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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재율


    이 아저씨가 왜 이러고 있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국제적으로 인정받으면 자연스레 한국에서도 인정 받을 것이고, 페르마의 정리를 간결히 증명한 것은 국제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업적이다. 그걸 굳이 인정 안해주겠다는 한국에서 인정받기 위해서 사람으로서 싸우는 것은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

    오늘 받은 이메일을 소개한다.


    이재율씨의 편지



    이중에서, 밑에 세개의 사건에 대해서는 대략 폭행 사건이므로 사실이라면 대한수학회에서 형사+민사상의 처벌을 피하기 어렵겠지만 최소한 처음의 1개, 논문 심사 오류건은 도저히 이재율씨의 일 처리 방식을 이해할 수가 없다.

    앤드루 와일즈 교수의 논문이 방대하고 복잡하고 난해하여 검증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 세계의 수학계에서 옳다고 검증을 마쳤고 그 결과 이미 해결된 문제로 공인되었다. 이재율씨가 학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일 처리 방법은 다음과 같다.

    1. 만약 이재율씨가 앤드루 와일즈의 논문이 틀렸다고 주장하려면 앤드루 와일즈 교수의 논문 중의 몇페이지의 몇번째 줄에서 몇번째 정리를 증명하는 과정에 오류가 있는지를 먼저 증명해야 한다. 반례를 들거나, 논리적 오류가 있음을 지적해야 한다. 그 후에 자신의 논문이 옳다고 주장해야 한다.

    2. 만약 이재율씨가 앤드루 와일즈의 논문이 옳지만 자신의 논문이 더 간결한 증명이라고 주장하려면 수학계에서 지적한 논리적 건너뜀을 모두 해결해야만 한다. 이재율씨는 ”


    근호 속에
    자연수뿐인 무리수들의 합은 무리수”라고 주장하고 있고, 이 부분에 관한 논의는 나도 잠깐 지켜본적이 있었는데 물론 “그럴듯 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그냥 인정하고 넘어가기에는 많이 부실하다. 이재율씨의 주장은 자연수의 제곱근들의 합이 무리수라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인데 제곱근이라는 것은 기본적인 대수 연산이 아니므로 누구나 수긍하고 넘어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자연수의 제곱근들의 합은 무리수밖에 나오지 않을 것 같다. 물론 그렇다. 그런데 그건 그냥 추측이지 옳다고 인정하기엔 수학적인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

    예를들어, 정말 그럴듯 하지만 아직 추측인 예는 “골드바하의 추측”이 있다.


    http://en.wikipedia.org/wiki/Goldbach’s_conjecture





    ‘2보다 큰 임의의 짝수는 4=2+2,6=3+3,8=3+5 …

    와 같이 두 소수의 합으로 나타낼 수 있다’



    크리스티안 골드바하 / 레온하르트 오일러


    저건 아무리 큰 숫자를 갖다 놔도 성립한다. 근데 아직 증명은 안됐다. 물론 반례도 못찾았다. 저렇게 제곱근도 없고 간단해 보이는 진술조차 수학에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고 여전히 추측으로 취급받고 있다. 더군다나 자연수 제곱근의 합이 항상 무리수라는 진술은 모든 경우에 성립한다고 하더라도 증명되지는 않은 추측에 불과한 것이다. 이 진술을 일반인이 이해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수학자들은 못 넘어갈 수도 있다.



    [각주:

    1

    ]


    논문 심사위원은 당연히 비공개인 것이 맞다. 왜냐하면 심사위원과 피심사자가 서로 안면이 있을 경우 논리적 오류를 지적하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기에 이러한 것을 최대한 배제하려면 서로 모르고 있는 것이 옳은 상황이다. 또한, 같은 논문에 대해 한번 심사한 것을 재심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재심을 신청하려면 지적받은 사항을 고쳐서 심사를 청구해야 하는데 이재율씨는 지적받은 논리의 오류를 전혀 수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위선양의 공동 이익이라는 명목하에 벌어진 국제 과학계에서의 망신은 황우석씨 한명으로 충분하다. 수학은 국위선양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한수학회 내부에 어떤 비리나 불법이 저질러지고 있는지는 전혀 모르겠다. 이 부분은, 만약 존재한다면 시정해야 할 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이재율씨가 진정으로 자신의 증명이 옳다고 생각한다면, 대한수학회가 틀렸다고 생각한다면, 대한수학회와 비슷한 등급의 수학 학회에서 검증을 받고 그 내용을 바탕으로 대한수학회에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 이런식으로 수학계에 파문을 일으키는건 어린아이가 아이스크림 사달라고 부모한테 떼쓰는 수준의 유치한 대응에 불과하다.

    전 세계 어느 수학회든지 모두 수학자들의 모임이다. “자연수의 제곱근의 합은 무리수다”라는 진술을 “그럴듯한데?”라고 하는 사람은 있어도 “당연하네”라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임의의 수학자를 불러다 놓고 저 진술을 들려주었을 때 누가 오더라도 당연하다고 해야 그것을 “자명하다”고 한다.

    편지 중간에 보면







    귀회는




    {4^(1/3)+2^(1/3)}(자연수)^(1/3)




    =




    [{2^(1/3)+1}^3*(자연수)]^(1/3)




    이 어떤




    (자연수)




    에서는 무리수가 아닐 수도 있다고 분명하게 예시할 수 있어야만 하는 것임.



    이라는 부분이 있는데,


    이건 수학의 특성을 완전히 무시한 주장이다. 심지어 저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면 수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는 말도 들을 수 있는 주장이다. 저 주장이 틀리기 위해 어떤 자연수에서 무리수가 아닐수 있다고 예시해야만 주장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이런 논리가 성립한다면, 내가 당장에라도 “골드바하의 추측은 당연하다”고 주장하고서 내가 틀렸다고 말하려면 “어떤 짝수가 두개의 소수로 표현되지 않음을 예시해라”고 주장한다면 난 골드


    바하의 추측을 증명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골드바하의 추측은 아직 반례가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고, 대충 1-4절에 있는 사건 경위를 읽어보니까 이재율씨는 그 사람들의 연구시간까지 방해하면서 ?아다닌 것 같아 보인다. 그렇게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을 ?아다니기보다, 이재율씨를 지지해주는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국제 학회에 투고하는 것이 일 처리를 빨리 할 수 있는 과정이다. 오히려 이 과정에서 낭비되는 돈을 모아도 국제 학회에 투고할만한 비용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해서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되면 대한수학회의 과오가 명백히 인정되므로 그 이후의 사건 처리는 빠르게 될 것이다. 현재 이재율씨의 투쟁은 이재율씨 본인의 주장 외에 수학적인 근거가 없다. “당연하다”는 것은 수학적인 주장이 아니다. 이재율씨는 당연하니까 증명할 거리가 없다고 하지만 남들은 당연하지 않다고 하는데 어째서 여전히 당연하다고 주장하는가?

    난 여기서 대한수학회가 이재율씨에게 폭력을 행사했는지, 또는 내부적으로 비리나 부패가 있는지에 대한 상황 판단을 하는 것은 아니다. 이 부분은 이재율씨의 논문 투고랑 상관 없이 규명되어야 할 부분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이재율씨는 수학계에서 소외된 계층인데, 그 소외는 스스로 자초한 일이다. 수학자들은 사람 아닌가? 사건 경위를 보면 정말 귀찮게 했다는 느낌이 딱 든다. 나같아도 후배가 똑같은 문제를 계속 물어보러 오면 처음 몇번은 잘 가르쳐 주겠지만 계속 그러면 짜증내다가 결국 도망갈 수밖에 없다. 이미 정이 뚝 떨어진 상태에서 뭘 바라는 것인가. 이미 한국에는 희망이 없으므로 외국에서 인정받고 돌아오기를 기대할 따름이다. 대한수학회에서 지적한 사항에 대한 논리적 증명을 다른 논문에서 찾아내든가, 직접 하든가 하는 식으로 논리를 보강하여야 할 것이다. 물론 이 증명이 가치가 있으려면 그 부분에 대한 증명에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사용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내 생각에, 이재율씨의





    {4^(1/3)+2^(1/3)}(자연수)^(1/3)




    =





    [{2^(1/3)+1}^3*(자연수)]^(1/3)”이 자연수라는 주장은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가 옳기 때문에 옳은 진술이 되는 것 같다. 물론 내가 이 추측을 증명할 생각은 없다. 만약 이 경우라면, 이재율씨의 주장은 옳은 주장이지만 페르마의 정리를 증명하는데 페르마의 정리를 사용하였으므로 증명으로서의 가치는 없다.

    *근데, 내가 받은 이메일에 답장으로 이 글을 보냈는데 반송됐다. 뭐지? -_-;

    추가 :

    읽는 김에 이 글도 읽어보자. http://snowall.tistory.com/1792



    1. 꽤 간결한데 증명이 좀 어려운 비슷한 대수학 문제는 다음이 있다. “a ≠ 0,1이 대수적 수이고 b가 대수적 무리수일 때, a^b은 초월수인가?” 여기서 x^y는 y가 x의 지수임을 표현한다. 힐베르트가 1900년에 제기한 문제이고, 어쨌든 참이라는 것으로 증명되었다. 자, 위의 명제는 당연히 참일까?

      [본문으로]

  • 공격적 대화

    *이 내용은 성공하는 사람들의 7가지 습관 중에 공감적 경청이랑 비슷한 부분이 있지만, 이러한 아이디어 자체는 꽤 오래전부터 생각해온 것들이다.

    요즘들어 정신적으로 살짝 우울해지면서 다른 사람들의 말이 공격적으로 들리고 내가 남들에게 하는 말들이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생각이 들고 있다. 순수한 나의 착각인거겠지만.

    아무튼 이 생각을 발전시켜서 일반화된 가설을 제시해 보자.

    “모든 질문은 공격이고 그에 대한 응답은 방어이다”

    의외로 많은 곳에서 공격적인 질문이 나오고 거기에 방어적인 대답이 나오는 경우를 발견할 수 있다. 가령, “밥 먹었냐?”라는 아주 일반적인 질문은 질문 당시의 상황과 말투와 감정 상태에 따라서 “넌 아직도 밥도 안먹고 뭐하고 찌질대고 다니냐?”라는 공격적인 질문으로 왜곡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아주 많이 비꼬는 것이고 그렇게까지 왜곡해서 듣는 사람은 없다. 아무튼, 어떤 대화의 화두를 꺼낼 때, 말을 꺼낸 사람은 잘 모르지만 듣는 입장에서 상당히 기분 나쁘게 들리는 말들이 있는 법이다. 이러한 상황은 양쪽 모두가 서로의 상황을 이해하면서 듣지 않는 한 그 수준이 가볍든 무겁든 항상 일어날 수 있다. 아무리 의도 없이 던진 대화에서 사소한 말꼬투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것은 이미 공격적 대화가 되고 그것으로 말싸움이 일어나서 번질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로, 몇년 전 나는 별로 중요해 보이지 않는 대화들 속에서 두 친구가 절교하는 장면을 눈앞에서 라이브로 지켜본 적이 있다.

    두 친구를 1과 2라고 칭하자. 둘 다 여자였다.

    상황설명 : 나랑 1과 2가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나랑 1은 약속시간 10분쯤 전에 도착해서 만났고, 2는 아직 오지 않은 상황이었다. 2가 별다른 연락 없이 1시간 30분 정도를 늦게 도착했다.

    1 : 많이 늦었네?

    2 : 응, 미안

    1 : 연락좀 해주지

    2 : 미안해

    1 : 다음부터는 늦으면 늦는다고 연락을 해줘

    2 : 조금은 늦을 수도 있잖아

    1 : 이건 조금이 아니잖아

    2 : 그래도 이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잖아

    1 : 연락이라도 해줬어야지

    2 : 난 조금 늦는게 내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1 : 항상 늦었잖아. 여러번

    2 : 많이 늦지도 않잖아

    1 : 항상 그런식으로 약속 안지키는게 좋은거야?

    2 : 그렇게 많이 늦은것도 아니잖아

    1 : 그렇게 자꾸 약속 어기는건 좋지 않은거야

    2 : 지금 내가 고쳐야 한다는 얘기야?

    1 : 나쁜건 고쳐야지

    2 : 못고치겠는데

    1 : 그래? 그럼 나 너랑 친구 못해

    2 : 그래? 그럼 나도 안해

    대본은 기억나는대로 옮긴 것이고, 정확히 저렇게 얘기를 하지는 않았겠지만, 대충 저런 맥락이었던 것 같다. 옆에서 보고 있던 내가 끼어들만한 상황은 아니었던 것이, 난 1이랑 친해진 다음에 2를 알게 된 상황이었고 2하고는 안면은 있고 친하게 지내긴 해도 가깝게 지내는 사이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두사람은 이미 불이 붙어서 활활 타오르는 상황이었다. 그때 내가 중재를 해줬다면 두 사람이 저렇게 절교하지는 않았을 수도 있었겠지만 당시의 나는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뭐, 1과 2과 지금 다시 연락을 하고 만나는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지금은 내가 1하고는 가끔 연락하고 2하고는 연락이 끊겼는지라, 1에게 직접적으로 물어보기가 곤란하기 때문이다.

    아무튼간에, 위와 같이 그냥 웃고 사과하면서 넘어갈 수도 있었던 대화들이지만 상황에 따라서 어감에 따라서 점점 대화가 까칠해지고 공격적으로 변해가는 것을 볼 수가 있다. 어느 한쪽이 상대방을 먼저 이해했더라면 저렇게 파국으로 치닫지는 않았겠지만 당시에는 어느 한쪽도 이해를 선택하지 않았다. 양쪽 모두가 공격을 선택하는 바람에 둘 다 상처입고 절교를 선언한 것이다. 나는 여기서 1과 2중에 어느 한쪽을 비난할 생각도, 양쪽 모두를 나쁘다고 말할 생각은 없다. 단지 이렇게 된 상황이 아쉽고 안타까워서 글을 적어두는 것이다.

    공격적인 대화로 변질되어 갈 때에, 상대방하고의 관계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다.

    1. 말하다가 느낌이 이상한 걸 파악해야 한다.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객관적으로 보자. 이때 객관적이라는 것은, 적어도 자신의 마음 상태를 아는 것이다. 자신이 화가 나 있는건지, 감정적으로 들떠 있는 건지, 지금 이 말을 왜 했는지를 생각해야 한다. 만약 방금 내뱉은 말을 두고 “내가 이 말을 왜 했지?”라는 후회가 든다면 이 상황은 공격적 대화를 하는 상황이다. 이게 잘 안된다면, 상대방이랑 대화를 시작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생각하면 된다.

    2. 공격적 대화를 하는 상황이라는 것을 파악했다면, 우선 심리적 방어선을 두른다. 다시 말해서, 상대방이 어떤 얘기를 하더라도 그 발언을 그냥 단어의 연속으로 받아들이고 상대방의 감정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것은 상대의 얘기에 감정적으로 대응하지 않고 객관적으로 대응하는 것을 위한 준비 작업이다.

    3. 상대방이 빨리 대답하기를 재촉하더라도 생각한다. 느긋하게 생각할 여유는 없겠지만 아무리 급하게 대답하는 상황이라도 최소한 30초에서 1분 사이의 여유는 있다. 그게 안된다면 상대방이 계속 얘기하게 놔두고 상대의 감정 상태를 파악하는 것이 좋다.

    4.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파악해야 한다. 일단 상대방이 내게 얘기하는 것이 나의 “대답”을 기대하는지부터 파악해야 한다. 그냥 들어주기를 바라는지, 나의 대답을 원하는지. 그냥 들어주기를 바란다면 추임새 “아, 그래” 정도를 넣어주면서 진지한 태도로 들어준다. 만약 나의 대답을 원한다면 그것이 충고/조언인지, 응원/격려인지, 동정인지를 상대의 상황을 짐작하면서 대답해야 한다. 이것을 파악하지 못하겠다면, 일단 파악 될때까지 계속 듣는다.

    5. 내가 말하고 싶어지는 바로 그 순간이 있을 것이다. 이때 말하고 싶은 것을 그대로 입 밖으로 내뱉어 버리면 대부분 후회한다. 말하고 싶은 것을 머릿속에서 말해봐라. 그리고 머릿속에서 후회한 다음에, 머릿속에서 더 좋은 말을 생각해서 그것을 말해야 한다.

    1번부터 5번까지 얘기를 했는데, 이것은 한번에 모두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단계적으로 수행하는 것이다. 즉, 4번이나 5번을 못하더라도 3번까지만 잘 하고 있다면 안전한 대화를 할 수 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라도 최소한 1번은 가능해야 한다.

    촌철살인이라고, 내가 무심코 던진 단 한마디 말이 상대방의 마음속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 수가 있다. 그 순간 대화는 교류가 아니라 전쟁이 된다. 상대방은 상처받은 것을 숨기기 위해서, 또는 치료받기 위해서, 또는 더 큰 상처를 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내 마음에 비수를 박아야 한다. 그것을 막으려면 상대방이 내던지는 비수를 받아서 내 마음의 핵심이 아닌 다른곳에 꽂히게 하고, 내가 상대방에게 던지는 비수는 칼날을 잡고 손잡이를 내미는 것이 필요하다.

  • 1 followed by 100 zeros 무슨 뜻인가요

    문득 리퍼러 로그를 보다보면 희안한 검색어로 들어오는 친구들이 있다.

    위의 제목에 적은 “1 followed by 100 zeros 무슨 뜻인가요”라는 것도, 다음 검색으로 들어오려고 시도한 것 같은데 정작 그 리퍼러를 찍어보면 검색 결과가 없다. 대체 어떻게 들어온 거지?

    아무튼, 다음번의 검색에서는 성공하기를 바라며 1 followed by 100 zeros 의 뜻을 해석해 준다.

    우선 저것은 하나의 문장이 아니라 하나의 명사와 그것을 수식하는 형용사구로 이루어진 단어이다. 왜냐하면 followed가 동사가 되려면 뒤에 목적어가 와야 하는데 아무것도 없이 전치사구가 왔으므로 동사가 아니라 분사라는 점을 알 수 있다. 해석하면 “1을 따르는 놈이 있다”

    followed의 의미상의 주어는 by뒤에 있는데 100 zeros면 100은 zeros를 수식하는 형용사이고, zeros가 명사다. 즉 100개의 zero를 의미한다. zero는 숫자로서의 0을 의미하므로, 0이 100개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최종적으로 완성하면 저 명사구의 의미는

    1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0

    또는 $10^{100}$ 이다.

    다른 영어 표현으로는 10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of billions 을 쓸 수도 있겠다.

    위키피디아를 보면 공식적인 영어 이름은 짧게 줄여서 ten duotrigintillion 이고, 전통적인 영국식 표현은 ten thousand secdecillion이다. 그리고 그 외의 유럽에서는 ten secdecilliard 라고도 한다.

    그리고 이 숫자는 한단어로 googol이라고 한다. google이 아님에 주의!

    참고 :

    http://www.google.co.kr/search?hl=ko&rlz=&q=googol

  • 장애아 낙태

    생각해 보니, 장애가 예상되는 태아를 낙태시킨다는 생각은 장애인에 대한 처우 개선을 생각하지 않고, 장애인을 없애는 것으로 장애인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생각이 밑바탕에 있는 것 같다.

  • 인생, 지르고 보는 것

    “지름신”이라는 단어가 유행이다. 언제부터인지, “지름”은 우리에게 친숙한 단어가 되었다.

    어떤 탐나는 물건을 보면 “지름직하다”고 한다. 그리고 “질러라!”가 익숙한 구호이다.

    “지르다”라는 동사의 어원은 “저지르다”에서 “저”가 탈락되어 나타난 것 같다. 어딘가에서, 물건을 살까말까 큰 고민을 하다가 “결제 단추를 누르는 짓을 저질렀다”라는 문장이 축약된 것으로 생각된다. “저질러 버렸습니다”라는 동사에서 “저”라는 첫글자를 주어의 겸손형으로서의 “저 질러 버렸습니다”로 바꾸었다가 다시 주어를 생략하여 “질러 버렸습니다”로 변형된 것 아닐까 하는 소설을 써 본다.

    “지름직하다”, “지름직스럽다”는 표현은 “지르다”라는 동사를 형용사 형태로 변형한 것 같다. 저 단어는 “바람직하다”와 “지르다”가 혼합되어 나타났다고 생각된다.

    원래, 지르다는 표현은 돈을 주고 물건을 구입하는 상황에서만 사용하는데 요새는 그 의미를 확장해야 할 것 같다.

    그렇다. 인생은 (저)지르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 무지개

    질문이다.

    일단 모든 붉은색을 띄는 물체는 빨간색을 반사시키거나 투과시키는 것으로 같은데

    전기코드 스위치를 켜면 나는 빨간색 불빛과 빨간 색연필에서 나오는 빛은

    암만 봐도 차이가 너무 많잔아요?

    뭐때문에 이런 차이가 생기는 거죠?

    http://www.askhow.co.kr/commonboard/ah_view_ru.asp?idx=1009&no=5252&page=1

    언어의 단절성은 위와 같은 단순한 질문을 만들어 내게 한다.

    저 질문은 사실 물리학 영역의 질문이 아니라 언어학이나 기호학이랑 관련된 질문이다.

    우리는 무지개를 “빨주노초파남보”의 7가지 색으로 구별한다. 미국에서는 6가지 색이라고 한다. 노란색에 대해서, 우리나라는 “노랗다, 누렇다, 노르스름하다, 노리끼리하다, 노릇노릇하다, 샛노랗다” 등등, 여러가지로 표현할 수가 있다. 이것은 언어의 한계인데, 우리가 노란색이라고 부르는 하나의 색깔은 특정한 파장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다.

    진동수 89.1MHz를 가지는 전자기파만 딱 정해서 “KBS 2 FM”이라고 부를 수는 있지만, 590nm의 파장을 가지는 전자기파를 “노란색”이라고 정해서 부를 수는 없다.


    노랑

    은 565

    nm

    ~ 590nm 정도의

    파장

    을 갖는

    가시광선

    이 갖는

    색상

    이다.

    위키피디아

    노란색의 정의는 위와 같이 영역으로 정해져 있지 하나의 파장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그리고 565nm의 노란색과 590nm의 노란색은 분명 다른 노란색이다. 그리고 590nm보다 파장이 길어지면, 그땐 노란색 아닌가? 591nm는 노란색이라고 부를 수 없을까? 아마 우리 눈에는 591nm의 파장을 가진 전자기파도 노란색으로 보일 것이다.

    우리가 “오늘”이라고 부르는 시간과 “내일”이라고 부르는 시간 사이에는 “자정”이 있는데, 그 자정이라는 시간은오늘의 24:00:00이기도 하면서 내일의 00:00:00이기도 하다. 시간은 그냥 연속적으로 흐르지만 인간은 그것을 구별하기 위해서 거기에 이름을 붙이고 어느 한 순간을 끊어서 규정한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우리는 그 개념을 다룰 방법이 없는 것이다.

    자연에 대해서 얘기할 때, 자연의 많은 현상과 법칙들은 연속적인 것을 다룰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는 불완전하여 그것을 연속적으로 다루지 못하고 분절된 개념으로 다뤄야 한다. 빨간색과 노란색은 본질적으로 같은 특징을 가지는 전자기파이지만 파장이 다르기에 다른 개념으로 다뤄지는 것이다.

    언어는 사람이 생각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기본적인 도구이지만 인간이 생각하는데 한계를 제공하는 주범이기도 하다.

  • 블루오션은 찾는게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원래 소비자의 수요는 공급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수요만큼만 공급해서는 남들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제조업체들은 항상 “이건 당신에게 꼭 필요하답니다”라고 광고하여 없던 수요를 만들어 낸다. 좋게 말하면 틈새시장이라고도 하고, 블루오션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TV, 계산기, 컴퓨터, 자동차, 휴대전화 등등, 인간을 위한 편의기구이긴 한데 원래 없어도 사는데는 별 지장 없다. 하지만 공급을 위한 수요를 창출해낸 뒤, 저 물건들은 생활 필수품이 되었다. 나 역시 인터넷에 중독되어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사람이니, 뭐라 할 말은 없다.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오픈웹 운동이라는 것을 들어보았는지 모르겠다. 간단히 말하면, 온라인 금융 거래를 운영체제에 상관 없이 가능하게 하자는 운동이고, 현재

    http://www.openweb.or.kr

    에서 소송을 제기하는 작업을 진행중이다. 오픈웹 운동이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나라의 온라인 결제 시장이 MS윈도우즈 위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ActiveX를 사용하지 않으면 보안이 엉망이 되는 것으로 착각하는 사람과, ActiveX만이 유일한 보안 대책인 것으로 아는 사람과, ActiveX로 밥벌어 먹고 사는 사람들과, 시장을 정복하려는 MS의 의지가 대한민국에서 활짝 꽃피워서 일어난 결과이다. MS에서도 예측 못했을 정도의 MS 독점 체제는 전 세계적으로도 이미 유명하다.

    이러한 일이 아직도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금융 거래를 위하 사이트가 윈도우즈 전용이어야 하는 이유를 “윈도우즈 이외의 운영체제에 대한 지원은 시장성이 불투명하다”고 한다. 아하, 다시말해서 돈이 안되니까 못 만들겠다는 것이로군. 응, 타당한 이유다. 돈이 안되는데 굳이 지원할 필요가 없지. 자본의 목적은 더 큰 자본을 만들어 내는 것이고, 따라서 돈이 되지 않는 일을 굳이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우리나라의 모든 은행 사이트는 MS윈도우즈에서 인터넷 뱅킹을 사용할 수 있다. 다시말해서, 윈도우즈에서 돌아가는 인터넷 뱅킹은 이미 모든 수요를 채웠다는 뜻이다. 전문용어로 “레드오션”이라고 부른다. 물론, 이쪽 수요는 수수료 장사만으로 쏠쏠한 벌이가 되는 황금알을 낳는 거위와 같은 시장이다. 즉, 한번 크게 투자하여 기반 구조를 닦아두면 그 다음부터는 큰 재투자 없이 계속해서 수익을 낼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처음에 지적했듯이, 자본은 항상 이미 있는 수요만으로는 공급량을 모두 소비할 수가 없다. 즉, 레드오션에서 나오는 수익으로는 자본의 욕심을 채울 수가 없다. 따라서 자본은 새로운 블루오션을 찾아내야만 한다. 눈을 돌려라. 그 시장은 윈도우즈 바깥에 있는 것이니, 윈도우즈가 아닌 운영체제를 지원하게 되면 그쪽 유저들의 눈을 당신에게로 돌릴 수 있는 것이다.

    자세히 살펴보자. 한국에 딱 두개밖에 없는 은행인 A은행과 B은행이 둘 다 윈도우즈에서 인터넷 뱅킹을 지원한다. 한국 국민들은 인터넷 뱅킹을 모두 윈도우즈에서만 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에서 윈도우즈가 아닌 운영체제를 쓰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실제로 쓰는 사람들보다 많다. 쓰고싶어도 여러가지 문제때문에 사용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A은행이 리눅스와 맥에서의 인터넷 뱅킹을 지원한다고 하자. 그럼 B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사용하던 사람 중에서 리눅스를 쓰고 싶어하던 사람들의 눈을 A은행으로 돌릴 수 있다. 더불어, A은행은 최초로 리눅스/맥의 인터넷 뱅킹을 지원하는 은행이라는 것을 광고할 수 있다. 최소한, 인터넷 뱅킹을 하기 위해서 MS윈도우즈를 사야만 하는 사용자들을 배려한다고 광고할 수 있는 것이다. PC만 있으면 리눅스는 구할 수 있을테니, 추가비용이 들지 않는, 저렴하고 경제적이라는 측면을 부각하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A은행을 주거래 은행으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A은행의 비 윈도우즈 부분의 선점 효과에 의해서 늘어난다면 A은행은 B은행보다 시장 점유율에서 앞서 나갈 수 있게 된다.

    물론 A은행이 윈도우즈가 아닌 운영체제를 지원하기 위해서 들여야 하는 돈이 아까울 수도 있다. 들인 돈 만큼의 수익이 나지 않을 것이 예상되기 때문에 아직 지원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언제고간에 시장은 포화되는 법이다. 윈도우즈 시장이 포화된 이후, 거기서 나오는 수익으로만 만족할 것인가? 그렇기엔 경쟁이 너무 치열할텐데 말이다. 눈을 돌리라는 것이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서 나오는 수익만 바라보다가 다른 은행이 리눅스 시장을, 맥OS시장을 선점해 버리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군다나 이미 벌어들이는 수익에 비교하면 투자해야 할 돈은 그다지 많지 않다고 보여진다.

    다시한번 강조하지만, 우리나라에서 윈도우즈가 아닌 운영체제를 위한 시장은 미개척 분야다.

  • 들리지 않는 vs 보이지 않는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과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의사소통하기 위해서 어떤 방법이 있을까?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수화를 배우는 것은 극히 어려울 것이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말을 하기는 극히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귀가 들리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든 말하기를 배우고,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든 수화를 배운다면 둘 사이의 의사소통은 마치 영어로 말하고 한국어로 대답하는 것과 비슷한 논리로 가능할 것이다.

    좀 더 쉬운 방법이 없을까?

    *최근 이런것이 개발되었다고 하여 덧붙인다.

  • 블로그 링크의 효과

    블로그 링크를 설치한지 이틀 지났는데, 하루 평균 400~500명 정도 오던 방문객이 600~700명으로 늘어났다.

    이거 괜찮은 시스템인 것 같다.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여, 대략 1만명 정도의 블로거를 유치할 수 있다면 상당히 의미있는 결과를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 모든 블로거가 win-win을 고를 수 있는 전략이 된다.

  • 바뀐 세상과 생존이 걸린 문제

    세상이 변했다. 옛날처럼 앉아서 받아먹는 세상은 끝나가고 있다.

    “환상속의 그대” – 서태지와 아이들

    결코! 시간이 멈추어 줄 순 없다 요!

    무엇을 망설이나 되는것은 단지 하나뿐인데

    바로 지금이 그대에게 유일한 순간이며

    바로 여기가 단지 그대에게 유일한 장소이다.

    단지 그것 뿐인가 그대가 바라는

    그것은 아무도 그대에게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나 둘 셋 LET’S GO 그대는 새로와야 한다.

    아름다운 모습으로 바꾸고 새롭게 도전하자.

    그대의 환상.그대는 마음만 대단하다.

    그마음은 위험하다 자신은 오직

    꼭 잘될거라고 큰소리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 그대가 살고있는 모습은 무엇일까.

    세상은 요! 빨리 돌아가고 있다

    시간은 그대를 위해 멈추어 기다리지 않는다

    사람들은 그대의 머리위로 뛰어다니고

    그대는 방 한구석에 앉아

    쉽게 인생을 얘기하려 한다.

    환상속에 그대가 있다.

    모든것이 이제 다 무너지고 있어도

    환상속엔 아직 그대가 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진짜가 아니라고 말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이 노래를 부를 때부터 이미 시작되었던 것일지도 모르지만. 받아만 먹는 세상은 끝나가고 있다.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결합되고 확산되며 모든것의 자본화가 가속되면서, 자기 몫을 알아서 찾아먹지 못하는 사람들은 죽게 되는 사회가 되어간다. 자기 몫을 찾지 못하는 것이 선천적으로 가진 자신의 신체적 장애이든, 부모가 물려주지 못하는 재산 때문이든, 가질 거 다 있어도 인간이 못나서 그렇게 되었든 세상은 신경쓰지 않는다. 자기 몫을 찾든지 말든지는 책임이 없어도 자기 책임이 된다. 누구를 탓하고 싶어도 탓할 사람이 없고, 탓할 사람이 있어도 탓하는게 무의미하다.

    정치를 보면, 대선이 다가오면서 아주 많은 사람들이 끓어 오르고 있으며 누구든지 누군가를 씹지 못해 안달이다. 나 역시 인터넷과 언론을 지켜보고 있으면 누군가를 씹고 싶어 미치겠건만, 씹어봐야 그 당사자가 아파할 것 같지도 않아서 귀찮아진다. 노자가 그랬더라. 국민들에게 좋은 것을 보여주지 않으면 그들은 평생 좋은 것을 보지 못할테니 현재가 가장 좋은 줄로 알고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각주:

    1

    ]



    그러나 현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너무나 좋은 것을 바라고 있다. 그것이 어떻게 좋고, 왜 좋고, 어떻게 하면 얻어지는지 모른 채로 좋은 것만 바라보고 있다. 그리고 정치인들은 자신이 그 좋은 것을 국민들에게 줄 수 있다고 하며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한다. 누구를 믿어야 할까.

    경제를 볼까. 주가는 오르는데 신문에 나오는건 어떤 투자자들이 피해를 보았는지에 대한 소식이다. 경기불황을 부르짖고, 현 정권이 욕먹는 이유는 물가 인상을 잡지 못한 것이고 경기 침체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현 정권이 무능한 것일까? 그렇게 욕을 하는 사람들은 결국 자신이 피해를 보았기 때문에 욕을 하는 것일까. 그럼 그 피해가 자신의 무능과 집착에 의해 나타난 것인지 정부의 정책 실패로 나타난 것인지 생각해볼 정신은 없을까. 100억대 재산가가 주식 투자 실패로 99억을 날린 것과, 하루에 간신히 만원 버는 사람이 버스 타고 다니느라 하루에 2천원을 사용하는 것은 어느것이 더 큰 손해일까. 버스요금이 100원 오르면 두사람 중에서 누가 눈물을 흘려야 할까.

    제 몫을 찾지 못하는 것이 스스로 타고난 운명인 것을 남들이 어떻게 해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 남들은 자기 먹고살기 바쁘기 때문이다. 어떤 인간이든, 또는 어떤 생명이든 자신이 살자는 것을 막을 수는 없으며 이것은 어떠한 타인의 생명보다 중요하다.



    [각주:

    2

    ]



    그렇지만

    자기 먹고살기에도 도움이 되고 그렇게 제 몫을 찾지 못하는 사람들을 도울 수도 있는 방법이 있다면 기꺼이 선택하겠는가?

    이조차 하지 않겠다면 당신은 참 나쁘다.

    그렇다면 내가 그다지 위대하거나 똑똑한 사람은 아니지만 아주 짧게 생각해 보건대, 당신과 당신 주변과 당신이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해 본다면 어떻게 생각하는가? 내가 하는 얘기가 헛소리거나, 틀렸거나, 맘에 안들거나, 싫다면 맘대로 해도 좋다. 당신의 선택은 내가 신경쓸 문제가 아니다. 난 단지 내 얘기를 할 뿐이다.

    내가 제안하는 방법은 아주 간단하다.

    정치에 참여하라.


    이것이 시작이고 끝이다.

    정치에 참여하는 실천 방법론은 그다지 어렵지 않다.

    무엇이 정치인가? 정치라는 단어는 한자어로는 “바르게 이끌어 나간다”는 것이고, 사람들이 흔히 쓰는 뜻으로는 “여의도와 청와대에서 싸우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실제로 정치는 참여하는 것이다. 이제 대선이 다가온다는데, 당신이 죽기 싫고 살고 싶다면 가서 투표해라. 누구를 뽑느냐는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다. 그건 나랑 아무 상관 없다. 하지만 누군가의 정책이 자신을 배고프게하고 아프게 했다면, 아니면 그렇게 할 것이 예상된다면 거침없이 욕을 하고 씹어라. 정치는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거대한 힘을 갖고 있고, 그것은 당신의 참여로 완성된다. 행동하지 않으면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누군가 굶어죽어가고 있어도 “나 여기서 배고파 죽어요”라고 말하지 않으면 눈길조차 주지 않는 싸늘한 시대다. 자신이 아는 것이 있고, 자신이 생각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반드시 드러내야 한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피투성이가 되어 싸우는 건 마찬가지다. 어차피 정치판은 수백년 전부터 만신창이였다. 그러나 옛날에는 왕을 욕하면 죽는 시대였지만 지금은 대통령을 욕해도 아무도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 얼마나 세상 좋은가.



    [각주:

    3

    ]



    썩어빠진 세상을 그냥 썩었다고 생각하지 말고, 세상에 마지막 남은 유일하게 진정한 양심을 가진 당신이 움직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 말이 누굴 때리거나 폭탄을 터뜨리라는 뜻은 아니다. 말로 하라는 거다. 말로.

    먹고 살기 바쁠수록 참여해야 한다. 직접 민주주의 시대에는 모든 사람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당신 하나가 빠지더라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잘했지만, 간접 민주주의 시대인 지금은 모든 사람들이 참여하지는 않기 때문에

    참여한 사람들의 의견이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의 의견을 대변하지 않을 수 있다.

    따라서, 진짜 먹고 살기 바쁜 사람들일수록 정치에 관심을 갖고 투표도 하고 정치인들을 씹기도 해야 한다. 안그러면 갈수록 먹고 살기 힘들어질 것이다.


    한줄요약 : 투표하세요

    1. 이것이 노자 철학의 본의가 아님은 물론 알고 있다. 이 문장은 노자의 철학을 일부러 왜곡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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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그렇기에 자기희생을 통하여 다른 사람들을 살리는 사람들이 위대한 것이며, 그들은 존경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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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지금 대권 도전하는 아저씨들, 당첨된 후에 대박으로 욕먹을 것은 각오하고 하는 거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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