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일상

  • 세월호 8주기

    그 끔찍했던 참사가 벌써 8년이 지났나보다. 그 사고와 희생자들을 끝까지 기억하고, 다시는 재발하지 않도록 할 것을 약속했지만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기억하는 것 뿐이었던 것 같다. 부끄러운 노릇이다.

    어떤 사람들은 문재인이 세월호 사건 “덕분에” 대통령이 될 수 있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문재인을 지지하기는 하지만, 만약 세월호 사건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다면 문재인이 대통령이 되건 말건 그건 중요치 않은 일이다. 수백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익사한 끔찍한 사건은 대통령이 누가 되든지간에 있어서는 안되고, 무슨 일이 일어났다고 해도 그에 감사해서는 안된다. 감사할 일이 아니라, 참회해야 할 일이다.

    그 이후로 수년간, 그리고 결국 올해까지, 끔찍한 안전사고들은 수없이 일어났다. 그런 사고는, 사람이 사람을 의도적으로 죽이려고 하지 않았지만 단지 어떤 사고가 일어난 자리에 있었다는 것 만으로 죽어야만 했던 사람들의 마지막 감정과 공포를 생각해 보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는 터졌고, 사람이 죽었다.

    이런 사고들은 누구도 의도하지 않았던 사고이고, 아무도 책임지지 않으려고 하다가 벌어진 사고이기에, 책임은 사회 전체가 지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그러다보니 개개인에 대한 책임은 희석되고, 책임감은 옅어지고, 결국은 자신이 먹고사는 문제보다 우선순위가 뒤처져서 해결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부디. 또 이런 비극이 반복되기 전에, 아직 일어나기 전에, 아직은 괜찮을 때 사람들이 안전대책을 확실히 지키고, 각 사업장에서는 안전수칙 준수를 납기 준수보다 훨씬 우선에 두는 분위기가 정착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누군가 손해를 봐야 한다면, 힘없는 약자들보다는 돈 많은 윗선에서 직접 책임을 지고 손해를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사업하다가 이익이 나면 다 가져가면서, 사고가 나면 책임과 손해는 남의 것이라니, 이상한 일이다.

    앞으로는 이런 비극적인 사고 소식이 들려오지 않기를 바라며. 세월호 희생자들과, 그리고 그 이후로도 여전히 위험했던 사업장에서 일하다가 돌아가신 분들의 명복을 빈다.

  • 위험한 과학책

    이 책은 매우 재미있는 책이다. 과학책 치고는.

    저자인 랜들 먼로는 NASA에서 일하던 엔지니어였지만, 언제부터인가 xkcd에 과학 카툰을 그려서 인기를 얻었다. 물론 나도 xkcd의 카툰을 매우 좋아한다!

    “감기 전멸시키기”라든가 “다 같이 레이저 포인터로 달을 겨냥하면” 같은 엉뚱한 질문에 과학적으로 진지한 답변을 하는 전공자의 모습. 이것이 바로 내가 추구하던 생활밀착형 과학자의 모습이었고, 그는 바로 그런 좋은 사례다.

    이 책을 얼마나 찬양해야 적당할지는 모르겠지만, 넘쳐나는 교양과학책들 중에서 재밌게 읽히는 것으로는 상위권에 있다. 말랑말랑한 설명과 아주 조금 들어있는 수식이 잘 어우러져 있고, 저자의 카툰이 이해를 돕고 있어서 엉뚱한 질문에 대한 과학적 대답이 무엇인지 잘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이 책을 샀다면 책의 속표지와 커버 안쪽까지 꼭 살펴보기를 바란다. 재밌게 볼 수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낀 점은, 역시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저자가 굉장히 친절하고 재밌는 사람이기 때문에 엉뚱한 질문에 친절하게 답을 해 주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질문 그 자체가 없었다면 이렇게 재미있는 이야기는 나올 수 없었다. 즉, 아무리 엉뚱하더라도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사람들의 대답과 반응을 이끌어내는 가장 좋은 길이고, 랜들 먼로는 그렇게 해서 자신만의 좋은 컨텐츠를 만들어낸 사람이다.

    어떤 질문이라도 좋다. 일단 질문을 던지는 것이 중요하다. 과학 이야기만 하긴 했지만, 꼭 과학이 아니더라도 질문은 중요한 법이다. 질문하지 않으면 발전할 수도 없다. 당신이 더욱 더 발전하고 싶다면 질문을 던지자. 이런 책도 좀 읽으면서.

  • 예의 없는 친구들을 대하는 슬기로운 말하기 사전

    이번에 읽은 책은 “예의 없는 친구들을 대하는 슬기로운 말하기 사전”이라는 다소 긴 제목을 가진 책이다. 분류상으로는 초등학생을 위한 책이지만, 내 평가로는 글자를 읽을 수 있는 모든 사람들, 특히 어른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은 책이다. 왜냐하면 예의 없는 친구들은 초등학생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어른들에게 더 많이 있으며, 예의가 없는 어른들은 예의가 없는 초등학생들보다 훨씬 더 큰 문제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이 책의 첫 꼭지는 “친구가 자기 생각만 맞다고 고집할 때”인데, 이 말을 듣는 순간 엄청나게 많은 정치인들이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를 것이다. 아, 누구라고요?

    굉장히 다양한 상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예를 들어서 설명해주고 있는데, 가령 “친구들이 회장선거에 나가라고 추천하는데 나가기 싫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몰라서(…) 나가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나는 이 책이 분명 어른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솔직히 내가 돈이 좀 있었으면 여러권 사다가 지지하는 정치인들한테 선물해주고 싶다. 1만3천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은 김영란법에도 걸리지 않고, 예의 없는 사람들 중 가장 문제가 되는 것이 예의 없는 정치인들이기 때문이다. 설마하니 초등학생도 읽을 수 있는 쉬운 책을 보고서 도저히 실천하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없겠지.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굳이 정치생각을 하다니 정치에 빠진 어른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 책은 정치인이나 특정 어른들을 대상으로 한 책이 아니다. 어린 친구들이 예의 없는 어른으로 자라지 않도록 쉽고 재미있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나는 이 책을 우리 모두에게 추천한다.

  • 당신이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다카하타 이사오는 유명한 애니메이션 감독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에서 여러 명작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다. 이 책은 그가 전쟁에 관하여 이야기한 내용을 담은 책이다.

    다카하타 이사오가 공습에서 경험한 일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책이 시작된다. 그곳에서 얼마나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어쩌면 일본인이 겪은 전쟁의 피해에 대해 이야기 하고 있다. 하지만 단지 일본인을 피해자로 적은 것이 아니라, 전쟁에 적극적으로 가담했던 가해자이면서, 동시에 그렇게 되어버린 피해자임을 어느정도 객관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특히, 이 책의 마지막 장인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에서는 일본이 다시 전쟁을 할 수 있는 나라가 될 수 있으며, 그때는 또다시 비극이 벌어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평화헌법 9조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고 있다.

    ​한국도 나날이 험악해져가는 동아시아의 정세 속에, 그 한가운데에서 국방력,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힘쓰고 있는 만큼 언제 어떻게 전쟁에 휘말릴지 모르는 법이다. 당연히 국토수호를 위한 군사력은 필요하지만, 과연 군사력 강화만이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일까? 대화와 교류로 평화롭게 위기를 헤쳐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

    ​이 책의 가격은 1만 5천원으로, 책의 두께에 비해서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다. 하지만, 이 책의 내용을 생각하면 결코 비싸지 않은 가격이라고 생각한다. 다카하타 이사오의 글과 유성운 번역가의 번역문은 쉽고 친절해서 아마 당신이 독서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해도 단숨에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의 유일한 문제점이라면, 너무 얇고 작다보니 서점의 책꽂이에서 눈에 잘 띄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글자 크기를 키워서라도 책을 좀 두껍고 크게 만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작은 아쉬움이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지구의 어딘가에서는 전쟁이 계속되고, 전투가 벌어지며, 사람이 죽고 다치고 피해를 입고 있다. 결국 사람이 일으킨 전쟁을 멈출 수 있는 것은 사람일 뿐이니, 부디 전쟁을 하지 말자는 분위기가 전세계에 퍼지기를 바란다. 나도 노력할 것이다.

  • 장애인들의 이동권보장 시위에 대한 짧은 생각

    https://news.naver.com/main/read.naver?mode=LS2D&mid=shm&sid1=103&sid2=240&oid=421&aid=0005989278

    장애인들의 이동권보장 시위에 대해서, 시민을 불편하게 만들면서까지 시위를 해야 하느냐는 의견이 있는 것 같다.

    https://n.news.naver.com/article/028/0002584363?ntype=RANKING

    사람의 이동권이란 여기서 저기로, 원하는 때에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는 권리이다. 너무나 기본적인 이야기지만, 이동권이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점에는 모두가 동의할 것이다. 오죽하면 범죄에 대한 처벌로 감옥에 가둬서 이동권을 제한하는 것을 사용하고 있겠는가. 인간의 기본권이라는 말은 모든 인간이 보편적으로 갖고 있으며, 누구에게도 함부로 제한될 수 없는 권리라는 뜻이다. 그러므로 범죄자에게는 법적 절차를 거쳐서 제한하는 것이다.

    이번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이동권보장시위는 바로 이 기본권을 누릴 수 있도록 보장해 달라는 주장을 하기 위해 발생하였다. 그 과정에서 지하철의 운행을 방해해서 사람들이 불편함을 느끼게 되었다. 장애인들이 이동하기가 불편하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인데 꼭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어서라도 그걸 알려야 하는가? 바로 이 부분이다. 누구나 다 알지만, 공감하지는 못하고 있다. 장애인들이 지하철 운행을 방해해서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도록 만든 것 자체는 타인에 대한 권리침해다. 하지만, 여기서 그 의도를 살펴본다면, 장애인들은 그런 권리를 누리기가 어렵다. 권리를 누린다기보다, 행사하기가 어렵다. 즉, 매일같이 숨쉬듯이 이동할 수 있는 사람들과 숨을 참는듯한 느낌으로 이동해야 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커다란 경험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런 사람들에게, 시민들에게 불편함을 주지 말고 자신의 뜻을 알리라는 말이 정당화 되려면 대부분의 장애인들이 이동권을 보장받을 수 있는 충분히 많은 방법이 있어서 매우 일시적으로 제한된 이동권조차 보장하라고 주장하는, 그런 경우에나 가능할 것이다. 장애인들 입장에서는 이동권이 제한된 부분을 생각하면, 반대로 그런 장애가 없는 사람들이 자신에게 매일 불편함을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의도하지 않았다고 변명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99%정도의 사람들이 모두 휠체어를 타고 다닌다고 생각해보자. 지하철이든 버스든 모두 휠체어 사용에 적합하게 개발되고 운용되고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왜 모두가 낸 세금을 소수자인 장애인들에게 사용해야 하느냐고 묻는다. 더 많은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 사용할 수 있는 것 아니냐면서. 어찌보면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것도 이상한 말이다. 세금은 바로 그런 곳에 쓰라고 걷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기업이라면 장애인들을 애초에 고객으로 생각하지 않고 어떤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국가는 그럴 수 없다. 장애인들도 국가의 시민이며, 국가는 모든 시민에게 빠짐없이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여야 한다. 적어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장애인들에게 이동권을 보장하려는 노력을 포기한다면, 그것은 장애인들은 국가의 시민이 아니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은 뜻이라는 말이다.

    시위를 하는건 좋은데, 왜 하필 사람들이 가장 바쁜 출퇴근 시간에 꼭 그렇게 해야 하느냐는 항의도 있을 수 있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숨쉬듯이 이동하는 사람들에게는 숨을 참듯이 이동해야 하는 사람과 이해할 수 없는 경험의 간극이 있다. 이건 마치 호흡기 전염병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걸린 사람들에게, 바이러스 배출하지 않도록 숨을 쉬지 말라는 것과 같다. 그만큼 말도 안되는 주장이라는 뜻이다.

    어딘가의 당대표는 장애인들이 자신을 선의로 포장하며, 남들에게 장애인에 대한 배려를 강요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 글을 여기까지 읽은 분들은 앞에서 내가 이동권이라는 기본권은 숨쉬는 것과 같다고 말한 것을 알고 있을텐데, 그렇다. 장애인들은 지금 마치 “나도 숨을 쉰다”는 주장을 하는 중이다. 편하게 숨쉬고 싶다는 걸 배려에 대한 강요로 해석한다면, 어떤 사람들이 불편하게 숨을 쉬어야만 하는 기준이 있을까?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이 불편하게 이동해야만 하는 기준이 있을까? 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는 그런 기준이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 기본권을 누리지 못하게 하려면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닌 경우하고 범죄자에게 법적 절차를 통해 제한하는 경우가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이동권이 보장되는 것이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이동권을 보장해달라는 주장은 따라서 타당하다.

    한편, 일반 시민에게 장애인들이 배려를 강요한다며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지 말라고 하는 주장도 굉장히 불평등한 주장이다. 장애인들 입장에서는 일반 시민들이 장애인들의 이동을 불편하게 만들고 있으며, 장애인들에게 배려를 강요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가 배려를 강요하고 있는데, 한 편의 강요는 정당하고, 다른 편의 강요는 부당하다는 주장은 불평등할 수밖에 없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만약 99%의 인구가 휠체어를 타고 다녔다면, 이동권 보장을 주장해야 하는 쪽은 휠체어를 타지 않는 쪽이다.

    그렇다면 예를 들어 인구의 99%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상황에서, 휠체어를 타지 않는 사람들은 배려를 바라지도 않고,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을 것이라고 해 보자. 그럼 모든 사람들이 불편함 없이 이동하는 바람직한 상황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 상황에서 인구의 99%가 휠체어를 탄다는 그 사실이 중요할까? 이 때 중요한 부분은 휠체어를 타고 있든 아니든 모두가 불편함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은 누구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고, 지금은 현실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해도 그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은 다른 불편함이나 다른 차별에 비해 우선순위에서 밀리고 있으니, 다른 부분을 먼저 해결하고나서 여기에 노력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도 있을 수 있다. 물론 사안의 우선순위에 대해 누구라도 그런 의견을 말할 수는 있으나, 장애인들에게 그런 의견을 가져야만 한다고 강요할 수는 없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일, 자신의 문제가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안 그런가?

    나는 다른 의견 중에서, 모 버스회사에서 불편하게 만든 것을 왜 지하철에 가서 시위를 벌이며 엉뚱한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드느냐는 것도 본 적이 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건 이동권 보장시위다. 장애인들이 문제가 된 그 버스회사까지 편리하게 갈 수 있었으면 애초에 이런 시위 자체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나도 장애인들이 이와 같은 시위를 하는 구간을 지나갈 때는 매우 불편함을 느낀다. 바쁘고 급한데 그렇게 길이 막히고 이동이 막히면 불편하다. 하지만 도로위의 교통체증으로 늦어지거나 지하철 기계장치의 고장으로 늦어지는건 남들을 배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고 누굴 탓하지 않으면서, 장애인들의 시위에만 그렇게 투덜대는 것은 이기적인 태도 아닐까? 좋다. 그렇다면 적어도 하나만큼은 인정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하고 있는 당신은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그걸 알고도 계속 주장하는 사람은 뻔뻔하고 이기적인 사람이라고. 인정할 수 없다면, 장애인들의 시위를 돕지는 못해도, 적어도 비난하지는 말았으면 좋겠다. 당신이 이기적인 사람인데 장애인들이 이기적이지 않아야 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 차량운행 제한속도 상향

    목적지 도착시간은 속도가 50이나 60이나 별 차이가 없다. 한강다리 길이를 대충 1킬로미터라고 하면, 50일때 1분 12초 걸리던 것이 60일때 1분 걸리는 것으로, 12초 절약되는 수준이다. 만약 길이 막혀서 시속 50킬로미터 이하로 달리게 된다면 제한속도는 아무 의미가 없다.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아서 시속 60킬로미터 이상으로 달린다면 어떤 경우든 과속이므로 제한속도는 역시 아무 의미가 없다.

    한강다리를 12초 일찍 건너서 뭐 얼마나 원활해질런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정책이 효과를 보려면 도로의 대부분이 길막힘 없이 제한속도에 딱 맞게 달릴 수 있어야 하는데 알다시피 서울시 도로의 대부분은 길이 막힌다.

    서울 전지역에서 제한속도를 50에서 60으로 올린다고 해도 별로 의미 없긴 마찬가지다. 가령, 서울시의 한쪽 끝에서 다른쪽 끝까지 60킬로미터정도 간다고 하면 시속 50일때 1시간 12분 걸리고, 시속 60일때 1시간 걸린다. 그나마 이것도 길이 전혀 막히지 않았을 때의 이야기고, 어차피 길은 막힐테니 12분 일찍 갈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운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이번엔 사고가 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사람이나 자동차나 아무튼 차량의 속도가 20%만큼 증가했으니까 충격량도 20% 증가할 것이다. 사고가 났을 때 충격당한 대상에 들어가는 충격이 20% 증가한다는 것은, 당연히 그만큼 손상이 더 크다는 뜻이다. 쉽게 말해, 부러져도 20% 더 부러지고, 휘어져도 20%만큼 더 휘어진다는 말이다.

    운동에너지는 속도의 제곱에 비례하므로, 20%만큼 증가한 속도에 대해 운동에너지는 44% 증가한다. 그만큼 에너지 소비가 늘어난다. 자동차에서 일어나는 에너지 손실은 어쨌든 자동차가 가진 운동에너지에 비례하기 때문에, 차량의 운동에너지가 커졌다는 것은 그만큼의 에너지 손실도 크다는 뜻이다. 따라서, 친환경에 역행하는 정책이다.

    시내 자동차 제한속도를 시속 50에서 60으로 올렸을 때 좋아지는 것은, 20%만큼 더 신나게 달릴 수 있다는 점에 약간 더 좋아지는 기분밖에 없을 것이다. 뭐….. 바로 그걸 원하는 거라면 여기서 더 할 말은 없다.

    https://news.naver.com/main/ranking/read.naver?mode=LSD&mid=shm&sid1=001&oid=001&aid=0013074793&rankingType=RANKING

  • 잘 살아가다, 잘 살아간다

    예전에 연구소에서 만난 후배가 있었다. 매우 뛰어난 친구였고, 연구원으로써 실력과 열정과 직관을 모두 갖춘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성실하면서 인간적으로도 모범이되는, 편견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일방적으로 칭찬할 수밖에 없는 친구였다. 내가 대전으로 오고나서, 그 친구도 외국의 좋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부럽기도 하면서 그 친구의 장래가 굉장히 기대되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슬픈 결말을 맞는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휴가를 얻은 그는 평소 취미로 삼던 등산을 위해 유럽의 어느 험한 산에 올라갔다가, 날씨의 급변으로 조난을 당한 후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온갖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 힘든 상황에서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지, 그의 열정은 어째서 거기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는지, 학계는 우수한 과학자 한명을 잃은 것이고 나는 매우 인간적인 후배를 잃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몇 해가 지나서, 나도 대학원 생활에 찌들어가다보니 차츰 대충 하고 포기하거나, 힘들다고 투덜대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투덜대고 있을까? 하지만 그 생각은 그가 이루지 못한걸 하고 있는 나를 다행으로 생각하라며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나에게 전해준 것은, 그 친구는 어쨌든 단 한순간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운명은 그를 너무 이르게 데려가 버렸지만, 그가 연구를 선택한 것도, 유학을 간 것도, 마지막이 된 등산을 간 것도 그렇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그 때까지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일련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서 극적으로 내 태도가 바뀌거나 습관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상황도 아니지만, 결과가 어떻든 나의 자유로운 선택들이 나를 이렇게 끌고 왔다. 물론 내가 힘들어하는 것에 자책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나의 안과 밖에서 살펴보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지만, 그 원인을 누구에게 책임을 미룬다 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원망도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대학원에 온 것은 누가 강요해서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나를 잘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렸던 것을 내가 강행해서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후회하기보다는 지금 힘든 것을 뚫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면서 나를 바꾸고 상황을 바꿔나가는 것이 지금 해야 하는, 다시 할 수 있는, 나의 선택이다.

    결국 나의 대학원 생활도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다는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당연히 마음이 힘들고, 몸도 힘들다. 그동안 상처받은 마음은 그 보상을 받지 못했고, 피로해서 허약해진 몸은 즉시 회복이 필요하다. 취업을 하기에는 커리어가 꼬였고, 특별히 자랑할만한 전문기술도 없이 경력도 없이 그냥 10년이 지나간 것이다. 물론 집안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아마 지금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과거의 어떤 시점과 비교해도 지금이 더 바닥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나에게는 무언가가 남아있었는데, 아주 약간의 금전적 여유가 남아있고, 대학원에서 빠져나온 덕분에 마음의 안정이 되돌아오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지금부터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었다.

    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 친구가, 만약에 살아서 돌아왔다면, 그 결과로 어떤 부상을 입고 장애가 생겼다면, 그래서 연구를 그만두게 되었다면, 그 친구는 그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아마 상심하고 좌절했겠지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서 다시 도전했을 것 같다. 이제 나에게 “그렇다면”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도 다시 도전하는 것이 어떨까. 무엇을 도전이라고 할 것인지는 말하기 나름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뭘 해도 바닥에서 올라갈테니 그 모든 것이 다 도전 아닌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그 친구에게 감사하며,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 잘 못 버림

    나는 물건을 잘 버리지 못한다. 그렇다고 저장강박이 있는 것 까지는 아니지만, 한번 사용하기 시작한 물건을 끝까지 다 쓸 때까지 새것을 뜯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볼펜을 하나 사용하기 시작하면 그 잉크를 다 사용할 때까지 다른 볼펜은 쓰려고 하지 않는다. 신발도 한번 신기 시작하면 밑바닥이 모두 닳아서 구멍이 날 정도가 되어야 버리고 새로 산다. 좀 더 깔끔하기보다는, 좀 더 오래쓰고 싶은 어떤 심리가 무의식중에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이유는 설명할 수 없지만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약간의 습관이 코로나 대유행 시국에 도움이 되는 부분이 있다. 비누도 앞에서 말한대로 하나를 다 쓸 때까지 다른 것을 뜯지 않는 편인데, 그래서 새로운 비누를 사용하고 싶으면 지금 쓰던 비누를 빨리 써버려야만 한다. 그렇다보니, 결벽증이 있는 것은 아님에도 불구하고 평소보다 손을 자주 씻게 되었다. 물론 이 습관이 개인 위생에 도움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약간의 편집증적인, 히스테릭한 어떤 습관이라고 하더라도 환경을 적절히 만난다면 도움이 되는 경우도 있다. 좀 더 확대해석한다면, 사람의 어떤 모습은 그저 어떤 모습일 뿐, 장점이나 단점이라고 단정지을 수 없다. 다만, 그 사람이 어떤 환경에서 어떤 상황을 마주치고 있느냐에 따라 좋게도 나쁘게도 보이는 것이다.

    장자는 그의 철학에서 쓸모가 없음의 쓸모 있음을 이야기하였다. 이리저리 구부러지고 투박한 나무는 아무데도 쓸데가 없지만, 덕분에 천년을 살아남아서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인간들이 나무를 베어서 무언가를 만들지 않았다면, 구부러지든지 곧게 펴져있든지 상관 없이 모두 천년을 살아남았을 것이다. 무엇이 가진 어떤 속성이라도 환경과 상황에 따라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좀 힘든 상황이긴 한데, 계속해서 관점을 바꾸면서 좋은 측면을 바라보고, 상황을 바꾸면서 장점이 되도록 하고, 좋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을 고집하지 않고 좋지 않음을 좋게 볼 수 있는 국면으로 전환시켜나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겠다는 뜻이다.

  • 돈아돈아 (조pd)

    돈없이는 죽고 못살고 인간들아 인간들아 인간들아
    인간의 영원한 아미고 동시에 영혼을 좀먹는 암이고
    돈 있는 놈은 영 아니고 그렇다고 꼭 없어야 착한 것 만은 아니고
    모르겠다 못 살겠다 아이고 돈에 지지 않는 것이 사나이고
    항상 부담감도 줄지 않고 쌓이고 얼래 남의 일같이 얘기만 하고 있네

    원래 아닌 척 고개를 설레설레 한 이천 있으면
    또 헐래벌래 할 수만 있다면
    좀 벌래 벌래

    그래서 내 나이 들었을 때 딱 왠지 남의 떡이 커보이는
    시시한 무례한 대안 개떡이 되지 않게 만일 돈과 찰떡같은 인연이라면
    일생 떵떵 거리며 살테니 좀 베풀지 그래
    자 이리나 주십쇼 오십쇼 가십쇼 딱딱 해주는 게 내가 할일이냐

    멋진 쇼 준비하는 것이 내가 할 일이냐 돈 벌어라 룰루랄라
    저기 한라산까지 돈을 높이 쌓아라
    그런 니 영혼은 점점 말라 맨날 신경쓰니
    몸도 비쩍 말라 그런 생각들은 이제 말라

    chrus)
    종이야 종이 저기 봐 저기 우리네 가정이
    인간간의 정이 들리는 과정이 다 종이야 종이
    내 친구 한종이가 종이야 종이 (x2)
    종이야 종이 종이야 종이

    정신차려 감정이 그까짓 종이에 팔려서야 말이 되니
    종이 챙기기 종이에 정신팔기
    땡전한 푼 없이 살고싶은 이가 어딨겠어
    그렇다고 돈이 헤픈 사람이 될 이유도 없어
    쓸 돈 몇 푼 있는 건 좋은거지

    남들이 거지같이 느끼게 오바해서 혐오감이나
    절대 상대적인 빈곤감 따위로 괴롭히지
    않는다면 무슨 해야 남의 돈 쌥치거나 등쳐먹고 빌어먹고

    그러고도 그림같은 집을 짓고
    사랑하는 너의 돈과 한평생 살지 않는 다음에야 무슨 해야
    자연스레 버는 돈은 하늘에 은혜야 이미 복잡해져버린 사회야
    없어야 깨끗하다는 건 자해야 이제까지 들었으면
    자 여기부턴 Ray Jay 차례야

    Ray Jay)
    돈 많이 버는 사람 많이 버는 대로 쥐꼬리 만큼 버는 사람 버는 대로
    그런대로 나름대로 살아갈 수 있는데도 좀 더 모으고 보자는 너의 시도
    돈 때문에 부모도 죽이고 아무도 몰래 손내미는 건 바로 니네 이모
    종이야 종이 종이야 종이 라고 해도 자꾸만 왜 그러니 왜 또?

    이웃친구 아무도 없고 너 혼자만 잘 살면 되고 아뭏든 맞먹어두 go
    어차피 인간이 만드는 건데 누가 니 무덤에다 그 돈 넣어준데?
    돈을 많이 money 많이 버는 것이 다는 아니지만은 할 건 아주 많지
    좋은 집 좋은 차 보기 좋은 여자 눈만 마주치면
    그 여자 자지 말래도 자

    근데 이렇게 생각해보자 네 지갑 속에 돈 떨어지자마자
    죽었든 살았든 좆돼 보이든 말든 하여튼 아뭏든 난 몰라 몰라 도망 가
    네 눈 앞에 보이는 그건 바로 그건 돈이 아니라 종이라는 거
    아니 종이만도 못한 돈이 있다는 걸 알아주길
    올바른 사고 속에 살아주길

    많니? 돈이 그렇다고 삶이 니 맘대로 되니
    아직 늦지 않았으니 이제 마음 고쳐먹지
    저기 보이니 백원짜리 쥐고 뛰어가는 아이
    혹시 다시 그런 기쁨으로 살아갈 순 없니?


    돈아돈아
    조PD

  • 능력자 배틀물에 대한 단상

    예나 지금이나 싸움구경은 재미있다. 그러다보니 문학, 만화, 영화 등 스토리를 전달하는 장르에서도 사람들이 서로 원하는 것을 놓고 다투는 내용이 흔히 다뤄진다. 특히, 그중에서도 능력자 배틀물이라는 장르는 나에게 가장 흥미로운 장르 중 하나이다.

    능력자 배틀물이란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 서로 싸우는 이야기를 말한다. 사람들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다투는 것 자체는 능력자 배틀물이 아니어도 많이 있지만, 가령 돈을 버는 이야기라든가, 그런 것들은 현실의 물리법칙에 기반한 능력과 현상을 이용하기 때문에 싸움의 진행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된다는 특징이 있다. 이것이 좋은가 나쁜가를 떠나서, 일단 우리는 현실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현실을 기반으로 한 싸움의 추세를 예측하는 것 역시 익숙하며, 결말이 어떻게 나오든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는 무리가 없다.

    하지만 능력자 배틀물에서는 자연현상이 아닌, 초자연적인 능력을 갖고서 싸우는 이야기가 다뤄진다. 이렇게 되면 사람들은 새로운 현상이 어떤 논리로 작동하는가에 대해 생각을 해야 하고, 이것은 이전에 알지 못했던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예를 들어,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이 등장한다면, 높은 곳에서 떨어졌을 때 땅에 떨어져 죽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날아서 살아남고, 이 능력으로 다른 일들을 할 수 있다는 결말이 가능하다.

    능력자 배틀물은 결국 판타지의 한 분야인데, 판타지는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설정과 이야기를 도입하여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주는 장르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는 내용이라고 하더라도, 그 안에서 인물들의 행동은 충분히 개연성이 있고 있을 법한 내용이어야 한다. 즉, 어떤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을 갖는다는 것은 일어날 수 없지만, 그런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이 하늘을 날아다니면서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납득할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는, 하늘을 날아다니는 사람과 매우 높이 뛰어오를수 있는 사람이 싸운다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에 대해서도 설득력있게 제시되어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특성은, 현실에 없는 것에 대해서 어떤 설정과 상황을 상상하고, 그에 대해서 어떤 결과가 가능한지를 검토한다는 점에서 수학과 맞닿아 있는 부분이 있다. 수학 역시 공리계를 도입해서 어떤 대상을 다룰 것인지 제안하고, 그 대상들을 갖고서 어떤 일들을 할 수 있는지 설명하는 학문이기 때문이다.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대상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수학은 보다 현실에 쓸모있는 결론들을 많이 이끌어 낼 수 있는데 그것은 수학의 구조가 현실의 구조를 닮아있기 때문이다. 즉, 현실의 대상들을 수학적으로 정의하고, 다시 거기서 얻은 결론을 현실에 적용할 수도 있다.

    능력자 배틀물 등의 판타지 소설도 마찬가지로 현실에 존재할 수 없는 이야기지만, 현실에 적용할 수 있는 결론들을 끌어낼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양영순의 ‘덴마’는 개인적으로 굉장히 좋아하는 작품 중의 하나인데, 이 작품은 군상극으로써, 각 개인들의 선택이 세계 전체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맞물려서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를 어느정도 설득력있게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덴마’에서 제시하는 세계에서도 대기업이 있고, 탐욕스러운 권력자가 있고,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빈민이 있는데, 이런 인물들이 그 세계에서 어떤 행동과 선택을 하는지에 따라 어떻게 인생이 변하는지를 제시하고 있으며, 만약 내가 그 세계에서 살고 있다면 나는 어떤 상황이고, 나는 어떤 선택을 했을지에 대해 독자에게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독자로 하여금 생각을 하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이런 특징은 다른 능력자 배틀물인 ‘엑스맨’, ‘어떤 과학의 초전자포’, ‘나의 히어로 아카데미아’, ‘원펀맨’ 등에서도 비슷하게 보인다. 각 작품에서 주어진 상황과 설정은 다르지만, 각 인물들이 자신의 능력을 갖고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싸워나간다는 점은 비슷하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인물들이 서로 갈등을 겪으면서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 역시 현실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과 매우 닮아있다.

    그러므로, 이런 능력자 배틀물 작품들 역시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는 않더라도 현실의 모순을 비틀어서 다른 방향으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하는 설정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을 뒤집어서 살펴볼 수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