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대학 동기중에 한명은 굉장히 강력한 세계관을 갖고 있다. 그는 어떤 말을 하더라도 그 세계관을 바꾸지 않는 철옹성 같은 정신세계를 유지하는데, 주변 사람들은 그에게 얘기를 할 때 항상 답답해서 미치려고 한다.
ATM기계에서 영업 외 시간에 현금을 인출하려면 수수료가 붙는다. 그런데 영업 외 시간의 경계선이 오후 5시인지 오후 6시인지 항상 헷갈리는 일이다. 그래서 5시 30분쯤에 돈을 찾으려고 하는데 수수료가 붙는지 안 붙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얼마 필요하나고 했더니 5만원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친구 왈, “우선 만원을 뽑아서 수수료가 나오는지 안나오는지 보고, 나머지 4만원을 뽑겠다”라고 한다.
하여, 이를 긍휼히 여긴 또다른 나의 친구가 그를 붙들고 15분동안 칠판에 도표를 그려가며 설명을 해 줬다. 즉, 어차피 수수료가 붙으면 한번에 5만원을 뽑는게 낫고, 수수료가 안붙으면 역시 한번에 5만원을 뽑는게 낫다. 만원 뽑아보고 나머지 4만원을 뽑으면 수수료가 두배 나간다는 점을 상세하게, 예를 들어가며, 초등학생도 이해할 정도로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나서 그 친구는 이해를 했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ATM기계로 가서 만원을 찾아와서는 “수수료 붙잖아!”
…그러니까, 지금까지 그 얘기를 했다는 거라니까.
아무튼, 그런 친구가 있다는 얘기를 언제고 해보고 싶었다.
양자역학에서 단조화 진동자(harmonic oscillator) 문제를 풀 때는 보통 포텐셜 에너지를 변위 제곱에 비례하는 항으로 놓고 풀게 된다. 대부분 학부 3학년 1학기때 배우는, 쉬운 문제다. 그런데 하루는 이 친구가 단조화 진동자 문제를 풀다가 갑자기 나랑 같이 있는 연구실 선배한테 찾아와서 “이 문제가 잘 안풀립니다”라고 질문을 시작했다. 그 선배는, 굉장히 친절한 선배라 1시간동안 상세하게 설명을 해 줬다. 뭐, 초등학생이 이해할 정도까지는 아니었겠지만, 내가 옆에서 대충 들어도 참 쉽고 자상한 설명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는 이해했다는 듯이 고맙다고 인사하고 나갔다. 그러자 그 선배가 “아니, 왜 하모닉 오실레이터 문제 푸는데 중력이 왜 들어가?”
그 질문이란…
“이 문제를 제가 붙들고 해봤는데 아무리 해봐도 답이 안나와서요”
“어떻게 했길래?”
“여기다가 이렇게 중력 항을 고려해야 하는거 아닌가요?”
“그게, 중력은 넣을 필요가 없고…”
…그리고 설명. 1시간 경과.
“네, 알았습니다”
뭐, 대략 이런 정도였는데.
그 이후 한시간쯤 후에 그 친구 다시 왔다는 것이 문제다.
“아무리 해도 안 풀리는데요”
“아니,왜?”
“중력을 넣지 않으면 문제가 안풀리는데요”
“그러니까, 중력은 없어도 된다니까”
다시 한시간동안 설명.
뭐, 아무튼, 나중에, 이 문제가 숙제였기 때문에 그 레포트를 그 선배가 채점했는데, 틀렸다고 한다. 중력을 고려해서. -_-;
결국 그 선배는 양자역학 시험 전날, 학생들의 수많은 질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바로 그 친구의 질문이 두려워서 집에 일찍 들어갔다.
스타 크래프트를 하다가 본진 털리고 있는데 앞마당에 포톤캐논 지으면서 좋아하는 친구다.
**주의** 이 얘기는 스타크래프트를 좀 할줄 알아야 나름 웃기기라도 할 수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