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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부류의 인간
이 세상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행복한 사람들과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
.
행복한 사람들은 그 행복을 얻기 위해서 얼마나 노력을 했으며
,
그 행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또 굉장한 노력을 한다
.
행복하지 못한 사람들은 또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역시 노력을 한다
.
이렇게
,
행복을 위해 사람들이 많은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은 행복하면 참 좋기 때문이다
.
사실 이 세상에 행복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없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
그러나
,
행복한 사람은 한정되어 있고 불행은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다
.
불행해지면
“
이건 꿈일거야
”
라며 빨리 꿈에서 깨고 싶어하지만 이것은 이미 현실이다
.
차라리 행복한 꿈속이 낫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
하지만 바로 이것이 현실이고 진실이다
.
어떻게 해도 지금 당장 이 상황을 벗어날 수는 없고
,
노력한다고 해도 힘들다
.
불행은
,
노력하지 않으면 절대로 사라지지 않는다
.
아무리 노력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된다면
,
그것은 이미 노력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
억울하겠지만 결과가 나타나지 않은 노력은 그렇게 큰 환영을 받지 못한다
.
어떻게든 해서 이 불행으로부터 빠져나가지 못하면 더욱 더 깊은 불행에 빠질 뿐이다
.
노력한다면 반드시 좋은 결과가 있다
.
그것을 믿자
.
불행하게 되고 싶어서 불행해 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했다
.
그러나 불행해 졌다
.
자기 탓일 수도 있고
,
어쩌면 다른 사람의 탓일 수도 있다
.
그러나 남의 탓이라고 책임을 회피하고 다른사람이 대신 책임져 줄 때까지 마냥 주저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그 불행은 절대 변하지 않는다
.
나의 불행을 바꿀 사람은 바로 나밖에 없다
.
나의 인생을
,
나의 한번뿐인 인생을 바꾸는 것은 다른 무엇 아닌 바로 나 자신의 힘이고 나 자신의 노력이다
.
인생 속에는
,
일생동안 단 한번뿐인 엄청나게 큰 행운이 있다
.
아직 않았을지도
,
또는 벌써 지나가 버렸을지도
“
모른다
”.
언제 올지도
“
모른다
”.
미래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르는 것 투성이인 미지의 세계이다
.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것이다
.
불운을 행운으로
,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은 어쩌면 평생동안 노력해도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
그렇지만
,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불가능하지만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희망에 기대고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
죽는 그날
,
즉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살아있어야 한다
.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 아까우니까
,
기껏 태어났는데 불행해지면 억울하니까
.
다른 사람 때문에 불행해 졌다고 그래서 책임져 줄때까지 기다려서는 안된다
.
원인이 무엇이든
,
어떤 이유에서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다
.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아이처럼 울어보기도 하지만 변하는건 아무것도 없다
.
나 자신이 변해서 그것을 시작으로 이 세상을 바꿔 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
다른 누가 사는것도 아닌
. “
나
”
의 삶
.
아직도 남아있는 그 수많은 꿈들을 버리기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아깝다
.
지금까지의 시간이 너무 아깝다
.
사람들은 모여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간다
.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혼자서 살아가는 것이다
.
사람들이 도와주지 않는다고
,
아무도 나를 봐주지 않는다고 해도 포기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
물론
,
사람들은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서로가 서로를 도와주며 살아가야 하겠지만 나 하나 몸 건사하기도 바쁜데 다른 사람의 불행까지 도와줄 여유가 없는 것도 사실이다
.
남을 도와주는 것도 결국은 여유가 있어야 도울 수 있는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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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싶었던 이야기
*왜 적었는지 모르겠는 글 중의 하나.
제가 하고싶은 말은 별다른 이야기가 아닙니다
.
다만
,
인생을 포기하고 싶어지는 사람들에게
,
스스로가 불행하다고 믿는 사람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을 조금은 두서없이
,
그렇지만 분명하게 전달하고 싶을 뿐입니다
.
결코 풀수없는 방정식을 늘어놓고 낙제 시키는 걸 자부하는 사회
.
지금의 세상은 의문투성이의 비를 내리게 하고선
,
우산도 받쳐주지 않죠
.
병을 주고서 약은 주지 않는
,
이런 세상 속에 묻혀있으면
,
몽땅 어디론가 휩쓸려 가 버릴지도 모릅니다
.
이렇게 흐린 나날속에서 도대체 무얼 찾아 꿈을 그리라고 하는건지
,
참 안타깝습니다
.
다들 검은 캔버스를 눈앞에 두고 머리를 감싸쥐고 고민하며 살아가고 있겠죠
.
그러나
,
이대로는 숨쉬기만 할 뿐인 존재가 되어버릴지도 모릅니다
.
그래서 서두르는 마음에
,
발을 잡혀 넘어져도
,
혼자서 일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지만
,
그 속에서 내 존재를 외치고 싶어지죠
.
그래서 결국은 상처입는 것도
,
더럽혀지는 것도
,
피할 수 없습니다
.
이런 어둠을 빠져나가서
,
밝은 곳으로 가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
당신이 원하는 미래
,
여기 서서 주저주저 하고 있어도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습니다
.
자존심이라든가 장래를 생각했다면 도망치겠지만
,
오늘에 지고 싶지않다고 중얼거렸던 당신이 차라리 좋아요
.
세상은 넓고
,
할 일은 많고
,
인생은 짧습니다
.
하고싶은 일을 하지 않으면 죽기 직전에 아마 반드시 후회할 것입니다
.
그러나 그때 후회해 봤자 아무 쓸모 없습니다
.
죽기 전에
,
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당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
가장 즐겁게
,
가장 후회 없이
,
가장 하고싶은 일을 하는 것을 가장 우선으로 하는 삶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삶입니다
.
다른 사람을 위해서 평생을 봉사하면서 사는 것도 결국은 자기만족을 위해서 하는 봉사입니다
.
그렇게 봉사하지 않으면 자기 마음이 불편하기 때문이죠
.
어떤 인격을 갖고 있든
,
사람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할 때 가장 기쁨을 느낍니다
.
돈이 많으면 기쁜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
하고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힘을 돈이 제공해 준다는 것이겠죠
.
돈이 많아도 아무런 권력이 생기지 않는다면 누가 돈을 가지려 하겠습니까
?
돈 역시 자기만족의 도구일 뿐이죠
.
인생 속에는
,
일생동안 단 한번뿐인 엄청나게 큰 행운이 있습니다
.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
또는 벌써 지나가 버렸을지도
“
모릅니다
”.
언제 올지도
“
모릅니다
”.
미래는 우리에게 있어서 모르는 것 투성이인 미지의 세계
.
미래를 향해서 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새로운 세계를 탐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
불운을 행운으로
,
불행을 행복으로 바꾸는 것은 어쩌면 평생동안 노력해도 불가능할지도 모르지만
,
그래도 우리는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겠죠
.
불가능하지만 할 수 있다고 거짓말을 해서라도 할 수 있다고 믿어야 하겠죠
.
왜냐하면 우리는 그런 희망에 기대고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죠
.
죽는 그날
,
심장이 멈추는 그 순간까지 우리는 살아있어야 해요
.
지금까지 지나간 시간이 아까우니까
,
기껏 태어났는데 불행해지면 억울하니까요
.
다른 사람 때문에 불행해 졌다고 그래서 누군가 책임져 줄 때까지 기다려서는 그 어떤 것도 변화하지 않아요
.
원인이 무엇이든
,
어떤 이유에서든 내 인생은 내가 책임지지 않으면 아무도 책임져 주지 않는 거니까
,
원하는대로 되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고 아이처럼 울어보기도 하지만 변하는 건 결국 없죠
.
나 자신이 변해서 그것을 시작으로 이 세상을 바꿔 버려야 해요
.
다른 누가 사는 것도 아닌
. “
나
”
의 삶
.
아직도 남아있는 그 수많은 꿈들을 버리기엔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아깝지 않나요
?
고독하다고 느낄 때가 있겠죠
.
삶을 살다보면 세상에 나 혼자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겠죠
.
그 외로움은 다른 상처나 아픔에 비길 바가 아닙니다만
,
그 고독을 이겨내면 그 뒤에 실은 누군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겁니다
.
믿을 수 없겠지만
,
누군가 있습니다
.
가족일 수도 있고
,
친구일 수도 있고
,
또 다른 누구일 수도 있습니다
.
고독의 끝에는 반드시 누군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
아무도 나를 몰라준다고 생각해도
60
억의 사람 중에는 반드시 나와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
아직 만나지 못할 뿐
,
분명 있다는 것을 알아주십시오
.
사람들은 모여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갑니다
.
그래서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고도 하는데
,
그렇지만 본질적으로는 혼자서 살아가고 있어요
.
다들 알다시피
,
다른 사람은 절대로 나의 진심을 이해하지 못하고
,
나는 다른 사람의 진심을 절대로 알지 못해요
.
다만
,
대충 추측만 할 수 있을 뿐 그 얼굴 속에 가려진 진실된 모습은 어떤지 알 수 없죠
.
이런 사회에 있어서 필요한 것이 바로
‘
믿음
’
입니다
.
내가 믿고 있는 상대방에게
,
나는
‘
이런 마음
’
을 갖고 있다고 믿게 한다면 상대방이 나를 믿게 되고 우리 둘은 친한 친구가 됩니다
.
물론
,
그 마음이 거짓인지 진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
적어도 믿고 있는 동안은 친한 친구가 됩니다
.
세상을 사는건 정말 힘들지만
,
그래도 이렇게 믿을 수 있는 친구가 한두명 정도 있다면 가끔은 기대서 쉴 수도 있기 때문에 세상을 사는게 조금은 덜 힘들게 됩니다
.
친구를 사귑시다
.
친구가 없다고 해도
,
어차피 세상은 혼자 사는 세상
!
쓰러질 것 같은
,
포기하고 싶은 때가 있더라도 혼자서 일어서서 다시 앞으로 나갑시다
.
겨우
100
년뿐인 삶
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낸다면 당신 자신이 굉장히 비참해지지 않나요
?
죽고싶은 때가 있더라도
,
조금만 더 참고 기다리면 끝내는 문제가 해결될텐데 여기서 포기해 버리고 말 건가요
?
정말로
,
겨우
100
년입니다
.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되더라도
,
죽음보다 더 큰 고통이 찾아오더라도
,
그래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
이렇게 말한다면 곤란하겠지만
,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있어야 합니다
.
행복해 지기 위해서는 살아있어야 합니다
.
죽어서 행복해 진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겁니다
.
죽은 뒤에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하므로 죽어서 더 행복할 수는 없습니다
.
살아있는 것이 가장 행복한 거예요
.
아직 꿈과 희망이 있는 사람들은 그 꿈을 이루기 위해서 미래를 향해 열심히 추구해야 할 것이고
,
꿈도 희망도 없이 절망에 빠져있는 사람들은 가장 재미있는 일을 하면 되는 겁니다
.
그렇게만 한다면
,
아마도 죽을 때 후회하지는 않을 겁니다
.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까지 왔으면
,
절대로 후회해서는 안되는 게 삶이거든요
.
후회하지 않을 자신이 있다면
,
그 길을 선택하세요
.
그리고 일단 선택했다면 절대로 후회하지 마십시오
.
후회하면 그 순간 당신은 불행해 집니다
.
자신의 선택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더라도 그 나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을 생각해야지 후회만 하고 주저앉아 있다가는 상황은 더 악화되어갈 뿐입니다
.
더 악화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면 다시 일어서고
,
또 넘어져도 다시 일어서고
,
포기하라고 해도 포기하지 않는 정신이 있어야 해요
.
갖추지 못했다면 지금 결심하세요
.
이 글을 읽는 바로 지금 결심하세요
.
그러면
,
아마
100
년뿐인 인생에서 하고싶은 일을 하나씩 해 가면서 후회하지 않으며 살 수 있을 겁니다
.
그리고
,
동시에 행복해집니다
.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
사람의 삶은 깊은 수렁 속에 빠지기도 하고 가끔은 행복하기도 하다면
,
이 세상은 그저 살만합니다
.
만일
,
항상 고난만 계속된다면 그 고난에 익숙해져서 더 이상 힘들지 않게 되고
,
오히려 고난이 행복보다 더 즐거운 것이 될지도 모릅니다
.
반대로
,
항상 행복하다면 그 행복에 익숙해져서 그 행복이 행복인줄을 모르고 행복하지 않게 되겠죠
.
이것은 마치 마약과 같은 성질을 갖고 있어서 행복만 계속되면 더 큰 행복을 찾게 되고
,
그 행복이 끊어지면 금단증상이 나타나서 이 세상이 곧 끝날 것처럼 좌절해 버리고
,
작은 고난도 이기지 못 할 만큼 나약해 지기도 합니다
.
그러므로
,
지금 당신이 겪고 있는 고난은
,
당신에게 상처를 줄지도 모르지만 그만큼 당신 스스로를 더 강하게 해서 더 큰 고난이라도 헤쳐나갈 용기와 능력을 줍니다
.
그리고
,
사실
,
이제껏 이겨낸 고통보다 더한 고통이 오더라도
,
견딜 수 있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
어차피 살아있을 거라면
,
죽을 생각을 했던 바로 그 각오로 한번 도전해 보는 것도 좋아요
.
아무도 해보지 않은 일
,
나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
,
내가 정말로 해보고 싶었던 일을 해내면서 더욱 강해지고 더 큰 기쁨을 느낄 수 있죠
.
당신은 지금까지 누군가에 조종당하고 있었겠죠
.
인생따윈 꿈도 희망도 없고
,
그런 지금의 생활에 만족합니까
? ‘
운명은 자신의 손으로 바꿀수있다
‘
는 그런 드라마 같은 얘기는 정말 훌륭해요
.
그렇지만 이제는 말세처럼 여겨지는 매일매일에 대비해 슬슬 준비를 시작하는 건 어떤가요
?
쓸모없는 자존심
,
녹슬어버린 상식은 모두 벗어 던지고 당신을 위한 준비를
.
온 세상의 인기인이 되고싶고
,
빛나는 미래도 갖고싶고
,
정말 모든 꿈을 다 이뤄 버리고 싶다면
,
지금 당장 시작하는 겁니다
.
더 미루다가는 그때는 늦습니다
.
지금 당장 주눅들어있는 자신에게 이별을 고하고 자신 있는
‘
나
’
로 다시 태어나는 겁니다
.
닫힌 마음을 열고
,
서로 뜨거운 정열로 의지를 불태우며
,
어린시절에 꿈꿔온 나의 미래를 하나씩 이뤄가는 겁니다
.
후회하는건 절대 싫으니까
,
포기해서도 안되고 방해하게 할 수 없습니다
.
나는 나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 뭐든지 할거니까요
.
그러나
,
조금 조심하지 않으면 오히려 후회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
기분만 들떠서
,
하고싶다고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살다보면 그때는 꿈이고 뭐고 다 포기해야 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
자유의 의미를 착각하지 말아요
.
혼란스러운 지금의 이 상황
,
꿈을 잡고 싶다면 지금 당장 전력을 다해야 해요
.
기회는 한눈팔고 있으면 도망쳐 버린답니다
.
약간의 눈물을 번쩍이는 용기로 바꾸는
,
그 포기하지 않는 마음이 언젠가는 기적을 부를 거예요
.
당신만의 꿈
,
당신만의 미래
,
그것을 찾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해요
.
용기있는 사람이 기회를 잡습니다
.
단 한번뿐인 기회를 용기가 없어서 포기해 버릴 겁니까
?
좋은걸 좋다고 말할 수 있는 그 용기
,
한번 시도해 보십시오
.
용감하게 도전해 보십시오
.
성공하고 싶다면
,
스스로에게 자신을 가져야 해요
.
라이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금까지의 나 자신
.
스스로가 결정한 한계를 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뤄지지 않아요
.
상처입는걸 두려워 하지 맙시다
.
상처가 다 낫고 나면
,
더욱 강해진 자신을 볼 수 있습니다
.
사람은 상처를 입을 때마다 강해지니까요
.
상처입었을 때야말로
,
스스로가 싫어질 때야말로
분명 사람은 내일을 발견하게 되요
.
너무 힘들다면
,
때로는 멈춰서서 쉬는것도 나쁘지 않죠
.
다시 걸어나갈수 있는 그 날까지 쉬세요
.
인생의 주인공은 어차피 나 자신
.
강한 모습으로
,
영화도 그냥 단순한 해피엔딩은 재미없다는거 알죠
?
때로는 울고
,
상처입고
,
또 넘어지더라도
,
다시 일어서서 달려나가는 것이 정말 재미있는 겁니다
.
기도하세요
,
말은 모습을 바꾸는 법입니다
.
달려나가세요
,
믿고 있는 이 길을 바꾸지 말고서
.
그리고 붙잡으세요
,
당신이 원하는 그 꿈을
,
쓸모없는 자존심 같은건 저 멀리 던져버리고
,
눈앞의 그 꿈을
,
생생한 그 꿈을 붙잡는 거예요
.
행복의 모습은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달라요
.
다른 사람이 행복하다고
,
그것이 당신에게도 과연 행복할까요
?
다른 사람의 말에 현혹되지 말고
,
지금 말하는 저의 말에도 현혹되지 말고
,
당신만의 행복을 찾아서 길을 떠나십시오
.
모처럼 지금을 살고 있으니까
,
하고싶은 일
,
즐거운 일을 해야겠죠
?
다음에 돌아올 생애
,
내세 같은걸 기대하고 있을 순 없습니다
.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현실인 겁니다
.
혹시 모르죠
.
울분을 삭이며 걷어찬 돌맹이가 튀어서 되돌아올땐 다이아몬드가 될수도 있어요
.
당장 이룰수 있는 꿈따윈 꿈이 아니예요
.
하지만 그 꿈이 분명 이뤄질거라 믿고있어요
.
좌절하지 않는 당신의 모습이 참 좋아요
.
사람은 사람을 만나서 처음으로 사람이 되죠
.
지금 만난 건 우연같지만 우연이 아니니까요
.
당신이 강해지고 싶다면
,
상냥해지고 싶다면 좀 더 자신을 소중히 여기세요
.
그리고 다른 사람이 다정하게 대해주길 원한다면 좀 더 자신부터 남을 사랑하면 되요
.
쉬운 일이죠
.
그렇지만 또는 어려운 일일 수도 있습니다
.
당신 자신이 변하지 않는 한
,
아마 어려운 일일 겁니다
.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
많은 이유와
,
많은 추억 때문에 먼길을 돌아왔지만
,
그 무엇도 쓸데없는 일은 아니었으니까 후회하지는 마세요
.
스스로 선택해서 여기에 왔잖아요
?
나의 선택을 믿을 수 있다면 웃을수 있는 날이 올테니까
,
후회하지는 마세요
.
끝으로
,
심장이 멈출때까진 힘빠졌다는 말을 하면 안돼요
!
—
색칠한 부분들은 노래 가사에서 따온 부분이다. 이래놓고 보니 꽤 많구나. 옛날엔 남의 표현을 빌어오지 않으면 나의 이야기를 하지 못했었나보다.
대체로 하야시바라 메구미의 노래를 가져온 것 같은데, 원전을 찾으려고 하니 10여곡 정도가 되어서 포기.
-
한국인의 흑백차별
*왜 썼는지 이유를 알 수 없는 글.
한국 사람들이 백인에게 호의적인 이유는 역사적인 이유에서 그 연원을 찾아볼 수 있는데
, 6.25
사변 이후 황폐해진 한국에게 식량을 지원해 주고 그 이후로도 엄청난 원조를 해 준 국가의 주 인종이기 때문이다
.
국가 발전 과정에서 서양의 여러 가지 문물들을 받아들이며 당시의 한국의 제품보다 훨씬 좋은 서양의 제품을 보게 되었고 그런 제품을 개발하여 판매하는 서양의 백인들을 우월한 존재로 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
그리고 그때 받아들여진 감각이 현대의 사람들에게까지 전달된 것이다
.
또
,
황인종인 한국 사람에 비해서 더 하얀 색의 피부를 가진 백인들을 보면 그에 비해 한국 사람은 좀 더 지저분해 보였을 것이고 상대적으로 백인들은 깨끗하다는 인상을 가지게 됐을 것이다
.
그리고 주로 백인들이 많이 살고 있는 서양에 대해서는 많이 알려져 있다
.
그들은 흑인에 비해 높은 수준의 생활을 누리고 있으며 여러 매체를 통하여 이런 내용을 접하는 한국 사람들은 그 뒷면에 숨어있는 인종차별과 노예제도의 희생자인 흑인들을 생각하지 못하고 단지 백인들이 누리고 있는 멋진 문화만을 바탕으로 우리도 그렇게 그런 문화를 따라가야겠다는 생각만으로 백인들을 좋게 생각하고 백인들에 대한 일종의 환상을 갖게 된 것이다
.
한국 사람들이 흑인이나 동남아 지역 출신 사람들을 경멸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그들이 후진국 출신이라는 고정관념과 선입견이 박혀 있기 때문이다
.
물론 그들이 후진국 출신일 수도 있고 반대로 선진국 출신일 수도 있다
.
그러나 흑인들의 경우에는 현재는 미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이 많지만
,
학교와 방송에서는 흑인들이 아프리카의 오지에 사는 미개한 사람들인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
또
,
동남아 지역은 한국에 비해서 후진국이며 아직도 개발이 많이 필요하고 사람들의 생활 수준이 낮은 지역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
그리고 그런 오지인 곳에서 온 사람들은 당연히 한국인보다 미개한 사람인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대체적으로 이 지역 출신의 사람들은 한국인에 비하여 피부 색깔이 짙은 색이다
.
이런 색깔의 피부색은 한국에서는 오랫동안 정상적인 세면을 하지 못한 경우에 나타나는 색이어서 더욱 경멸하는 감정을 심하게 갖게 된다
.
한국사람이 스스로도 유색인종이면서 유색인종을 차별하는 태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선
,
백인도 아니면서 백인 우월주의와 그에 의해 비롯된 열등감에 빠지지 말아야 한다
.
백인은 백인일 뿐 그들이 다른 인종이나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어떠한 증거도 없다
.
한국인은 열등감에 빠질 필요도 없으며 백인을 경배할 필요도 없다
.
그들이 가진 여러 가지 특성 중 장점이 있으면 배우고 단점이 있으면 안 배우면 그뿐
,
다른 인종을 배척한 채로 그들에게 특별히 잘해준다거나 해서 좋을 이유가 없다
.
마찬가지로
,
흑인과 동남아 출신 사람들에게도 선입견을 가지지 말고 그들에게서 장점은 배우고 단점은 배우지 않으면 된다
.
우리 민족 역시 그들보다 나을 것도 없고 못할 것도 없다
.
백인 입장에서 보자면 황인이든 흑인이든 똑같은 유색인종이고
,
흑인 입장에서 보면 황인이든 백인이든 싫어하는 인종들이다
.
그러므로 어떤 시각에서 바라보는지에 따라서 달라지는 피부 색깔에 영향을 받지 말고
,
어떤 피부색을 갖고 있던지간에 서로를 알려고 노력하며 백인에 대한 환상과 흑인에 대한 선입견
,
동남아 사람들에 대한 편견을 버리고 모두 똑같은 인간으로써 대우하며 공존하면 그들과 우리들 모두에게 좋은 것이다
.
-
김유정의 ‘만무방’, 그리고 강경애의 ‘지하촌’ 감상
*고등학교 숙제로 제출했었던 내용이다.
만무방과 지하촌
.
모두 식민지 시대를 배경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
김유정과 강경애는 비슷한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이다
.
당시의 시대는 일제가 탄압을 차츰 강화시켜가고 그에 따라 우리나라의 독립운동도 계속해서 거세어 가던 시대였다
.
이런 시대상황에서 발표된 두 작품은 시대를 너무나도 잘 반영하고 있다
.
두 작품 모두 한 가정에서 일어난 일들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
불쌍한 농민들을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같다
.
만무방에서는 응칠
,
응오 형제와 함께 불쌍한 소작농들이 등장하고 지하촌에서는 칠성이와 칠운이
,
그들의 어머니
,
큰년이 등이 등장하는데
,
모두 식민시대의 삶을 살아가던 농민들이다
.
두 작품에서 농민은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없다
.
단지 암울한 현실과 타협하고 불행한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이렇듯
,
두 작품은 비슷해 보이기도 한다
.
그러나 여러 가지 면에서 차이가 있다
.
만무방은 현실을 반어적인 표현으로 마치 즐거운 일인양 표현하고 있고
,
지하촌에서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
만무방에서는 주인공 응칠이를 중심으로 농촌 사회의 제도의 불합리성과 모순
,
폭력성을 세밀하게 그려 보여 줌으로써 현실의 절박한 상황을 그리고 있는 작품이다
.
또
,
만무방에서는 응오가 자신이 애써 가꾼 벼를 자기가 오히려 도적질해야 하는 눈물겨운 상황에 놓인다
.
모범적인 농군을 반사회적 인물로 몰고 간 것은 그들이 살고 있는 시대적 상황 문이다
.
일년 농사를 짓고도 남는 것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 뿐이라는 현실은 당시의 소작농들의 상황을 잘 파악하고 있다
.
반면에
,
지하촌에서는 주인공인 칠성이의 행동을 통해서 당시 사람들의 삶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
그리고 칠성이가 병신 거지
,
큰년이가 장님이라는 설정은 특수한 상황으로 보여지지만
,
사실 그 시대에는 그리 특별하지는 않았던
,
흔히 볼 수 있는 장애인들이다
.
그리고 부잣집으로 팔려가는 큰년이와 칠성이의 아쉬운 사랑은 시대적 상황이 돈에 의해서 좌우돼는 현실이라는 것을 이야기 해준다
.
마지막 부분의 불운이 연달아서 일어나는 결말은
,
가난한 사람은 좌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
일제 시대에는 서민들의 삶이란 불행하기 그지 없었다
.
만무방의 응칠이와 응오의 이야기가 실재로 있었던 일일수도 있고
,
지하촌의 칠성이 같은 청년이 불쌍하게 살아갔을 수도 있다
.
이런 일이 실제로 있었거나
,
또는 없었거나
,
우리는 이 소설을 읽으면서 현실적으로 이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고
,
당시 사람들의 삶을 마치 현실인 것처럼 느낄 수 있다
.
리얼리즘의 극치다
.
우리는 이런 소설을 읽고서 일제의 탄압과 시대의 변화를 느낄 수 있으며
,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세상은 정말로 좋은 세상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
-
과학의 날 글쓰기
2000년에 썼었던 과학의 날 글쓰기.
1.
과학은 못하는 것이 없다
.
세상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을 설명할 수 있고
,
인간을 자유롭게 하며 편리하게 해 주었다
.
심지어는
,
전혀 손댈 수 없을 것만 같아 보이는 인간에 마음에 관하여서도 과학은 그 손을 대고 있다
.
우울증 치료제와 같은 정신에 작용하는 약이 등장하였으니 머지않아 인간의 감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 약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
아니
,
이미 기분이 좋아지는 약은
‘
마약
‘
이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서 남용되고 있는 것이다
.
아무튼
,
이렇게 볼 때 과학은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으며 인간을 최상의 존재로 끌어올리는데 큰 몫을 하였다
.
그러나
,
이러한 과학이 기술로 변하고 다시 이 기술이 공공복리가 아닌 사리
(
私利
)
를 추구하는데 악용된다면 과학은 인간을
”
인간이 최상의 존재로서 최상의 존재인 인간을 해치는
”
최악의 존재로 끌어내리게 된다
. ‘
과학
‘
은 인격이 없기 때문에 오직 과학이라는 것만을 두고 본다면 책임을 따질 수 없다
.
그런데 이것을 개발하거나 이용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나쁘게도 될 수 있고 좋게도 될 수 있는 것이다
.
앞으로 과학의 힘은 계속해서 강력해질 것이다
.
이제까지 계속 그렇게 되어 왔고
,
과학이 오히려 퇴보한 일은 역사적으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기에 앞으로도 과학이 계속해서 발전할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
그러나 발전해 나가는 과학 만큼 인간의 도덕수준이 발전하지 못한다면
,
그때는 원자폭탄 때의 수십만명의 수준이 아닌 인류 전체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
이런 관점에 대해서 좋은 예가 하나 있다
. ‘
라엘리안
‘
이라는 일종의 종교인데
,
인류 외계인 창조설을 주장하는 집단이다
.
이들은 현재의 인류보다
2
만
5
천년이나 앞선 외계 문명이 인류를 창조하고
,
이제 다시 인류에게 돌아와 그들의 앞선 문명을 전수하려 한다고 주장한다
.
다만
,
그들이 나타나지 않는 이유는 인간들이 아직
‘
우매하여
‘
서 그들의 진보된 과학을 받아들일 경우 그것을 이용하여 발전을 계속해 나가기 보다는 오히려 서로 다투다가 공멸하게 될 가능성이 더 높기 때문에 아직 전수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
그들의 비유를 빌리자면 이것은 어린아이에게 핵폭탄 발사 스위치를 넘겨주는 것과 같다고 한다
.
이들의 주장은 곧
,
도덕이 완전히 바로잡히지 않은 상태에서의 과학이란 서로를 죽일 수 있는 무기라는 것이다
.
이제
,
앞으로 과학이 무궁무진하게 발전해 나갈 것이다
.
그리고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
그러나 그에 걸맞는 도덕수준이 발달하지 못하고 과학을 개발
,
이용하는 자들이 공익을 위해 과학을 사용하지 않게 된다면 인류의 평화를 위해 차라리 과학발전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
.
인간이 인간을 위해 발전시켜온 과학이 오히려 인간을 멸망케 한다면 아무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
2.
생명공학의 발전에 의해 인간을 복제할 수 있는 방법이 개발되었다
.
그리고 이제 개발된 것에서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인간을 복제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
.
내가 마음만 먹으면
,
그리고 세포 몇 개만 제공하면 나와 똑같이 생긴 인간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
모두 똑같은 유전형질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
복제
’
들 사이에서는 장기이식도 마음대로 할 수 있다
.
그런데
,
이러한 인간복제라는 기술은 생명을 연장하고 질병을 더욱 잘 치료할 수 있다는 의료적인 면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이다
.
그러나
,
생명윤리적인 문제에 있어서는 너무나도 부정적인 면을 갖고 있다
.
우선
,
가장 큰 문제이면서 사람들이 곧잘 오해하는 개념이 있다
.
즉
,
복제를 하면 세포를 제공한 것도
‘
나
’
이고 거기에서 만들어진
‘
복제
’
들도
‘
나
’
라는 것이다
.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
복제된 인간은 절대로
‘
나
’
일 수는 없다
.
왜냐하면
,
우리는 그 복제된 인간들을 나라고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우리는
,
손끝에서 발 끝에 이르기까지 신체의 모든 영역에 걸쳐서 신경이 퍼져 있으며 이 신경에 의해서 몸을 움직일 수 있으며 신체 부위에 있는 그 감각들을 느낄 수 있다
.
그러나
, ‘
복제
’
에서는 그런 것을 움직일 수 없다
.
아무리 나의 복제라고는 하지만
,
내가 그 복제들을 나의 생각대로 움직일 수 있을까
?
불가능하다
.
신경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므로 그것은 결코
‘
나
’
로서 인식되지 못하는 것이다
.
또
,
나는
‘
나
’
의 생각을 알 수 있지만
‘
복제
’
의 생각은 절대로 알 수 없다
.
즉
,
아무리 유전자적으로 똑같은 형질을 갖고 겉모습도 완벽하게 똑같다 하더라도 복제된 것은
‘
나의 모습
’
일 뿐
‘
나의 영혼
’
은 아닌 것이다
.
그리고 복제인간을 만들기까지의 과정 또한 문제가 있다
.
체세포에서 핵을 꺼내서 수정란에 이식하는 과정은 말로 쓰자면 매우 간단하지만 실제로 그 과정은 매우 불안정한 작업이다
.
그래서 동물의 경우는 한 마리의 정상적인 복제가 태어나기 위해서 그 전에 무수히 많은 기형이 일어났다
.
만일
,
이대로 인간을 복제하려 한다면 한 명의 정상적인 복제인간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수많은 기형인간들이 필연적으로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
나의 생명의 근원인 유전자를 복제해서 만든 개체이므로 그 복제인간들 역시 하나하나가 생명을 갖고 있다
.
게다가 인간이다
!
중간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기형인간들을 어떻게
‘
처리
’
해야 할 것인가
?
아무리 기형이라 하더라도 인간인 이상 그들을 죽이는 것은 어디까지나
‘
살인
’
이다
.
아무튼
,
이 외에도 많은 문제점들이 있을텐데
,
이런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인간복제는 이미 시작되었다
.
인간이 인간을 만들어 내는 세상이 도래하게 되었다
.
그러나
,
아무리 똑같은 인간을 찍어낸다 하더라도 그 머릿속에 들어가게 되는 생각들은 모두 다른 것들이다
.
그리고 결국 그들은 모두 제각각의 인간들이 되는 것이다
.
인간복제는 이렇듯 윤리적으로 적합하지 않다
.
다만
,
미래에는 이러한 기술들을 더욱 발전시켜서 윤리적으로도 문제가 없는 기술을 개발해야 할 것이다
.
-
겉도는 국어정책
청소년들이 스마트폰 채팅이나 SNS등에서 비속어와 욕설을 사용할 수 없도록 하는 방안이 추진된다.
입력 내용을 검열하는 프로그램을 설치하도록 해서 근본적으로 차단한다는 것인데, 이것은 한가지 장점과 세가지 문제점이 있다.
첫번째 문제점은 이 조치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기본적으로 욕설과 비속어가 없으면 대화가 안되는 사람으로 커 왔는데 이런다고 애들이 욕설을 안쓸까?
두번째 문제점은 입력 내용 검열에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설명해 본다. “씨발”은 검열했다 치자. “sibal”은 어떻게 할 거임? 이것도 차단해 보자. 그럼 Ssibal, cibal, ccibal, scibal, sival, ssival, 10al, sib-al, si-bal, ……. 무한한 수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당장 내가 방금 생각한 것만 여러개가 있고, 원한다면 수십개도 찾아볼 수 있을 듯 싶다. 다 차단하려는 것인가? 그리고 표준어인 ‘시발’을 차단할 생각인가? http://krdic.naver.com/search.nhn?dic_where=krdic&query=%EC%8B%9C%EB%B0%9C
세번째 문제점은 그 결과 아이들의 외계어 사용은 가속화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나타나는 장점은 아이들의 창의력이 무럭무럭 자라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의 창의력은 그대로이고 변한 것은 문화이다. 두가지 사건이 일어날텐데, 하나는 더욱 창의적인 외계어 용법이 나타날 것이고, 어른들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언어가 나타날 것이다. 다른 하나는 아이들의 컴퓨터 해킹 실력이 급성장할 것이다. 기존에 있던 천재 해커들은 닥치고 있어야 할 무시무시한 청소년 해커들이 나타나리라고 본다.
매일 매일 근본 대책을 요구하고, 수립하고, 추진하지만 정작 결과물을 보면 임기응변, 임시변통밖에 안된다. 욕설과 비속어 관련 정책은 청소년 전문가와 국어 전문가가 합심해서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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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와 RNA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2D&mid=sec&sid1=105&sid2=230&oid=020&aid=0002394802
RNA의 역할에 관한 최근의 연구 성과에 관한 기사이다.
가장 끝에 DNA와 RNA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있는데 틀렸다.
http://ko.wikipedia.org/wiki/RNA
RNA는 DNA에 있는 티민(thymine, T) 대신에 우라실(U, uracil)을 이용한다. 사소한 오류 같지만, 이 차이가 두 물질 사이의 큰 역할 차이를 만드는 것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차이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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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자와 전자의 움직임을 관측, 제어하는 아토초 과학
http://www.kistep.re.kr/policy/data/trend_view.jsp#/policy/data/trend_view.jsp
자료조사하는거 도와줬던 문서.
당연히 저자에는 내 이름이 없지만, 없는게 더 낫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