ちらちらと 白い雪が 팔랑거리며 하얀 눈이
レンガの路に降る 벽돌길에 떨어져
落ちては ほら 떨어지면, 어머,
溶けて消えるよ 녹아서 사라져요
息で曇るガラスに 숨결에 흐려지는 유리창에
指先で引く 遠い空 손가락으로 그림을 그리며, 먼 하늘을
ひとり見上げている 혼자서 올려다보고 있는
4月の遅い雪に 4월의 늦은 눈에
春の気配も じらされて 봄의 기척도 초조해져서
ため息がひとつ 한숨이 한번
楽しいばかりじゃないよ 즐거운 것만 있는건 아니에요
時には そう 自分が 때로는, 그래요. 스스로가
とてもとても小さく思える 정말로, 정말로 작아다고 느껴져
ねぇ 誰もそうだよ 봐요, 누구나 그런걸요
涙や いたみ 눈물과 아픔
それぞれの胸 うけとめて 자기 가슴속에 담아두고
迷っている 헤메는걸요
ひらひらと 舞う花びら 팔랑거리며 춤추는 꽃잎이
白い雪と踊る にぎわう街 하얀 눈과 춤춰요 활기찬 거리
今日から春のフェスタ 오늘부터 봄의 축제
もうすぐだよ 出ておいでよ 금방이에요, 나오세요
うつむいていないで 고개숙일필요 없어요
寒くないよ 春はすぐそこ 춥지 않아요 이제 곧 봄인걸요
歩道の脇の花壇 咲きかけた花 길거리에 좁은 화단에 피어나기 시작한 꽃
あたたかな陽射し 待ちぼうけね 따뜻한 햇살을 기다리다 지쳤어요
行き交う人の笑顔 しあわせの数 마주치는 웃는얼굴 다들 행복한데
私だけ さみしいのはなぜ 나만 외로운건 어째서죠
つらくなることもあるね 힘든일도 있겠죠
だけどそんな時にも 하지만 그런 때에도
微笑むこと 忘れちゃいけない 웃는것을 잊으면 안돼요
そうよ 思い出してね 그래요, 생각해봐요
誰にもきっと 味方がいるの 누구에게나, 꼭, 자기편이 있는걸요
あなただけ 見ていてくれる 당신만을 바라봐주는
知っていたよ ずっと見てたよ 알고 있어요, 계속 보고 있어요
涙かくす場面も いつも大変さ 눈물을 숨긴 장면도, 언제나 큰일이죠
生きてくってことは 살아간다는건
寒い夜も 遠い道も 추운밤도, 먼 길도
なげださずにきたね 내던져버리지 않고 왔어요
時はめぐる 春はすぐそこ 시간은 흘러 이제 봄인걸요
ちらちらと 白い雪が 팔랑거리며 하얀 눈이
レンガの路に降る 벽돌길에 내려와
落ちては ほら 떨어지면, 봐요
溶けて消えるよ 녹아서 사라져요
出ておいでよ 寒くないよ 밖으로 나와봐요, 춥지 않아요
4月はじめの雪 사월에 내리는 눈
もう春だよ 冬にさよなら 이제 봄이에요, 겨울은 보내줘요
[카테고리:] 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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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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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ever Dreamer
요술공주 밍키 OST, 하야시바라 메구미 Enfleuledge 수록곡.
Forever Dreamer
作詞・作曲:松浦有希
編曲:岩本正樹
心の中に誰も 持ってるものがあるわ 마음속에는 누구나 특별한 것이 있죠
言葉にしないほど それは大きくて 말하지 않을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서
忙しい毎日に 失(な)くしそうな夢でも 바쁜 매일에 좌절할 것 같은 꿈이라도
あなたがいるならば きっと遠くない 당신이 있다면 절대 멀지 않아
あの日二人で わかりあえたね 그날, 둘이서, 만났어요
夕焼け色より 紅いハートで 저녁노을빛보다 빨간 마음으로
悲しくても 切なくても 슬퍼도, 안타까워도,
止められない想いを 멈추지 않는 마음을
風の中で 胸の奥で 바람 속에서, 가슴 깊은 곳에서,
ずっと抱きしめていて 계속 끌어안고 있어요
I’m dreamin’ with you Anywhere Forever 난 당신과 함께 꿈꿔요, 언제든 어디서든
明日に迷う夜も いつもいつも忘れないで 내일을 찾아 헤매더라도, 언제나 잊지 말아요
あなたらしく微笑(わら)って 당신답게 웃는 것을
心が叫ぶときは じっと耳をすまして 마음이 부르는 소리에 귀를 기울어봐요
はるかな流星に 願い託すように 멀리 있는 유성에 소원을 빌듯이
くじけそうなくらいに かなわない夢だけど 꺾여버릴 것 처럼, 이뤄지지 않는 꿈이라도
何よりまっすぐな 瞳 伏せないで 무엇보다, 쉬이 다른데 눈을 돌리지 말아요
大切なもの 守る勇気を 소중한 것을 지키는 용기를
信じていたい 熱いハートで 믿고 싶어요, 뜨거운 마음으로
逢いたくても 逢えなくても 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해도,
同じ空のどこかで 같은 하늘 어딘가에서
この気持ちは 変らないわ 이 감정은 변하지 않아요
ずっとあきらめないで 계속, 포기하지 많아요
I’m dreamin’ with you Anywhere Forever 난 당신과 함께 꿈꿔요, 언제든 어디서든
涙あふれる夜も いつもいつも前を見てる 눈물이 흘러 넘치는 밤에도, 언제나 앞을 바라봐요
あなたが大好きなの 당신이 너무 좋아요
悲しくても 切なくても 슬퍼도 안타까워도
止められない想いを 멈추지 않는 마음을
風の中で 胸の奥で 바람속에서, 가슴속 깊은 곳에서
ずっと抱きしめていて 쭉 끌어안고 있어요
I’m dreamin’ with you Anywhere Forever 난 당신과 함께 꿈꿔요, 언제든 어디서든
明日に迷う夜も いつもいつも忘れないで 내일을 찾아 헤매더라도, 언제나 잊지 말아요
あなたらしく微笑(わら)って 당신답게 웃는 것을
逢いたくても 逢えなくても만나고 싶어도, 만나지 못해도,
同じ空のどこかで같은 하늘 어딘가에서
この気持ちは 変らないわ이 감정은 변하지 않아요
ずっとあきらめないで계속, 포기하지 많아요
I’m dreamin’ with you Anywhere Forever 난 당신과 함께 꿈꿔요, 언제든 어디서든
涙あふれる夜も いつもいつも前を見てる 눈물이 흘러 넘치는 밤에도, 언제나 앞을 바라봐요
あなたが大好きなの 당신이 너무 좋아요—
상쾌하고 경쾌한 음악에, 마음에 따뜻한 용기를 불어넣어주는 가사. 좌절하고 싶을 때에도,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다면,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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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협점
요약: 비상상황 끝날때까지 백신 맞고, 마스크 쓰고, 집에 있읍시다.
타협, 협상, 이런 것들은 둘 이상의 대립하는 주체가 둘 다 손해를 보지 않기 위해서 이용하는 윈-윈 전략으로, 서로의 최대의 이익이 아니더라도 조금씩 양보하면서 적절한 이익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결정해야 하는 변수의 범위가 A는 10~20이고, B는 15~25라면, 타협점은 15~20에서 결정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둘 사이에 권력적인 차이가 없다면 대충 그 중간인 17.5에서 타협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여기까지가 상식적인 이야기고…
최저임금위원회에서 최저임금을 정할 때, 이런일이 일어나는데, 문제는 저 타협점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노동자측 대표는 시간당 10000원 이상을 원하고, 사측 대표는 시간당 9000이하를 원한다면, 두 범위에는 겹치는 부분이 하나도 없으며, 당연히 둘 다 만족하는 타협은 불가능하다. 이런 경우 관례적으로 두 범위의 중심에 해당하는 9500원 정도에서 조정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것도 일종의 타협이긴 한데, 어느쪽도 만족하지는 않으며, 둘 다 확실하게 손해를 보고, 결국은 본인들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일종의 조정자 역할에 해당하는 정부의 의도대로 끌려가게 된다.
위의 이야기는 그나마 협상에 참여하는 주체가 2개일 때 일어나는 상황이다. 지금 한창 진행중인 코로나 바이러스에 대한 방역 정책을 결정하는 경우, 만족시켜야 할 주체가 전 국민 개개인이다. 이러면 각각이 원하는 방역의 정도가 모두 다르므로 모두가 만족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어떤 사람은 반드시 불만을 갖고, 심지어 모든 사람이 불만을 갖는 상황도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경우 조정자인 정부는 방역 정책을 어느 정도에 맞춰야 할까?
한쪽 극단을 취하는 것은 가장 나쁜 대책이다. 가령, 백신 접종에 상관 없이 전방위적인 봉쇄를 시행해서 모든 사람을 집에 가두어 둔다면 방역 효과는 있겠지만 경제상황과 민심이 극도로 나빠진다. 반대로, 백신 접종에 역시 상관 없는 완전한 자유를 주어서 사람들을 풀어준다면, 경제는 굴러가겠지만 사망자가 늘어난다. 물론 민심은 나빠진다. 그렇다면 결국은 양 극단에서 어중간한 지점에 있는 정도를 고를 수 밖에 없다.
하지만, 그 어중간한 지점이란 무한히 많이 존재하며 그 안에서도 어느 정도를 골라야 하는가는 또한 쉽지 않은 문제다. 이 글 첫부분에, 타협점에서 서로 최대의 이익을 포기하고 적절한 이익을 보고 만족하는 것이 타협이라고 했는데, 손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서로 최악의 상황을 피하고 감당할만한 손해를 보고 만족하는 수 밖에 없다. 물론, 서로 최악의 상황을 피했다는 점에서 만족해야겠지만 손해를 본 것은 사실이므로 당연히 불만이 남는다. 어느 한쪽 편을 들었으면 거기서 이익을 보게 해준 쪽은 정부가 잘 했다고 생각하겠지만, 어중간한 지점을 잡게 된다면 정부가 잘 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방역정책에 집중해서 생각해 보자. 더 많은 국민을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으로부터 지키는 것이 정부의 유일한 목표라면 백신의 무조건 강제접종과 사회적 완전봉쇄를 통해서 바이러스의 전염을 차단하는 것이 정답이다. 하지만 이렇게 해버리면 사람들을 전염병의 위협에서는 지켜내더라도 국가경제가 완전히 추락해버린다. 나중에는 극복할 수 있다고 해도 단기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받는다. 생존자들이 생존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힘든 경제 위기가 올 수도 있다. 결국 완벽한 방역은 불가능하며, 어느정도 풀어줄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로 풀어주는 것이 적절한가? 사실은 어떤 정도도 적절하지 않다. 방역의 관점에서는 선택할 수 있는 범위의 바깥에 최적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최적점을 찾기 위해서 다른 척도를 도입해야 한다. 다른 척도로 국가 경제적인 측면을 생각해 보자. 앞서 살펴봤듯이 방역과 경제는 서로 맞서는 변수이므로 이 경우 최적점이 어딘가에 있다는 것 자체는 확실해진다. 그런데, 그래서 그 최적점이 어디냐고 물어본다면 이것 또한 정답이 없다. 이 최적점을 찾기 위한 모든 변수를 전부 파악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어떤 선택이 최선이었는가 아닌가는 이 상황이 마무리된 이후 나중에 평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가서 최선이 아니었다고 평가해봐야 이미 지나가버린 과거이기 때문에 최선의 결과를 만드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최적점이 어디인지도 모르고, 누군가 반드시 손해를 보고 불만을 가져야 한다면, 어쩌라는 것인가? 여기서 바로 국가가 누구를 위한 국가인지에 대한 철학이 드러난다. 모든 국민을 만족시킬 수는 없으므로, 국민의 일부에 집중해야 하는데 그 일부를 어떻게 고를 것인가? 나는 정부가 국민들 중 사회적, 경제적 약자에게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즉, 이와 같은 약자들에게 방역 정책을 집중해서 집에 있도록 유도하고, 대신에 경제적으로도 확실히 만족할만한 보상을 해줘야 한다는 뜻이다. 어떤 이들은 그 약자들은 노력 없이 쉬고 있었는데 경제적으로 이득을 보는 것을 어떻게 정당화시킬 수 있냐고 반문하겠지만, 사람이 이동의 자유를 포기하고 집에만 있는다거나 백신을 선택의 여지 없이 접종받는다는 것은 일종의 노력이자 노동이다. 즉, 이와 같은 활동에 가중치를 높게 줘서 사람들이 집에 머물게 되고 방역의 수준이 높아지면, 보상을 받는 대신 밖에서 활동하기를 선택한 사람들은 보다 안전하게 사회생활을 할 수 있으므로 이익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활동해서 얻은 이익은 본인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얻은 것일 뿐만 아니라, 집에 머물기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기여한 부분이 있기 때문에 그 이익은 나누는 것이 타당하다. 적어도 지금과 같은 전염병이 유행하는 시기에는 단순히 집에 있는다고 해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린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
언론과 여론을 보면 정부의 방역 정책이 전염병의 확산을 막지도 못하고 경제위기를 막아내지도 못해서 문제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이는데, 나는 그 부분이 바로 그렇기 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충분히 만족하지 않았다면 공평하게 불만을 나눈 것이므로, 현재의 정책이 최적점은 아니라 할지라도 적어도 최악이 아닌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보다 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부분은 경제적 손실에 대한 보상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보상할만한 돈이 부족하다면 전염병 때문에 돈을 벌게 된 주체에서 이익을 나누도록 하면 된다. 전염병에 의한 손해는 누군가의 노력이 부족해서 발생한 것이 아니므로, 전염병에 의한 이익도 순수하게 노력해서 얻은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을 생각하면, 전염병 때문에 생긴 경기위축 때문에 돈이 넉넉하지는 못하다 해도 보상을 못할 정도로 돈이 부족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돈은 왜 부족한 것 처럼 보이는가? 이 상황에서 이익을 얻은 주체들이 충분히 이익을 나누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정부에서 세금이라는 형태로 강제로 가져가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 정부는 국민들의 지지율을 먹고 사는 조직이므로 그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수 있는 일은 하려고 하지 않는다. 사회적 경제적 약자들은 한국에서 지지율에 큰 영향을 줄 정도로 대다수가 되지 않는다. 대한민국은 그런 약자들이 대다수가 되기에는 너무 많이 성장한 국가이다. 당연하겠지만, 이 상황에서 이익을 보는 주체는 대체로 기득권이고, 기득권은 그것을 우연히 얻었다고 해도 자신의 이익을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결국은 사회적 경제적 약자를 도울만한 돈이 부족해 보인다.
결론적으로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보다 방역을 강화하는 대신 훨씬 적극적인 경제적 보상을 제공하고 여기에 필요한 돈은 정부가 먼저 지출한 다음 나중에 채우면 된다는 내용이다.
본문의 내용이 제일 앞의 한줄요약이랑 뭔가 다른 것 같다면 그것은 기분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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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속도로에서의 몬티홀 딜레마
예전에 버스정거장에서 생각해본 몬티홀 딜레마에 대해서 적어본 적이 있었는데, 어제 운전하다가 문득 고속도로에서는 어떻게 되는가가 궁금해졌다.
질문: 길이가 100km인 3차선 도로가 있다. 이 도로에서 어떤 자동차가 사고를 당할 확률이 1%라고 하자. 내가 지금 이 도로를 30킬로미터만큼 사고가 나지 않은 채 달려왔다면, 차선을 바꾸는 것이 사고 확률을 낮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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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의 비밀
오래간만에 읽어본 괴서. 수학에 관한 뭔가 엄청난 비밀을 해결한 것 같은 느낌이 드는 책 표지. 하지만 읽어보니 그다지 의미있는 책은 아니었다. 이 책은 무한대, 무한소, 그리고 미분과 적분 등에서 나온 0으로 나누는 문제와 무한대의 문제를 설명하고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내용이다. 문제는 이미 수학계에서 늦어도 수십년 전, 또는 수백년 전에 대충 해결된 문제를 다시 풀려고 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엄밀하지도 않다. 이 책의 저자가 내 리뷰를 보고 기분이 나쁘다면, 집합론과 측도론을 수학과 커리큘럼에 맞춰서 공부해보기를 바란다. 그리고나면 이 책을 싹 다 회수해서 불태우고 싶어질 것이라고 본다.
전공자들에게는 쉬운 정도를 넘어서 너무 하찮은 책이고, 비전공자들에게는 너무 어려운 주제이다. 엄밀함을 희생해서 말랑말랑한 설명을 하려고 했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어느 것 하나 이루지 못한 목표가 되었다.
그래서 이 책의 내용이 틀렸는가? 하고 묻는다면, 그걸 판단하기에도 부족한 책이다. 엄밀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이 책의 내용은 현대 수학계에 아무런 충격을 주지 않는다. 대충 수학과 학부 4학년 학생하고만 얘기해봐도 끝날 이야기다. 내 느낌에, 말랑말랑한 수학 교양책 몇 권을 읽고서 거기에 설명이 부족한걸 보충해서 쓴다면 딱 이런 책이 나올 것 같다.
예를 들어 이 책에서는 0을 0으로 나눈 것에 대해서 어떤 적당한 정의를 통해서 그 값이 1이라고 치고, 여러가지 문제가 해결된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사실은 0을 0으로 나눈 것을 2라고 해도 되고 3이라고 해도 된다. 0을 0으로 나눈 값을 뭐라고 정하더라도 그럴싸한 이야기를 풀어갈 수 있기 때문에 수학자들은 그냥 그걸 굳이 뭔 값이라고 특정하지 않으며, 꼭 필요한 경우에는 분자와 분모에 극한을 취해서 근사적으로 구하는 방식을 사용한다. 책 내용이 다 이런식이라서, 아마 수학 전공자들이 이 내용을 들으면 “그래서 뭐죠…”라고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볼 것이다.
이 책은 나같은 사람이나 구해서 보는 책이지, 누구에게 추천할 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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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운전을 하기 위한 고전역학
물리학을 배워서 구체적으로 무엇에 써먹을 수 있고, 그걸로 돈을 벌 수 있느냐고, 누군가 나에게 묻는다면 물리학만 갖고서는 한참 부족하다는 대답이 나온다. 뭘 만들려고 해도 공학에 속하는 지식이 필요하고, 잘 팔리도록 예쁘게 만들고 싶으면 산업디자인과 같은 미술의 힘이 필요하다. 하지만 물리학을 잘 알고 있으면, 어떤 일들이 어쩌다가 그렇게 된 것인지,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동차를 운전하다보면 그런 순간들이 많이 보인다. 예를 들어, 안전운전을 하기 위해서 앞 차와의 간격을 충분히 벌려두어야 하는 이유 같은 것들이 있다.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자동차 하나를 생각해 보자. 이 자동차의 앞에,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또 다른 자동차가 한 대 더 있다고 해 보자. 앞 차와의 간격은 100미터이다. 쉽게 생각하기 위해서, 두 자동차의 목적지가 같다고 해 보자. 그럼, 뒤에 있는 차량이 앞에 있는 차량보다 늦게 도착할 것이다. 얼마나 늦게 도착할까? 약 3.6초 정도 늦게 도착한다. 왜냐하면, 시속 100킬로미터는 1초에 27미터 정도 달리는 속력이고, 뒷 차와 앞 차의 간격은 100미터이기 때문이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속 100킬로미터로 꾸준히 달렸다면, 뒷 차는 앞 차보다 대략 3~4초 정도 늦게 도착하는 셈이다. 이 때, 출발시각은 상관 없다.
그럼, 뒷 차가 앞 차에 차를 바싹 붙여서 간격을 10미터로 줄였다고 쳐 보자. 그럼 뒷 차는 앞 차보다 약 0.3초 정도 목적지에 늦게 도착하게 된다. 뭔가 늦는 시간이 10분의 1로 줄었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줄어든 것 같지만 실제로 나타나는 도착시간의 차이는 3초다. 즉, 속도를 일정하게 달리고 있는 한, 앞차와의 간격이 가깝든 멀든 앞 차보다 늦는 정도는 겨우 몇 초 차이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재채기만 해도 스쳐 지나가는 3초 차이 때문에 앞 차에 바싹 붙이면서 고속 운전을 하는 것은 너무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가? 0.001초라도 앞서가야 승리하는 모터스포츠를 운전하는 중이 아닌 이상, 앞차에 자기차가 바싹 붙여서 운전하는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매우 위험하면서 얻게 되는 시간적 이득은 별로 없다.
여기까지 이야기를 요약하자면, 차량 통행량이 정속주행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꾸준하다면, 앞차와의 간격을 좁게 하든 넓게 하든 도착시간에 큰 차이가 없는 대신에, 좁게 할수록 당신의 목숨은 훨씬 위험해 진다는 뜻이다.
방금 앞의 이야기에서는 앞지르기를 하지 않는 경우를 이야기했는데, 그럼 앞지르기를 하면서 달린다면 어떨까? 앞 차보다 먼저 도착할테니 이번엔 좀 남는 장사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이 경우에도 목숨을 건 댓가 치고는 그다지 얻을 이익이 없다.
앞 차와의 간격이 앞서와 마찬가지로 100미터라고 해 보자. 시속 100킬로미터로 달리는 차를 추월하기 위해 같은 속도로 달리고 있던 뒷차가 시속 120킬로미터로 달리기 시작했다고 하면, 앞 차와 나란히 서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18초다. 속도 오차를 감안해도 20초정도 걸릴 것이다. 물론 나란히 섰다고 해서 앞지르기가 성공한 것이 아니라, 그 차보다 더 앞으로 나가서 차선변경을 해야 하니까, 아마 앞지르기를 끝내는데는 30초에서 40초 정도가 걸릴 것이다. 이제 앞지르기를 했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속도를 다시 시속 100킬로미터 정도로 줄여서 더 앞에 있는 차량과 보조를 맞춰야 할 것이다. 이제 생각해보면, 앞지르기를 하기 전에 조금 늦던 것이 앞지르기를 하고 나서는 조금 빨리 도착하기는 하는데, 처음에 말했듯이 그 차이는 약 6초에서 7초 정도밖에 차이가 나지 않는다. 물론, 앞지르기를 하기 위해서는 앞 차와의 간격을 줄이는 과정이 필수적이기 때문에, 그 동안에는 그만큼 위험해진다. 굳이 위험을 감수해야 할까?
아, 그렇다면 앞지르기를 계속 하면 되지 않는가? 좋은 질문이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앞지르기를 계속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동차들은 계속해서 도로를 달리고 있으므로, 내 앞에 있는 차를 한 대 앞질러 가더라도, 그 앞에도 차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앞지르기를 한번 할 때마다 사고가 날 확률은 독립적이므로, 전체 주행 시간동안 사고가 한번 날 확률은 앞지르기를 할 때마다 누적된다.
그렇게 열심히 앞지르기를 해서 얼마나 빨리 도착할 수 있을까? 예를 들어, 서울-부산간 고속도로가 450킬로미터정도 되는데, 시속 100킬로미터로 쉬지않고 달리면 4시간 30분이 걸린다. 그런데, 앞지르기를 계속 해봐야 시속 120킬로미터 정도로 달린다면 3시간 45분이 걸릴 뿐이다. 이건 한번도 쉬지않고 계속해서 이 속도로 달렸을 때의 이야기이고, 중간에 교통정체구간을 한번이라도 만난다면 어떻게 달려도 결국 4시간 이상 걸리게 된다. 중간에 교통정체구간을 한번도 만나지 않고 갈 수 있을까? 글쎄다…..
자동차가 거의 없는 텅 빈 도로에서는 차가 없어서 앞지르기를 할 수가 없다. 자동차로 가득차 있는 막힌 도로에서는 빈 공간이 없어서 앞지르기를 할 수가 없다. 앞지르기를 계속해서 할 수 있을만큼 적당히 차량이 달리고 있는 도로에서는, 앞지르기를 연속으로 해 봐야 그렇게 빨리 갈 수가 없다.
그러니까, 앞지르기도 앞 차량이 너무 천천히 간다든지 하는 정도의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아니면 안해도 된다. 도착시간에 별다른 차이는 없다.
설마하니 속도는 두 지점 사이의 거리를 이동시간으로 나눈 것이라는 산수 얘기를 했을 뿐인데 이해를 못하는 분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이 글을 읽은 모든 운전자들에게 앞으로도 안전운전을 부탁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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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연구한 것들
어차피 논문으로 나온 성과가 없어서 역시 믿거나 말거나지만, 대학원에서 뭐 했나 훑어보면…
광섬유 Flame-brushing 장치 셋업. 광섬유를 녹여서 잡아당겨서 1마이크로미터 이하 굵기로 가공하는 장치. 가스불꽃이랑 전기 히터를 선택해서 쓸수 있고, 가공이 끝나면 자동으로 패키징하는 설비까지 만들었다. 뭐, 1마이크로미터 또는 그 이하의 굵기를 가지는 광섬유를 수십밀리미터 길이로 가공할 수 있는 설비는 전 세계 실험실에서도 몇 군데 없을거라고 자부한다.
광섬유에 진동을 줘서 모드를 바꾸는 Acousto-optic mode filter를 만들었고, 여기서 생기는 모듈레이션 신호를 분석했다. 저기서 “모드”란 레이저 빔이 생긴 모양을 뜻한다. 아무튼, 빛이 광섬유의 진동과 상호작용할 때 다중산란에 의한 모둘레이션 신호를 해석적으로 풀었는데, 지도교수님이 별 의미가 없는 문제라고 해서 논문으로 쓰지는 못했다. 난 아무리 찾아도 누가 푼 것 같지는 않은 문제였지만…
간섭계 없이 이미지 한장 찍은 것만으로 광섬유 모드의 구성 성분을 알아낼 수 있는 Non-holographic mode decomposition을 제안했었다. 이것도 지도교수님을 설득하지 못해서 논문으로 쓰지는 못했는데, 1년후 누가 똑같은 아이디어로, 내가 쓰려던 내용 그대로 논문 냈더라… 지구 반대편에 있는 연구실 아니었음 누가 훔쳐간 거라고 생각했을 거다.
1마이크로미터 이하의 지름을 가지는 광섬유 굵기를 저배율 광학현미경으로 찍어서 10나노미터 정도의 정확도로 추정해내는 알고리즘을 만들었다. 세계최초로 한 건 아니고, 다른 연구팀에서 성공한 연구이긴 한데, 여기서 발생할 수 있는 몇가지 문제점을 개선해서 제안했다. 이것도 교수님이 별 의미 없다고 해서 논문으로 내지는 못했지만…
수백 나노미터정도의 굵기를 가지는 광섬유에 수 와트급의 연속레이저를 집어넣어서 생기는 뭔가 이상한 현상을 발견했다. 뭐, 이건 이미 해석된 현상일 것 같긴 한데, 선행연구논문에서 비슷한 현상을 찾아내지는 못했었다. 어쨌든 해석이 안되서 논문으로는 못 냈지만. 학회 발표하고 끝났다.
광섬유만을 이용한 펄스 레이저도 만들어 봤고, 온갖 측정장치와 실험장치를 랩뷰와 파이썬으로 자동화시켜서 실험하고 데이터를 컴퓨터로 갖고 오는 부분을 열심히 했다. 소소하게 연구실에 있는 다른 친구들 실험에 도움 준것도 많다. 그 친구들 논문에 후순위 공동저자중 하나로는 다 들어갈만하다고 생각한다. 그냥 내 생각이지만.
그래서 원래 하려고 했던건 Third order spontaneous parametric down conversion이었다. 그래서 단광자 검출기도 잔뜩 사놓고 있었는데, 작동되는지 켜본게 전부다. 젠장.
누가 9년간 대체 얼마나 놀았길래(…) 대학원 졸업을 못하냐고 할까봐 새벽 감성에 취해서 몇 자 적어보았다. 저 주제가 엄청 어려운 것들은 아니어서 토탈 9년간 할 정도로 어려운 게 아니긴 한데. 내가 못한건 지도교수님 설득이지 연구가 아니다. 연구윤리 문제가 있어서, 저걸 이제와서 나 혼자 논문으로 낸다거나, 구체적인 내용을 외부에 말하거나 하는건 곤란하지만, 어쨌든 이정도는 얘기해도 되겠지. 혹시 저런 주제에 관심있는 분은 지도교수님 연구실로 연락하면 된다. 그게 거기서 공동연구 논문으로 나오면 아마 내 이름도 들어갈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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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탈출의 변
한줄요약: 대학원 그만둡니다.
눈치채신 분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제 자기소개가 “A quasi particle physicist”에서 “A quasi particle”로 바뀌었습니다. 많은 고민이 있었고, 많은 분들의 조언과 응원을 들었고, 내린 결론은 대학원을 그만두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그것뿐이었나? 어떻게든 지도교수님이랑 쇼부를 쳐서 적당히라도 졸업할 수 없었는가? 연구실을 옮겨서라도 어떻게 안되나? 등등… 이런 가능성에 대해서, 수십가지의 경우의 수를 검토해 봤지만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그래서 더이상 저는 Physicist가 아니라, 그냥 조그마한 한 개인이라는 점에서 A quasi particle입니다.지난 9년간의 대학원 생활에 있어서 제가 열심히 노력하지 못한 부분, 성실하지 못했던 부분, 재능이 부족했던 지점 등, 현재에 이르게 된 이유는 많이 있습니다. 과거의 어떤 시점을 돌이켜 본다면 지금 이렇게 된 결과를 바꿀 수 있었던 여러 지점들이 분명히 있었습니다. 심지어 충분히 많이 있었죠. 좋은 결과가 나오도록 바꾸지 못한걸 전부 내 탓이라며 마냥 자학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만. 이제는 현실을 바꾸기에는 늦었고, 따라서 학자로써의 길은 여기서 멈추려고 합니다.
아쉬움은 남았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하고 싶은 공부를 충분히 했고, 논문이 되지는 못했지만 아무튼 재밌는 연구를 했으며, 많은 친구들을 만나고 사귀었으며, 좋은 경험도 여러가지로 했습니다. 어쩌다보니 이렇게 된 것이지, 누구 때문에 대학원 생활이 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만약 누군가 잘못이 있다면, 그 누군가는 저 하나입니다. 이런 결과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대학원 원서접수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 모든 선택의 순간에 어느 방향으로 갈지 결정한 것은 저 자신이니까요.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이 상황은, 마치 국가대표 달리기 선수가 올림픽에 나가서 100미터 질주를 하는데, 중간에 넘어진거죠. 끝까지 뛰어갔는데 메달을 못 땄다거나, 그런게 아니라 중간에 넘어지면서 경기가 끝난 거예요. 당연히 넘어졌으니까 아프고, 까져서 상처도 나고, 끝까지 뛰지를 못했으니 억울하고, 끝까지 갔으면 내가 이겼을거라는 생각도 들고 아쉽고 화가 나고 그러겠지만. 뭐 사실은 다음 대회도 있고, 다른 종목도 있고. 그때까지 노력하면서 얻은 실력은 어쨌든 자기 것이니까요. 저에게는 대학원 박사과정 도전이 올림픽 같은 큰 도전이었고, 중간에 이렇게 넘어져버렸네요. 그러니까 일단 넘어져서 아픈건 좀 문질러 주고, 크게 다친거 없이 괜찮은거 같으면 일어서서 경기장에서 비켜줄 겁니다. 저는 단지 다른 곳으로, 다음 경기장으로 가서 다음 대회를 준비할 뿐입니다.
저를 응원해 주신 많은 분들과, 그리고 응원해주지 않으셨더라도 아무튼 주위에 계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의 계획은…. 재밌는 일을 벌려볼 생각이 있어서, 아마 성과가 있으면 좋은 이야기로 알려드릴 수 있을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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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배우는 양자컴퓨터

(일러두기)이 리뷰는 출판사 영진닷컴으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아서 이루어졌습니다.
하나의 유령이 업계를 떠돌고 있다. 양자컴퓨터라는 유령이.
유명한 공산당선언의 도입부를 따라해보았다. 양자컴퓨터는 우리에게 마치 유령과 같은 개념이다. 일단, 양자라는 것 자체가 무슨 말인지 모르는 어려운 개념이고, 양자역학 수업을 들어본 물리학 전공자에게도 양자라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고 설명하기도 어려운 개념이다. 그리고 그 양자라는 것을 이용한 컴퓨터는 또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울까? 그런 어려운 개념을 과연 쉽게 설명할 수 있을까? 이 책에서는 그 어려운 일을 어느정도 완수한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특징이라면, 저자가 물리학 전공자가 아니다. 공과대학 출신으로, 금융계에서 일하다가 필요에 의해서 양자컴퓨터를 공부하게 된 것 같다. 그러다보니, 완전히 비전공자의 관점에서 어떻게 하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책을 썼다는 것이 느껴진다. 제일 첫 챕터인 ‘양자컴퓨터로 인한 사회 변화’에서는 양자역학에 관한 설명으로 바로 들어가지 않고, 양자컴퓨터가 어떤 파급력을 갖고 있는지, 왜 주목해야 하는지 등을 설명하면서 내용이 어렵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공부해 볼 것을 권하고 있다. 그리고 두번째 챕터에서야 양자가 무엇인지, 양자컴퓨터가 양자의 어떤 성질을 이용한 것인지 소개하기 시작한다. 세번째 챕터와 네번째 챕터는 흔히 보는(?) 양자컴퓨터 교재에 나오는 이야기들인 양자 게이트와 양자 알고리즘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사실 이 책에서 보이는 두드러지는 특징은, 내용의 실전성이다. 다섯번째 챕터에서 양자컴퓨터로 할 수 있는 일들을 설명한 후, 여섯번째와 일곱번째 챕터에서 실제로 파이썬을 이용해서 양자컴퓨터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예제를 보여준다. 우리가 고전적인 컴퓨터에서 반도체 회로의 작동 원리를 깊이있게 이해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걸 이용해서 계산도 하고 게임도 하듯이, 양자컴퓨터 역시 깊이있는 이해가 없어도 그걸 이용하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다시말해서, 양자역학 그 자체를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도구로써의 양자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은 어느정도 가능한 일인데, 그렇게 하려면 손에 만질 수 있는 도구로 실습해보는 것이 제일 좋다. 이 책에서는 그렇게 양자컴퓨터의 작동 방식과 코딩 방법을 체험할 수 있도록 소개하고 있어서 일단 체험하고, 나중에 이해하는 방식의 학습이 가능하다.
마지막 여덟번째 챕터는, 저자 본인이 금융 관련된 일을 하다보니, 양자컴퓨터를 어떤 분야에 도입해서 활용할 수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물론 여기에 제시된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이쪽 업계에 좋은 인사이트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책은 여덟개의 챕터로 나눠져 있기도 하지만, 각 챕터는 레슨이라는 순서로 구분되어 있기도 하다. 책 전체적으로 58개의 레슨이 있고, 각 레슨에서는 하나의 개념을 이해하는데 집중하고 있어서 설명이 오락가락하지 않고 잘 정리되어 있다. 그리고 레슨의 순서가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어서, 일단 쉬운 개념이나 도입해야 하는 이유 등을 먼저 설명하고, 이후에 좀 더 복잡하고 어려운 개념을 설명하는 순서다. 이런 순서가 학술적 정합성을 중시하는 관련 전공 연구자들에게는 좀 어색할 수 있는데, 쉬운 개념부터 받아들이면서 점층적으로 어려운 것을 배워 나간다는 교육 목적에서는 적절해 보인다.
전반적으로 보자면, 이 책은 내가 접했던 여러 양자컴퓨터 전공서, 개론서, 입문서 중에서 매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다. 양자컴퓨터라는 말을 들어보긴 했는데 아무도 안 가르쳐준다거나,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봐도 뜬구름 잡는 설명만 있다거나 해서 좌절한 사람들에게 양자컴퓨터 공부의 시작점과 방향을 제시하는 책이라고 볼 수 있다. 다만, 그러다보니 물리학 전공자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너무 쉬운 편이며, 아마 이미 아는 개념을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설명하는지 구경하는 정도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유일하게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사실 글꼴이었다. 글꼴이… 뭔가 눈에 잘 안들어오는 느낌이다. 그건 주관적인 부분이기도 하고, 출판사에서 정할 일이라서 리뷰에 대놓고 쓸 얘기는 아니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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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

SONY DSC 이번에 읽은 책은 “스테파니 케이브”라는 의사가 쓴 “예방접종 어떻게 믿습니까”라는 책이다. 예방접종을 절대로 맞으면 안된다고 하는 다른 어떤 책에 비해서는, 웬만하면 맞지 말고 꼭 필요한 경우에만 주의해서 맞으라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약간은 온건한 책이라고 할만하다. 물론, 이 책의 내용을 비평할만한 전문지식이 없는 사람이 읽을 경우 백신에 대해서 굉장히 부정적인 편견을 갖게 될 것이므로 주변에 이 책을 널리 추천할 수는 없다.
이 책에서 얻어갈만한 핵심 메시지는 “백신 접종 전 주의사항을 꼼꼼히 확인하시오”이다. 이건 무슨 약을 먹더라도 마찬가지겠지만, 아무튼 주의사항을 잘 확인한 후 백신 접종에 어떤 효과와 위험이 있는지 이해한 후에 접종하는게 좋다.
이 책의 문제점은 백신 접종을 무조건 반대하는 건 아니라고 하면서도, 백신 접종에 부정적인 의견을 가질만한 주장과 사례만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대충 설명해 보자면 다음과 같다.
백신 뿐만 아니라, 현대 의학에서 시행하고 있는 모든 약품, 수술, 시술 등은 부작용이 있다. 여기서 부작용이란 원하는 작용 뿐만 아니라 그에 뒤따르는 부가적인 작용이라는 뜻이다. 그 부가적인 작용 중에는 그 처치를 받은 개인에게 긍정적인 작용도 있고 부정적인 작용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중에는 알려지지 않은 부작용도 있을 수 있다. 그럼, 그중에 부정적인 부작용이 걱정되어서 처치를 포기해야 할까? 가령, 어떤 약을 먹으면 독감이 낫게 되지만, 드물게 정신착란이 일어나서 자해나 자살을 할 수 있다는게 알려져 있다고 하자. 그럼 그 약을 먹으면 안될까? 글쎄다. 백신도 마찬가지다. 백신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 임상실험을 통해서 어느정도 알게 되었으면, 적극적으로 도입해서 전염성 질병을 막는 것이 중요하다.
저자가 이 책에서 백신의 안전성과 효과에 대해서 가장 크게 의심하고 있는 부분은 “과학적으로 밝혀진 근거가 없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홍역 백신을 접종 했어도 홍역에 걸릴 수 있는데 어째서 효과가 있다는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그럼, 의학은 과학적일 수 있는가? 우리가 아는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의학은 불가능하다. 의학, 의술은 근본적으로 인체를 대상으로, 특히 살아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 기술의 모음이다. 아무런 근거 없이 아무 짓이나 하면 안되겠지만, 그렇다고 엄밀한 의미에서의 과학적인 잣대를 들이댄다면 의사들은 아무도 살릴 수 없다. 백신의 효능도 마찬가지로, 엄밀하게 과학적인 실험을 하자면 임의로 10만명을 골라서 5만명에게는 진짜 백신을 주사하고, 나머지에게는 백신 성분이 없는 가짜 백신을 주사한 후, 2주쯤 후에 실제 바이러스를 주사해서 얼마나 감염되는지 관찰해야 한다. 그리고 이 실험을 여러번 반복해서 재현성이 있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은 당연히 인권침해이며, 현재 시행하는 임상실험 방법이 아니다. 백신 허가에 있어서 임상실험의 설계가 잘못되었다거나, 실험 결과의 해석이 틀렸다거나 하는 부분을 지적하는건 좋은데, 이 책에서는 그런 부분을 넘어서 “과학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부분까지 증거를 제시하라고 한다. 그리고 그런 것이 부족하므로 백신을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내가 보기엔, 이 책에서 백신이 과학적이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과 동등한 정도로, 또는 그보다 더 심각한 정도로, 이 책 역시 과학적이지 않다.
이 책이 제대로 된 정보를 전달하려고 했다면, 백신의 부작용이 나타난 사례만을 제시할 것이 아니라, 백신 접종자수, 해당 백신에서 나타난 부작용 수, 질병의 발벙률 등을 종합적으로 제시하여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믿을만한지를 설명했었어야 한다. 물론 이 책에는 그런 이야기는 없다. 단지 백신 접종 후 얼마나 많은 부작용이 나타났는지, 백신 접종 후 나타난 이상 반응이 백신 부작용이 아니라는 건 근거가 없다는 주장만이 실려있을 뿐이다.
이 책은 전체적으로 시간들여서 읽을만한 책은 아니다. 이걸 쓴 사람이 의사이고 의학 박사학위 소지자이며, 이 책을 한국어로 번역한 사람이 간호학 박사를 받았다는 것이 잘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참 비과학적인 책이다. 물론 박사가 쓴 모든 책이 과학적이어야 하는건 아니겠지만 이 책의 저술 의도를 생각해보면 저자가 자신의 주장만 이야기하기보다는 자신의 주장에 반대되는 견해를 함께 제시하고, 그에 대한 반대 증거도 제시하면서 독자가 비교할 수 있도록 했었어야 한다.
물론 백신을 맞고 말고는 개인의 선택이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접종에 반대되는 견해에 관한 책만 읽고 판단하는 것 또한 문제가 있다. 난 지금까지 이 책에서 이야기한 백신 중 상당수를 접종했고, 어쨌든 부작용 없이 잘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의 “아무 일 없었다”는 사례는 이 책에서 “부작용을 겪었다”는 사례와 같은 가치를 가진다. 왜 부작용이 없었다는 사례는 이 책에 나오지 않는가? 한번 생각해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