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각기동대 (극장판)

2002년 철학의 이해 레포트.

공각기동대 극장판 감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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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인간은 기억에 의존하지 않으면 개인일 수 없다.

공각기동대에서, 쿠사나기 소령은 인간의 육신으로서는 매우 뛰어난 능력을 가진 의체(body)를 갖고 있다. 그러나, 몸을 의체로 바꾸면서부터 이전의 자신은 죽어버리고 여기 남아 있는 자신은 기억장치에 저장된 기억과 프로그램으로 된 고스트로 이루어진 하나의 기계가 아닌가 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닌가 하는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문에 빠지게 된다. 전뇌 그 자체가 고스트를 만들어 내고 혼을 깃들인다면, 그때는 무엇을 근거로 ‘자신’이 존재함을 믿어야 하는가. 이 의문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이다.

인형사는 타인의 고스트와 기억을 조작하여 마음대로 움직이는, 마치 사람을 인형처럼 갖고놀 수 있다는 해커이다. 그래서 인형사이다. 그 인형사는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 후, 쿠사나기 소령이 있는 9과에 스스로 잡혀들어와서 쿠사나기 소령이 갖고 있는 고스트와 융합을 시도한다. 결국 성공한다. 그의 실체는 단지 프로그램이지만, 그 스스로는 자신을 생명체로 규정하고 일본국에 생명체로서 정치적 망명을 신청한다. 그러면서, 현대 과학은 아직 생명을 정의하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그의 논리에 의하면, 자신은 단지 글자의 나열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지만 인간이라는 생명체 역시 DNA 속에 담겨진 프로그램에 따라 작동하는 기계일 뿐이므로, 마찬가지로 자신도 생명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 후에 스스로도 지적했듯이, 그는 프로그램이므로 자신의 복제를 만들 수는 있어도 스스로 변이를 일으켜서 자손을 남길 수는 없다. 그러므로 그에게는 생명체로서의 조건이라 할 수 있는 종 다양성이 결여되어 있고, 완벽한 생명체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래서 그는 쿠사나기 소령의 고스트와 융합하고, 마침내 “둘”이라는 개념에서 “하나”라는 개념으로 바뀐, 전혀 다른 개체가 된다.

그 둘은 죽음에 대하여 비슷한 사고를 갖고 있는데, 쿠사나기 소령은 죽으면 그 뿐, 사라지는 것, 그 이외에 아무것도 아니라 한다. 인형사 역시 인간은 죽음으로 인한 기억과 정보의 단절이 진화의 원천이 될 뿐, 죽음 자체는 자료의 삭제에 불과하다고 한다. 융합된 후의 쿠사나기 소령(사실 양쪽의 어느쪽도 아니지만, 편의상 그렇게 호칭한다)은 어디론가로 떠나면서 “net는 넓다”고 말한다. 그가 인식할 수 있는 세계가 현실과 일부분의 네트에 불과했던 상태에서 인형사의 능력으로써 더 큰 세계를 인식할 수 있도록, 그의 인식가능한 세계가 네트 전체 영역으로 확장된 것이다. 즉, 그는 모든 형태의 정보에 접근할 수 있으며 그만큼 정보의 바다 어딘가에 있을 “진리”에 더 가까워 진 것이다.

2.나의 존재에 대한 이야기.

나는 분명히 존재하고 있다. 우리는 존재하는 것만을 인식할 수 있다. 추상적인 개념이던지, 아니면 구체적인 물질이던지,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는 없다. 우리는 스스로의 존재함을 인시할 수 있으므로 존재한다. 그런데, 인식할 수 있다고 해서 존재하는가.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아니오”라면 위의 논리는 맞다. 그러나 만약, “예”라고 한다면 위의 논리는 기초부터 무너진다. 인식한다.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다. 이 명제에 대한 예는 공각기동대에서 등장했던 “청소부”가 있다. 그는 존재하지도 않는 별거중인 마누라와 딸을 실제로 존재한다고 인식하였다. 이것은 인형사가 고스트 해킹을 통하여 그의 기억을 조작하는 것으로써 그렇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런 조작이 가능하게 된 것은 인간이 인간의 기억체계(system)에 직접적으로 접근이 가능하게 된 “기술” 때문이다. 인형사는 이 점을 적절히 이용한 것이다. 만약, 우리의 기억이 조작될 수 있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믿을 수 없고, 기억에 의존하여 사고하는 형태로서는 마찬가지로 자아를 믿을 수 없게 될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지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자아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이다. 설령, 기술이 기억을 조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인간의 기억은 망각되면서 사라지고 경험하면서 새롭게 기록된다. 또, 어떤 기억은 그 내용이 뒤바뀌어서 기억되어 있기도 한다. 그리고 외부의 저장장치를 이용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내용을 기록해 둔다 하더라도 잃어버릴 수도 있고 누군가에 의하여 변조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 즉, 기억은 계속해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더 이상 기억에 의존하는 사고방식으로는 자아를 정확히 특정지을 수 없다는 것일까.

기억에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는 사고방식을 기억을 통한 이성적 판단 중심이 아닌 감정과 본능 중심의 사고로 전환시켜야 한다. 이렇게 되면, 과거의 기억에 의한 행동방식보다는 현재의 입력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 나타나므로 기억의 조작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진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결국 원시시대의 본능적 생활상으로 돌아가자는 주장이된다.

다른 각도에서 살펴보자면, 기억은 조작되어야만 한다. 만약 기억이 조작되지 않은 채, 실재했던 과거 그대로 저장이 된다면 기쁜일은 물론이고 싫은 기억, 나쁜 추억마저도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 잊고싶어도 잊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어쩌면 망각해서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아예 알지 못하게 되는 것 보다 더 큰 고통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기억에 있어서 어느정도의 정보조작은 필연적이라는 의미이다.

기억된 존재로서의 주체성, 상실된 자아의 회복을 위하여 결국은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 남지 않는다. 기억에 의존하지 않고서는 과거로부터 발전해 온 현재를 포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곡되고 망각되어서 변질된 기억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가치를 갖고 있다고 해 보자. 그렇게 해서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렇게 해서 그 기억이 현실과는 전혀 틀리다 하더라도 자신이 그것이 실재임을 믿는다면, 그것으로서 자신이 존재함을 새롭게 인식하고 다시 살아나면 되지 않을가. 아까 예로 등장했던 청소부의 경우, 기억이 조작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갈 수는 없다. 그렇다면, 그는 그 상태를 현실로 받아들이고 자신의 기억이 조작되었다는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자아를 구성하여 인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그는 자아상실로 인하여 괴로워할 필요도 없고 좌절할 이유도 없다.

하지만 모든 인간이 이렇게 속편하게 살 수는 없을 것이다. 자신의 기억이 조작된 것을 알고 나면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폐인의 길을 걷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여러 가지 경우가 가능하다. 해결방법은, 스스로의 자아를 절대적인 고정적인 실체로 놔두려고 하지 않고, 상황에 맞게 변화해 나가는 유동적, 능동적인 모습으로 설정하는 것이다. 자아 그 자체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인간이 자신의 자아를 어떤 방식으로든 설정할 수는 있다. 틀린 설정이라면 괴로울 테니, 틀린 자아 설정으로 괴로워 하기 보다는 변화를 주어서 새로운 자아를 찾아내자는 뜻이다. 이것은 다른 사람의 말이나 유행 따위에 휩쓸니는 것과는 다르다. 휩쓸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확고한 주관을 갖고 그 주관에 의해서 자신의 자아 설정을 진짜 자아에 맞도록 바꿔가는 것이다. 자신이 설정한 틀린 자아에 너무 얽매이지 않고, 항상 열린 마음으로 자신과 세계를 바라보면 된다.

3.자아

자신을 자신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근거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몇가지의 예를 들어보자면, 신경을 통하여 느낄 수 있는 신체의 각 부분, 생각하는 것으로 실재한다고 느껴지는 정신 또는 영혼, 그리고 과거를 회상하면서 느낄 수 있는 자신이 경험했던 일들의 기억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할 수 있는 주체는 주체 자신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순간 주체는 다시 어디론가로 사라지고 그것을 알아차렸다는 기억과 사고만이 남게 된다. 진정한 자아라는 것은 찾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찾아내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자아를 찾아가는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이유가 되지는 않는다. 쿠사나기 소령은 융합 후에 다시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을 떠났다. 융합 전의 각각은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고, 융합 후에도 자아가 어디있는지 모르지만, 그는 단지 떠났다. 적어도, 자아에 대해서 찾아가다보면 그 근방, 자신의 실제 자아에 가까운 여러 가지로 다른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좀 더 확실한 자아 설정을 결정할 수 있다.

자아란, 자기가 자신을 생각하는 형태중에서 가장 근본적인 모습이다. 나는 이기적이다, 열정적이다, 축구를 좋아한다, 20살이다. 등등. 자신을 나타낼 수 있는 말은 아주 많이 있다. 그러나 그 각각이 나의 본질은 아니다. 그 모든 것이 합쳐져서 나의 모습을 이루고 나의 본질을 가르쳐 주는 것이다.

생명은 인형사의 말대로 DNA로 이루어진 프로그램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생명은 단순한 프로그램이 아니다. 끊임없이 변이를 만들어내고 차츰 다양화되면서 그렇게 진화해 나갈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기억이 정보의 집합이고, 이것을 이용하여 새로운 결론을 유도하는 사고 작용이 연산이라면, 컴퓨터 프로그램과 인간의 작동 방식은 매우 유사하다. 공각기동대의 세계관에서, 이 유사성은 극도로 접근하여 아예 일치하여 버렸다. 인형사라는 컴퓨터 프로그램이 스스로를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은 곧 그 프로그램에 “자아”가 형성되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컴퓨터 프로그램은 정보를 입력받아서 지정된 연산을 거쳐 결과값을 출력한다. 그 이상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즉, 자신 자체에 대한 입력을 받아서 “나”라는 결과를 출력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인형사의 경우는, 고도로 잘 짜여진 인공지능 프로그램이어서 그것이 가능했고, 그러므로 쿠사나기 소령과의 융합은 쿠사나기 소령의 고스트에 대하여 기능의 추가가 아닌 자아와 자아와의 완벽한 통합이다.

나는 이 세계 속에서 살고 있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중에서 어디까지를 “나”로 인정해야 하는 것일까. 쿠사나기 소령은 융합전에는 인형사를 자신으로 인식하지 않았고 그럴수 조차 없었다. 물론, 융합 후에는 전혀 다른 새로운 인격(=ghost)이 되었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이렇게 놓고 보면, 이건 자아와 비자아를 혼동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제적으로 자아와 비자아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은 전무하다시피 하다. 즉, 자아와 비자아 사이의 구별이 확실해서 어디까지가 자아, 어디서부터 비자아인지 알고 있는 것이다. 그것을 말하라고 한다면 보통은 자신의 신체와 자기가 생각하고 있는 모든 것들을 “나”, 즉 자아로 인정한다. 그런데 기억은 경험에 의해 저장되고, 경험은 신체가 외부 세계와 상호작용하면서 겪게 되는 것인데, 신체는 정신이 아니라 세계에 속해 있는 부분이므로 엄밀히 말한다면 자아에 포함되지 않는다. 그러나 자아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신체가 없다면 절대 정신이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세상의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도대체 “자아”인가.

존재하고 있으나 어디에 있는지 알지도 못하는 자아의 위치를 규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지만 자아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는 알 수 있는데, 자아는 나의 몸 전체와 나의 사고방식을 총괄한다. 즉, 이 두가지 영역에 대해서만 직접적 영향을 행사할 수 있다.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들여다 볼 수 없는 것은 다른 사람은 나의 구성 요소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나의 자아가 신체에 작용하여 나타난 행동 양식에 의한 간접적인 영향을 줄 수밖에 없으며, 이런 영향으로는 다른 사람의 마음 속을 알게 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자아와 자아 사이의 직접적인 교류나 교감은 불가능하다. 이것은 자아에 직접적으로 접근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의미와 같다. 그러므로 타인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동시에 자신을 이해하는 것 역시 불가능하다. 끝없는 자기 합리화만이 있을 뿐이다.

4.결론

인간은 불확실한 기억을 더듬어 사고하며 자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스스로의 자아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자아의 실체는 찾아낼 수 없으며 다만 그 근처에 있는 자아의 성격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모든 기억과 기록은 조작될 가능성이 있고, 현실은 그 자체로 진실이 아닐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따지다보면 세상에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자아 자체도 믿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것들을 모두 불신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나름대로의 주관을 갖고 진실과 거짓을 분리하여 받아들이면서 불안한 정신적 기반 위에 서 있긴 하지만 자신의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며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공각기동대에서는 자아에 집착하지 말라고 말한다. 지금까지 위에서 말한 모든 문제점들은 결국 자아를 확인하려하고, 규정하고, 거기에 집착하기 때문에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집착하기를 포기하고,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편안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가 있다.

어린아이일 때에는 말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 생각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 논하는 것도 어린아이처럼이지만 사람으로 되기에는 어린아이인 것을 버리도다.

지금 우리들 거울로 보는 것처럼 보는 곳 어렴풋하도다.

2 thoughts on “공각기동대 (극장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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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그렇다고 기억이 확실해지면 미쳐버릴지도 몰라요.

    저는 인간이 정신적으로 건강하려면 많이 잊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2. 사람이 추상화하고, 분류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유는 자신의 불확실한 기억을 믿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네요.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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