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살아가다, 잘 살아간다


예전에 연구소에서 만난 후배가 있었다. 매우 뛰어난 친구였고, 연구원으로써 실력과 열정과 직관을 모두 갖춘 좋은 사람이었다. 물론 성실하면서 인간적으로도 모범이되는, 편견이라는 소리를 듣더라도 일방적으로 칭찬할 수밖에 없는 친구였다. 내가 대전으로 오고나서, 그 친구도 외국의 좋은 대학으로 유학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내심 부럽기도 하면서 그 친구의 장래가 굉장히 기대되었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슬픈 결말을 맞는다. 그로부터 몇 개월 지나지 않아 휴가를 얻은 그는 평소 취미로 삼던 등산을 위해 유럽의 어느 험한 산에 올라갔다가, 날씨의 급변으로 조난을 당한 후 시신으로 발견된 것이다. 그 소식을 전해들었을 때 온갖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몰려왔다. 그 힘든 상황에서 얼마나 춥고 무서웠을지, 그의 열정은 어째서 거기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는지, 학계는 우수한 과학자 한명을 잃은 것이고 나는 매우 인간적인 후배를 잃었다. 그의 명복을 빈다.

몇 해가 지나서, 나도 대학원 생활에 찌들어가다보니 차츰 대충 하고 포기하거나, 힘들다고 투덜대는 사람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세상을 떠난 그 친구가 생각났다. 나는 왜 여기서 이렇게 투덜대고 있을까? 하지만 그 생각은 그가 이루지 못한걸 하고 있는 나를 다행으로 생각하라며 다그치고 채찍질하는 목소리로 나타나지 않았다. 그 생각이 나에게 전해준 것은, 그 친구는 어쨌든 단 한순간도 자신의 선택이 아니었던 적이 없다는 것이었다. 운명은 그를 너무 이르게 데려가 버렸지만, 그가 연구를 선택한 것도, 유학을 간 것도, 마지막이 된 등산을 간 것도 그렇다.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적어도 그 때까지 자유롭게 자신의 인생을 개척하며 살아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나는 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물론 그런 일련의 깨달음이 있었다고 해서 극적으로 내 태도가 바뀌거나 습관이 변하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의 상황이 내가 원하던 상황이 아니고, 내가 좋아하는 상황도 아니지만, 결과가 어떻든 나의 자유로운 선택들이 나를 이렇게 끌고 왔다. 물론 내가 힘들어하는 것에 자책만 할 것이 아니라, 어떤 것들이 나를 힘들게 하는지 나의 안과 밖에서 살펴보는 객관적인 시각이 필요하지만, 그 원인을 누구에게 책임을 미룬다 하더라도 내가 선택한 길이라는 것은 변하지 않는다. 자신을 탓하지 않으면서 타인을 원망도 하지 않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지만, 내가 대학원에 온 것은 누가 강요해서 온 것은 아니지 않는가? 심지어, 나를 잘 아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말렸던 것을 내가 강행해서 뛰어들었다. 그렇다면, 그 선택을 후회하기보다는 지금 힘든 것을 뚫고, 할 수 있는 것들을 해 나가면서 나를 바꾸고 상황을 바꿔나가는 것이 지금 해야 하는, 다시 할 수 있는, 나의 선택이다.

결국 나의 대학원 생활도 박사학위를 받지 못한다는 결말로 끝나고 말았다. 당연히 마음이 힘들고, 몸도 힘들다. 그동안 상처받은 마음은 그 보상을 받지 못했고, 피로해서 허약해진 몸은 즉시 회복이 필요하다. 취업을 하기에는 커리어가 꼬였고, 특별히 자랑할만한 전문기술도 없이 경력도 없이 그냥 10년이 지나간 것이다. 물론 집안에 돈이 많은 것도 아니다. 나는 아마 지금 인생의 바닥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과거의 어떤 시점과 비교해도 지금이 더 바닥상태인 것은 분명하다. 그래도 나에게는 무언가가 남아있었는데, 아주 약간의 금전적 여유가 남아있고, 대학원에서 빠져나온 덕분에 마음의 안정이 되돌아오고 있으며, 결정적으로 앞으로의 인생을 지금부터 다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남아있었다.

산에서 최후를 맞이한 그 친구가, 만약에 살아서 돌아왔다면, 그 결과로 어떤 부상을 입고 장애가 생겼다면, 그래서 연구를 그만두게 되었다면, 그 친구는 그 경우에 어떻게 했을까? 아마 상심하고 좌절했겠지만,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내서 다시 도전했을 것 같다. 이제 나에게 “그렇다면” 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 떠오른다. 그렇다면? 나도 다시 도전하는 것이 어떨까. 무엇을 도전이라고 할 것인지는 말하기 나름이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뭘 해도 바닥에서 올라갈테니 그 모든 것이 다 도전 아닌가?

긍정적인 생각을 할 수 있게 도와준 그 친구에게 감사하며, 다시한번 고인의 명복을 빈다.


“잘 살아가다, 잘 살아간다”에 대한 2개의 응답

  1. 블로그 글로 많은 도움 받은 사람입니다. 감가랍니다.힘든시기 잘 이겨내시길 바랍니다. 삼가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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