A$에는 $\sin\theta$가 들어가 있다. 즉, 운동량이 변하면 간섭무늬의 위치가 변하는 것이다. 그런데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작으면 간섭무늬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도

    같이 작아지게 된다. 당연히, 운동량의 불확정성이 크면 간섭무늬의 위치에 대한 불확정성도 커지게 된다. 이런식으로 나타나는 불확정성은 실험을 여러번 반복하게 되면 “평균”으로 되어서 간섭무늬를 없애게 된다. 아주 간단히 알아볼 수 있다. 그래프를 그리기가 곤란하여 말로 설명하는데, 말하자면 간섭무늬 그래프를 $\Delta p$의 범위 만큼, 즉 불확정성의 범위만큼 평행이동하면 된다. 실험을 여러번 하게 되면 실험 마다 평행이동된 간섭무늬 그래프들이 겹쳐져서 나타나게 되고, 이렇게 생긴 중첩된 간섭무늬는 결국 간섭무늬가 없어지게 된다.

  • 파인만 다이어그램 그리기 툴킷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그릴 일이 있어서 구글 검색을 했다.

    검색어는 feynman diagram tool 의 세 단어다.

    첫 페이지에 바로 뜬다.


    링크

    그렇다. 이것은 내가 찾던 바로 그 툴킷이다. 사실 파인만 다이어그램에 들어가는건 fermion, weak boson, photon, gluon이 전부인지라 바탕이 되는 그림만 있으면 된다. 해서, 무려 CERN에서 그런 툴킷을 파워포인트용으로 내놓았다. 물론 ppt포맷은 Openoffice.org 에서도 읽을 수 있으므로 리눅스 유저든 맥 유저든 갖다 쓰는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아무튼. 난 필요한걸 찾아냈고, 이제 그리면 된다.

    참고로, TeX을 이용해서 파인만 다이어그램을 그리는 방법은 Metafont를 이용해서 그리는 FeynMF라는 툴이 있다고 하는데 아직 어떻게 쓰는지는 모르겠다. 일반적인 드로잉 도구로 자바 프로그램으로 나온 JaxoDraw라는 프로그램도 있는데 이건 쓰기가 불편하다.

    위의 툴킷을 이용하면 PPT파일을 편집해야 하는데, 결과적으로는 ppt에서 ps출력을 지원하지 않기에 일단 ppt로 편집하고 오픈오피스로 불러와서 ps로 내보내야 한다. 번거롭긴 하지만, 한두장 그리는데는 최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