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란

너무 급진적인 생각인지도 모르지만 단상을 하나 적어둔다.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권리는 일반적으로 없지만, 자신의 사상을 강요할 자유는 있다. 물론, 그렇게 강요받는 당사자 역시 자신의 사상을 바꾸지 않을 자유가 있고, 관철시킬 자유가 있으며, 자신에게 사상을 강요하는 자에게 거꾸로 본인의 사상을 강요할 자유 역시 갖고 있다. 인간은 평등하니까.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갖고 있는 자유는 생각하면서 남들이 갖고 있는 자유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다.
이 상태를 생각하고나면 떠오르는게, 사람들이 만나서 서로 자기의 사상을 강요하면 서로 괴로우니까 자기 생각을 적당히 숨기고, 적당히 다듬어서, 서로 괴롭지 않은 상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적 규칙이 생각난다. 도덕, 예절, 윤리, 그런 것들이다.
이것들을 자신의 마음, 생각, 욕망, 사상에 솔직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 또한 그 개인의 자유이다. 그리고 다시한번 말하지만, 그 생각을 그렇다고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고 다니는 것도 전달하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그 개인의 자유이다. 하지만, 그러니까 다시 한번 말하지만, 보다못한 다른 사람이 그에게 닥치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 역시 자유에 포함된다는 걸 알고는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게 기분나쁘더라도 화내지 말라는 것은 아닌데, 최소한 자신의 자유와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것을 알기라도 했으면 좋겠다.

의견을 관철하기

  • 잡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은 인생에 있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생은 자기 자신의 선택과,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라는 두가지 원인을 바탕으로 미래가 결정된다. 선택은 필연이고 환경은 우연이다. 자신의 선택과, 그를 바탕으로 한 노력은 큰 이득을 볼 수 없지만 꾸준히 결과를 쌓아갈 것이고, 우연히 주어진 환경과 운 좋게 다가온 기회는 큰 이득을 주겠지만 결과를 기대할 수 없다. 운이 없다면 살면서 단 한번도 기회가 오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노력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겠지만, 성공하지 못했다고 노력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는 것은 성공하기 위해 해야 하는 가장 적극적인 방법 중 하나일 것이다. 나는 자연현상을 연구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가설이 세상을 설명한다고 주장하며,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증거를 찾아내야 한다. 그 증거를 찾아내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사용해야 하고, 그걸 왜 사용해야 하는지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관철시켜야 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투쟁한다. 온갖 방법을 써서 외친다. 그것이 다른 사람의 맘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그것을 관철시키는 것을 방해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견일 수도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유사과학을 외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사기를 칠 수도 있다. 소수자 인권을 외칠 수도 있고, 돈이 최고라고 주장할 수도 있다.

그런 수많은 투쟁들 속에서 살아가다가, 어떤 사람은 힘이 없고, 어떤 사람은 소심하고,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없어서 패배할 수 있다. 아마 대부분의 시도와 노력은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선택이 포기하느냐 마느냐밖에 없는 상황에 처할 것이다. 포기할수도 없고 포기하지 않을수도 없는 절대적인 상황에 처할 것이다.

모든 것을 혼자 해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세상에 내던져진 입장에서 이 모든 인생을 나 혼자 해내야 하고,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을 것이다. 도와달라고 말해도 아무도 도와주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 또한 시도이고 도전이다. 혼자서 해낼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면 도와달라고 하고, 다른 사람이 도와달라는 말에 도와주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물론 도와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수도 있다. 도와주겠다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도와줘도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말해야 한다.

다른 사람한테 도와달라고 말해도 된다는 사실을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더라도 사람들은 스스로 해내기를 좋아하고 자신이 해냈다는 걸 자랑하고 싶어한다. 하지만 꼭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반드시 해내야 하는 일이 있을 때, 누군가의 도움으로 해결할 수 있는 일이라면 도와달라고 부탁해야 한다.

반론이 있을 수 있다. 인맥을 이용해 청탁을 한다거나, 뇌물을 주면서 행정적인 처리를 부탁한다거나, 그런 부탁도 하라는 말이냐? 내 주장에서는 그런 것 역시 포함될 것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의 성공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불법적인 일에는 누군가 피해자가 있을 것이고, 그 피해자 역시 자신의 피해 구제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노력할 것이다. 그런 피해자를 도와주는 사람 역시 있을 것이다.

싸우자. 해야 할 일이 있고, 해내야 할 일이 있으면 끝까지 싸우자. 이기지 못해도 싸워야 할 것이다. 사람들은 그렇게 도와달라고 말하고, 도와주고, 서로 도움을 주면서 살 것이다.

시비

장자가 그랬다. “너랑 나랑 싸우는데, 너랑 의견이 같은 사람이 심판을 보면 너의 편을 들 것이고, 나랑 의견이 같은 사람이 심판을 보면 내 편을 볼 것이니 누가 맞고 틀리는지 알 수가 없다. 또한, 너하고도 나하고도 의견이 다른 사람이 심판을 보면 누가 맞고 틀리는지 가름할 수가 없을 것이고, 너하고도 나하고도 의견이 같은 사람이 심판을 보면 역시 누가 맞고 틀리는지 가름할 수가 없다.” 이렇듯 시비를 가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이 말은 어떻게 해서든 시비를 가리는 것 보다, 시비를 가리기 위해서는 너와 나 중에 누군가는 자신의 의견을 접고 상대에게 동의해야 한다는 뜻이다. 지금 세상에서 싸우는 사람들 중에 자기가 틀릴수도 있음을 인정하고, 자신이 설득당할 것을 전제하고 싸우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있을까.

미래의 일자리

얼마 전, 아마존에서 직원이 없는 오프라인 매장을 운영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손님이 매장에 입장할 때 스마트폰으로 인증을 하고 들어가면, 물건을 골라서 나올 때 자동으로 계산이 완료되는 방식이다. 이 방식으로 운영되는 매장은 인건비가 들어가지 않으므로 처음 매장을 열 때 들어가는 투자비를 제외하면 장기적으로 이득이다.

사실 반복작업이나 고강도 노동에 있어서 지능적인 판단은 유일하게 인간이 기계보다 앞서고 있던 부분이었다. 기계는 인간보다 더 무거운 짐을 지고 움직일 수 있고, 더 정확하게 재료를 가공할 수 있으며, 더 빠르게 움직일 수 있다. 하지만 판단의 영역에서는 인간을 따라잡지 못했했다. 이전까지 우리가 알던 세계에서 기계가 할 수 있는 것은 직선적이고 단순한 계기판을 보고서 작동을 더 하느냐 정지하느냐 정도의 판단이었고, 이보다 복잡한 판단은 인간의 지능이 반드시 필요했다. 그리고 그 지능은 다른 동물로 대체할 수도 없는, 지구상의 종 중에서도 인간에게만 존재하는 능력이었다. 하지만 딥러닝이 개발되면서 기계의 판단은 점점 인간의 판단력을 따라잡고 있으며, 그 발전 속도는 점점 빨라지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2016년의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었고, 그 결과는 다들 알다시피 알파고의 5전 4승 승리였다.

인공지능이 점점 보편화되어 갈수록 사람이 설 자리는 없어진다. 이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고, 전세계적으로 기술이 발달하면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당연한 결과이다. 인공지능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임금을 줄 필요도 없고, 인권에 대해 따질 필요가 없으므로 24시간 1년내내 일을 시킬 수 있으며, 사람처럼 지치거나 하지 않고 에너지만 공급하면 언제든지 일을 할 수 있다. 여기에 판단 능력이 점점 인간에 가까워지고 있으므로 인공지능이 활약할 영역은 계속해서 늘어날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있어서는 고전적인 일자리가 줄어든다는 뜻이다. 기계는 인간이 할 수 없는 영역을 예전에 넘어서고 있었다. 앞서 이야기한 부분 외에도, 인간보다 더 빠르고 더 단단하고 더 섬세하다. 가령, 공장자동화와 기계화에 맞서서 영국에서는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었다. 왜냐하면 그때까지 인간이 제공하던 노동력을 기계가 대체하면 인간의 일자리가 줄어들면서 생계가 위험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국의 노동자들은 기계를 파괴하고 자신의 일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시위를 벌였다. 하지만, 매우 당연히, 기계에 일을 시키는 것이 생산 비용의 감소를 가져와서 더 많은 이윤을 남길 수 있었기 때문에 수많은 노동자들의 생계와 함께 공장자동화는 진행되었다. 마찬가지로, 인공지능에 의해 인간의 지능이 필요한 부분이 대체될 수 있다면, 인간은 결코 인건비 싸움에서 인공지능에게 이길 수 없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만 살 수 있으며, 기계처럼 휘발유나 220V전기를 먹고 살 수는 없기 때문이다.

고전적인 일자리의 감소는 두가지 의미가 있는데, 하나는 고전적인 세대의 생계가 위험해진다는 뜻이고, 다른 하나는 먹고 살기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인간이 기계가 할 수 있는 영역에서 기계와 경쟁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기계는 할 수 없고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새로운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해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이 두가지 사건의 의미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여기서 고전적인 세대의 생계가 위협받는 것을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이며, 새로운 일자리를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이다.

여기서, 내가 말하는 고전적인 세대를 잠시 정의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고전적인 세대는 그 이후 세대와 비교할 때 나이가 더 많기 때문에 신체적, 정신적 기능이 전반적으로 떨어진다. 이것은 어느 한 개인에 대해서는 편차가 있을 수 있으나, 인간 전체에 대해서 생각해 본다면 매우 필연적인 현상이다. 신체적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생계에 필요한 돈을 버는데 충분한 시간동안 일을 하기 어렵다는 뜻이고, 정신적 기능이 떨어진다는 것은 새로운 기술이나 기법을 배우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특히, 신체적 기능이 떨어지는 것은 기술의 발달에 의해서 보완할 수 있다고 해도 정신적 기능이 떨어진 것은 아직 기술적으로 보완하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다. 새로운 기술과 기법을 배우지 못한다면, 앞으로 언급할 새로운 종류의 일자리에서 업무를 처리하기 어려울 것이며, 아예 일을 못할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전적인 세대의 생계가 위협받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사람은 일을 하고 받은 돈으로 생계를 꾸려가는데, 그 사람들의 일자리가 인공지능에 의해서 대체될 수 있다면 사람에게 주는 인건비는 점점 떨어져서 인공지능에게 들어가는 비용만큼 내려갈 것이다. 현재는 인공지능이 충분히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인건비가 그렇게까지 떨어지지는 않고 있지만,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로 볼 때 곧 많은 사람들이 생계에 위협을 받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람들은 이 시대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이어서…)

인공지능 앵벌이

앵벌이는 다른 사람에게 구걸을 시키고 거기서 얻은 돈과 물건을 빼앗아 오는 범죄이다. 물론 말할 필요도 없이 매우 나쁜 범죄이며 혹시라도 주변에서 발견한다면 꼭 경찰에 신고하여 처벌을 받게 하도록 하자.

하지만 이 글에서 이야기해보고 싶은 것은 인공지능 앵벌이이다. 앵벌이는 앵벌이인데 인공지능 앵벌이는 또 무엇이란 말인가?

인공지능의 발달에 따라 인간의 판단과 주관이 개입해야 하는 부분이 차츰 컴퓨터에 의해 대체되고 있다. 현재는 주어진 목표 달성을 위해 설계된 인공지능들이 보이고 있으나, 멀지 않은 미래에 범용 인공지능이 나타날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여기서 범용 인공지능이란, 실제로 인간의 판단과 주관을 완전히 또는 거의 대체할 수 있는 수준을 뜻한다.

인공지능은 인간 수준의 판단능력을 갖고 있지만, 컴퓨터 또는 기계에 의해 운용되므로 전원이 공급되는 한 지치지 않고 일을 계속 할 수 있다. 또한, 인공지능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일을 아무리 많이 시키더라도 문제가 없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을 이용해서 돈을 버는 일은 어떨까? 예를 들어서, 택시기사가 자신의 자동차를 인공지능이 운전하는 무인자동차로 교체한 후, 기사 본인은 집에서 쉬면서 인공지능이 택시영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이 일을 다른 사람에게 시키면서 그 사람에게 임금을 주지 않는다면 범죄이며, 당연히 근로기준법에 의한 임금을 주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인공지능이 대체한다면, 인공지능의 주인은 인공지능이 벌어온 돈을 모두 가져갈 권리가 있다.

현재 기계에게 무엇을 대체시키고 있는지 본다면, 가령 집에서 주식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컴퓨터 알고리즘을 이용하여 주식을 초단타 매매하고 여기서 발생한 수익을 가져간다. 컴퓨터 알고리즘은 주식 시장의 변화를 보고 특정 주식이 오를지 내릴지를 판단하여 매매를 결정하는데, 이것은 정당한 거래행위로 간주되어 그 수익은 모두 컴퓨터 주인의 것이다.

다른 사례를 보자면, 컴퓨터 온라인 게임에서 나타나는 오토의 이용이다. 오토는 오토마우스와 오토키보드 등 자동으로 사용자의 입력을 대체하는 프로그램을 줄여서 부르는 말인데, 게이머들은 이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게임을 자동으로 즐긴다. 온라인 게임에서 중요한게 캐릭터의 레벨을 올리는 것이나, 필요한 아이템을 모으는 것 등이 있는데, 이런 것들은 게임의 요소이지만 게이머들에게 지루한 반복을 강요하기 때문에 게이머들은 이런 과정을 피하고 재미있는 부분만 즐기려고 한다. 따라서, 반복적이라는 부분을 적극 활용하여 게이머들은 컴퓨터 프로그램이 자동으로 마우스와 키보드를 입력하도록 하였다. 물론 오토를 사용하는 것은 오토를 사용할 것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또는 오토를 사용하지 못하게 할 것을 고려한 상태에서 설계된 게임의 특성상 게임의 재미를 반감시킨다. 특히, 오토를 사용하지 않는 게이머들이 상대적으로 오토를 사용하는 게이머들에 대해서 박탈감이 들게 되므로 게이머들은 오토를 사용하게 되거나, 그게 싫으면 게임을 그만 두게 되어 게임 회사의 수익이 줄어드는 악영향이 나타난다. 오토를 사용하는 것은 게임의 재미를 줄이고 게임회사에 손해를 끼치는 행위로, 도덕적이지 못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켜서 돈을 벌어오도록 하고, 사람은 그 시간동안 놀고 있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분명 불로소득이지만, 그 인공지능을 구입하거나 제작하기 위해서 들어간 비용이 있을 것이고, 인공지능을 운영하는데 필요한 전기요금과, 인공지능이 사용하는 장비와 기기 구입에도 비용이 필요하다. 이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오직 스스로 갖고 있던 자본과 노력을 투자하여 인공지능에게 일을 시키는 경우, 그 인공지능이 벌어온 모든 수익은 그 사람의 것이 되는 것이 마땅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본질적으로 나태함이 아닌가?

예전부터 나태함은 성경에도 등장하는 인간의 7대 악덕으로, 비난받아 마땅한 성질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기술은 인간이 나태해도 되는 방향으로 발달한다.

하지만 돈을 내고 서비스를 받은 사람들은 그 서비스가 인공지능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화를 낼 것이다. 사람이 직접 하는 것도 아니고 기계가 하는 건데 너무 비싼것 아닙니까? 라면서. 어쩌면 인공지능이 사람보다 더 잘 할 수도 있고, 사람보다 더 안전할 수도 있고, 어떻게 해도 인권침해나 감정노동이라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도 있는데도 말이다. 사람은 사람이 서비스 하는 것이 기계가 서비스 하는 것 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PC방을 한번 보자. 사람들은 PC방에 와서 놀다가 집에 간다. 원래 이 사람들은 PC방에서 놀지 않았다면 각자 한 사람씩 붙들고 놀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했던 일을 기계로 대체하여 PC가 사람과 놀아주고 있다. 여기에 필요한 인력은 PC방 관리하는 인력 단 1명이다. 사람들은 이미 기계가 자신과 놀아주고 있다는 것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이나 거부감을 느끼지 않고 있으며, 사람이 놀아주는 것 보다 기계가 놀아주는 것을 더 선호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온라인 게임의 경우 혼자서 노는 것이 아니라 네트워크 저편에 또 다른 사람이 있기 때문에 괜찮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만약 인공지능이 더 발달한다면? 사람은 대규모 RPG게임에 참여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제외한 그 외 다른 모든 캐릭터가 인공지능이 조종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리고 여기서 인공지능의 행동이 사람과 충분히 유사하다면 (컨트롤도 잘 하고 실수도 가끔 하고 채팅도 할 수 있다!) 그 사람은 자기를 제외한 다른 유저들이 인공지능이라는 사실에 화를 낼 것인가? 아니면 그냥 즐길 것인가?

다시 반대로 생각해 보자. 세상의 많은 물건들은 이미 기계가 만들어내고 있다. 물론 일부 소수의 명품은 수십년간 기술을 갈고 닦은 장인이 직접 손으로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것도 만약 기계에게 작업을 시킨다면 더 좋은 결과물이 나올 수 있고, 그 좋은 명품을 더 많은 사람들에게 더 저렴하게 공급할 수도 있다. 기계가 대체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겠지만, 그런 영역은 기술의 발달로 점점 좁아지고 있고, 사람이 반드시 필요한 부분은 줄어드는 추세이다. 그렇다면 기계가 만들었거나 사람이 만들었거나 같은 품질이라면 같은 가치를 가진 것이고, 기계가 서비스하거나 사람이 서비스하거나 같은 서비스라면 같은 가치를 가진 것 아닐까? 이것은 소비자의 관점이다.

소비자의 관점에서 서비스를 하는 주체가 기계인지 사람인지 상관 없다면, 거기에는 같은 가치를 부여할 것이다. 공급가격은 당연히 기계가 공급하는 경우가 더 저렴하다. 따라서 소비자는 당연히 기계가 공급하는 서비스를 받을 것이다.

이런 일이 앞으로 일어날 미래인데,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시킨 그 주인이 인공지능의 유지 보수 외에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돈을 벌어 가는 것을 어떻게 두고 볼 것인가? 물론 인공지능의 유지 보수가 복잡하고 까다로울 수도 있다. 하지만 기술이 더 발전해서 그런 것도 필요 없이 단지 전기만 공급하면 되는 기계라면, 그런 경우에는 어떻게 볼 것인가?

(다음 글에 이어서…)

거미의 지능

(이 글은 http://snowall.tistory.com/1755 를 보충하여 다시 작성한 글이다.)

거미는 지능을 갖고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서, 우선 지능이 무엇인가 정의하여야 한다. http://en.wikipedia.org/wiki/Intelligence 하지만 백과사전을 참조해봤자 어려운 얘기가 잔뜩 써 있을 뿐이다. 지능이라는 용어는 의식, 기억, 목적, 이런 것들과 구별되어야 한다. 이 용어들은 어느 정도의 관련성은 있지만 완전히 같거나, 어떤 용어가 다른 용어를 완전히 포괄하거나 하지 않는다. 이 점에 대해서 더 긴 논의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이 글에서는 지능에  대해서만 이야기 할 것이고, 그것이 이와 같이 유사해 보이는 다른 용어와 혼동되면 곤란하다는 점만 짚고 넘어가도록 하겠다.

 지능에 대한 유명한 판정법에는 존 설이 제안한 중국어 방 검사가 있다. 중국어 방 검사란 다음과 같다. 어떤 방 안에 사람이 한 명 들어가 있는데 이 사람은 영어만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이 방 안에 중국어로 된 질문을 넣으면 이 사람이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작성해서 내보낸다. 이 작업을 하기 위해서 이 사람에게는 영어로 되어 있는 “중국어 처리방법”이 주어져 있다. 이 책은 중국어 단어의 뜻이나 문법에 대해서는 전혀 나와있지 않으며, 단지 어떤 기호나 단어가 주어져 있을 때 그 기호를 처리하는 방법에 대한 설명만이 나와 있다. 이 책이 충분히 잘 만들어져 있다면, 방 밖에서 중국어로 대화하는 중국어 사용자는 이 안에 중국인이 들어있는지 중국어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있는지 알 수 없다. 또한, 이 책의 규칙은 컴퓨터에 의해서 실행될 수도 있으므로 이 작업을 하는 주체가 컴퓨터인지 사람인지도 구분하기 어려울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질문을 던진다. 과연 중국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인가? 그는 중국어를 어떻게 사용하는지 모르지만, 영어로 된 사용설명서만으로 충분히 질문을 처리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중국어를 이해한 것이라면, 같은 일을 처리할 수 있는 컴퓨터 역시 중국어를 이해한 것일까? 반대로, 컴퓨터가 중국어를 이해하지 않은 것이라고 해야 한다면 중국어 방에 들어간 사람 역시 중국어를 이해하지 않은 것인가? 물론 중국어 방 검사는 지능과 인공지능을 구별할 수 없다는 뜻이며, 인공지능이 완벽하게 대답을 하더라도 그것이 지능이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에 대한 반론으로는, 중국어 방 안에 있는 사람은 중국어를 이해하지 못했더라도 그 사람을 포함한 중국어 방 전체는 중국어를 이해했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주장이 있다. 나는 이에 대해서 아직은 답이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지능에 대한 또 다른 검사 방법이 있는데, 앨런 튜링이 제안한 튜링 검사이다. 튜링 검사 역시 매우 간단한데, 다음과 같다. 여러명의 심사위원을 두고 이 심사위원들이 검사 대상에게 질문을 던진다. 검사 대상은 인공지능일 수도 있고 진짜 사람일 수도 있다. 대화의 공정성을 기하기 위하여 채팅을 이용하는 것으로 해도 좋다. 충분한 대화를 진행한 후, 만약 심사위원들이 검사 대상이 인공지능인지 진짜 사람인지 구분할 수 없다면 이 검사에 참여한 인공지능은 인간과 비슷한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는 것으로 판단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식으로 지능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는 검사 방법들이 제안되어 있다. 여기서 이런 방식의 지능 검사에 대해서 더 깊이 들어가지는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지능 검사를 하기 위해서 대상과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상과 상호작용을 할 방법이 없다면 지능 검사 역시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이 글에서 주제로 삼고 있는 거미의 지능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 거미에게 지능이 있는지 없는지 알기 위해서는, 거미에게 뭔가를 물어봐야 하는데, 거미가 외부와 소통하는 방식은 거미줄이다. 따라서 거미줄을 건드리거나 거미줄 위에서 거미가 움직이는 것들이 거미의 언어라고 말할 수 있다.

거미에게 지능이 있는지 검사하기 위해서는, 지능을 정의하고 그 지능이 “거미의 지능”인 경우 어떻게 검사할 수 있는지 방법을 제안해야 한다.

튜링 검사에서 힌트를 얻어서 지능이 무엇인가 이야기한다면, 지능이란 지능이 있다고 믿어지는 대상으로부터 지능이 있다는 결론을 얻어낼 수 있는 능력이다. 사실 이렇게 지능을 정의하면 지능을 재귀적으로 정의해야 하고, 다른 객체의 지능은 또한 어떻게 알아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끝없이 이어지면서 순환 논리에 빠진다. 다만 일반적으로 인간은 지능을 갖고 있는 것으로 간주되므로 인간을 참조하여 거미의 지능을 판정해 보자.

이제 우리는 거미를 위한 튜링 검사를 설계해야 한다. 앞에서 말했듯이 거미와 대화할 수 있는 방법은 거미줄 뿐이다. 예를 들어, 거미줄의 위쪽 두번째 줄을 흔드는 것은 거미에게 “How are you?”라고 물어보는 것일까? 그렇다면 거미는 그곳으로 달려와서 그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건 먹는 것인가?”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이것을 인간에게 시킨다고 하자. 인간이 거미가 될 수는 없으므로, 실제 거미와 똑같이 생긴 로봇을 만들고, 이것의 조작을 인간에게 맡긴다. 물론 이 로봇은 겉보기에는 거미와 구별할 수 없다. 거미 로봇을 거미줄 위에 올려놓고, 거미줄의 위쪽 두번째 줄을 흔들어 보자. 인간은 거미의 행동패턴을 알 수 있기 때문에 이 경우 그곳으로 달려와서 그곳에 뭐가 있는지 확인하고 “이건 먹는거임?” 이렇게 물어볼 것이다. 인간은 거미가 되었다. 따라서, 검사를 하고 있는 사람은 이놈이 거미인지 사람인지 구별할 수 없다. 인간이 거미를 흉내내고 있음을 알더라도 구별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과 거미는 같은 수준의 지능을 갖고 있다.

이쯤에서 여러분의 마음 속에서는 “그럴듯 하긴 한데, 그건 아니잖아?” 하는 생각이 들 것이다.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만 알려주면 뭐든지 따라할 수 있는 만능 기계와, 그 일만 해야 하는 특수 기계는, 적어도 그 만능 기계가 특수 기계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한 결코 구분이 되지 않는다. 여기서 인간은 만능 기계에 해당하고 거미는 특수 기계에 해당한다.

물론 인간이라면 거미를 따라하다가 실수할 수도 있고, 그렇다면 검사 대상인 거미가(또는 거미 로봇이) 실수할때까지 계속해서 검사를 하여 알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자, 그럼 이제 거미를 똑같이 따라하는 기계를 만들어 보자. 거미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알아낸 거미의 모든 행동패턴을 저장장치에 입력해 놓고, 거미줄에서 특정 입력이 들어오면 그때 거미가 하는 행동을 똑같이 따라할 수 있는 기계이다. 이 기계보고 거미 로봇을 조작하도록 한 후, 튜링 검사를 해보자. 로봇은 인간과 비교해서 실수를 하지 않을테니 보다 완벽하게 거미를 따라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실험에서 만약 둘 다 알려진 행동 패턴 대로만 움직인다면 거미와 거미 로봇은 구별할수 없다. 반대로, 둘 중 하나로부터 알려지지 않은 행동 패턴이 나타난다면, 알려지지 않은 행동 패턴을 한 쪽이 바로 거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거미 로봇은 지능이 없는 기계에 의해서 사전에 입력된 대로 조작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발견한 새로운 행동 패턴은 거미의 새로운 신비를 밝힌 것이다.

다시 인간이 거미 로봇을 조작하는 경우로 돌아오자. 앞서 말했듯이, 거미가 알려지지 않은 행동 패턴을 하는 경우에는 기계가 조작하는 거미 로봇과 구별이 된다. 문제는, 눈앞에 있는 거미줄 위에 있는 거미처럼 생긴 놈이 진짜 거미인지 인간이 조작하는 거미 로봇인지 여전히 구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실수를 해서 거미 로봇의 조작에 실패한 것인지, 거미가 아직 알려지지 않은 행동패턴으로 움직인 것인지 구분할 수가 없다. 이것을 연구하기 위해서 같은 행동패턴이 반복되는지 살펴볼 수도 있지만, 거미 로봇을 조작하는 인간도 바보가 아니라면 같은 행동패턴이 반복되도록 할 것이며, 그러다가 또 실수를 하더라도 여전히 이게 거미인지 인간인지 구별이 가지 않게 된다.

이 논리에 반박하고 싶은 사람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만약 거미에게 지능이 있으면, 이번엔 인간이 하는 것을 따라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은가? 이런 질문을 던지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일단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거미에게 그렇게 하라고 시켜야 한다. 이 시점에서 진지하게 물어보자. 거미에게 “인간을 따라해보렴”이라고 시키려면 거미줄을 어떻게 움직여야 할까? 우리는 그것을 알 수 없다. 정확히 말하면, 아직은 모른다고 충분히 주장할 수 있다. 우리는 거미가 거미줄의 흔들림에 반응하는 모든 패턴을 다 알고 있지만, 또는 모두 다 알 수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미에게 어떤 일을 지시하기 위해서 어떻게 소통해야 하는지 모른다. 거미가 지능을 갖고 있지만 우리가 거미의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그와 대화할 수 없는 것일수도 있고, 거미가 지능이 없어서 거미에게 그렇게 시킬 수 없는 것일수도 있다. 이 두가지 경우는 여전히 구별할 수 없다.

여기서, 나는 거미가 지능을 갖고 있을 수 있다는 것과, 그것에 대해 알 수가 없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이와 유사한 논리는 지능을 갖고 있을 수 있는 다른 생명체에도 적용할 수 있고, 외계 생명체에도 생각해 볼 수 있고, 인공지능의 경우에도 고려해 볼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 아닌 다른 생명체에게 지능이 있음을 또는 없음을 증명하고 싶을 때, 어떻게 해야 확신할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서는 좀 더 고민해보고 추가로 글을 써볼 생각이다.

Proudly powered by WordPress | Theme: Baskerville 2 by Anders Noren.

Up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