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산물리학 진로상담

저는 수학적 재능이 이론가가 될 정도로 뛰어나지 않고, 너무 추상적인 분야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합니다. 때문에 펜과 종이만 가지고 하는 하드한 이론물리는 하고싶지 않습니다. 이런 제가 흔히 이론물리로 분류되는 전산물리 랩실에 들어가도 괜찮을까요?혹시 제게 적합한 연구분야를 추천해 주실 수 있으신가요?

– 질문자

안녕하세요. 제가 조언해드리는 것이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으나, 최대한 제 경험과 지식에 기반해서 답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만, 누구 한 사람의 조언을 듣고 결정하기보다는 최대한 많은 정보를 찾아보고, 다양한 조언을 들어본 후 결정하는 것이 좋겠네요. 특히, 장점보다는 단점 위주로 듣고 결정하세요.

고민의 주제는 연구 방법론에 관한 질문이네요. 이론, 실험, 전산 중 어느 것을 선택하는가는 연구 분야가 아니라 연구 방법에 관한 질문입니다.

전산물리학은 이론으로 분류되기는 하지만 이론물리학 중에서는 실험에 가장 가까운 분야입니다. 전산물리학을 연구하게 된다면 어떤 물리적 상황에 대해서 적당한 방정식을 만들고, 방정식을 조건에 맞게 풀이해서 결과를 얻겠죠. 그 결과를 실험 결과와 비교하고, 해석적 결과와 비교합니다. 그 결과를 정리해서 논문을 작성합니다. 전산물리학이 실험과 가까운 이유는, 수학적으로 해석적인 결과를 얻기 어려운 문제에 대해서 실제 실험 조건에 가까운 초기값과 경계조건을 넣어서 문제를 풀이하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실험에서 시편을 마운트에 올리고 레이저를 쏘아서 무슨 빛이 방출되는지를 관찰하는 실험을 한다고 해 보죠. 그럼 전산물리학에서는 시편의 구조, 성분, 온도, 레이저의 파장, 출력, 편광 방향 등의 조건을 설정하고 문제를 설명하기 위한 가설에 따라 방정식을 세웁니다. 고체물리학에서 레이저를 쏘는 경우라면 전자기파에 의한 섭동이 작용하는 슈뢰딩거 방정식이 되겠네요. 그리고 이 방정식을 풀이합니다. 만약 이 방정식이 실험 상황을 적절히 기술하고 있다면, 방정식을 컴퓨터로 풀이한 결과와 실험으로 측정한 결과는 오차 범위 내에서 같아야 하고, 만약 다르다면 왜 다른지, 얼마나 다른지 해석할 수 있어야겠죠. 이 과정을 반복하면 전산물리학 연구가 됩니다.

전산물리학의 장점이자 단점은 이론과 실험 사이에 끼어 있다는 건데요. 전산물리학은 어디까지나 실제 실험을 컴퓨터로 흉내내는 기법을 주요 도구로 이용하기 때문에, 전산물리학의 결과가 실제 자연에서 일어난다고 보증하기는 어렵습니다. 즉, 전산 시뮬레이션 결과와 실험 결과가 잘 일치한다고 해도 누군가 그게 우연이라고 반박한다면 우연이 아니라는 근거를 대기가 어렵다는 것이죠. 물론 전산물리학 전공자들은 이 부분을 방어하기 위해서 많은 테크닉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만약 아직 아무도 해석하지 않은 물질을 시뮬레이션 한다거나, 실험으로 측정할 수 없는 상황을 시뮬레이션 한다거나, 이론적으로 방정식이 알려지지 않은 상황을 시뮬레이션 한다거나 하는 등, 최첨단 연구를 할 경우에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질문이 등장합니다.

“당신의 시뮬레이션은 현실을 잘 반영합니까?”

전산물리학 연구는 코드를 잘 짜고, 문제를 잘 풀고, 그런 과정도 필요하지만 그건 말할 필요도 없는 기초중의 기초이고, 그보다 현실이 시뮬레이션에 잘 반영되어 있는지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것이 훨씬 중요합니다. 코드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도록 하기는 어렵지만, 코드를 적당히 짜서 시뮬레이션 결과를 실험 결과와 일치하도록 조작하는 것은 매우 쉽거든요. 컴퓨터로 계산한 결과가 실험 결과와 일치한다고 시뮬레이션이 제대로 되었다고 믿으면 안되고, 모니터에 떠 있는 숫자와 그림은 아무것도 아무도 안 믿기 때문에, 자신의 코드가 실제 물리 현상을 얼마나 잘 반영하고 있는지 설명해야 합니다. 실험물리학의 경우, 사용설명서 읽고 측정 장비를 제대로 썼다는 것만 확실하면 모니터에 써 있는 숫자가 의미를 몰라서 그렇지 현실을 반영한 숫자라는 것은 명백합니다. 그런데 전산물리학은 그조차도 안됩니다. 이게 전산물리에서 가장 어려운 부분입니다. 전산물리학을 전공으로 학위를 받았다면 이런 것들을 잘 할 수 있다는 인정을 받은 것이죠.

참고로, 시뮬레이션 툴은 각 분야별로 다양하게 개발되어 있는 것이 많기 때문에, 많은 실험물리학자들은 자신의 실험을 시뮬레이션하는 코드를 갖고 있습니다. 이론물리학자들도 방정식을 세우기는 했지만 실제로 수학적으로 폴 수는 없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컴퓨터에 의한 시뮬레이션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죠. 따라서, 여기서 ‘전산물리학’이라는 걸 전공했다고 하려면 그렇게 부업으로 시뮬레이션 돌리는 사람들이 하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이 알아낼 수 없는 것을 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령, 실험으로 어떤 시편을 측정했을 때 측정 결과는 얻을 수 있지만, 시편 내부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는 알아내기 어렵겠죠. 이런 부분에 대해 시뮬레이션이 내부 정보를 제공할 수 있다면 실험이나 이론으로 할 수 없는 주제를 연구하는 것이 됩니다. 그리고 시뮬레이션이 현실을 잘 반영해야 하는 이유는, 시뮬레이션 결과를 해석하여 시편 내부에서 어떤 현상이 일어난다고 했을 때 실험을 하지 않고도 그 주장을 믿으려면 시뮬레이션이 현실을 반영해야 하기 때문이죠. 전산물리학은 바로 이 부분을 연구합니다.

컴퓨터로 코드 짜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유로 전산물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본인이 좋아하는 것이 물리학인지 전산학인지 고민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순수하게 컴퓨터 자체에 관심이 많은 것이라면 그건 계산과학이나 전산학이라는 분야로 나눠져 있습니다. 공대로 가세요. 전산물리학 전공을 하려면 일단 전산+물리학이기 때문에 둘 다 잘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론물리학의 한 분야이기도 하므로 추상적인 물리학에도 강해야 하고요. 실험에 굉장히 밀접한 관련이 있는 분야이기 때문에 실험 상황을 구체적으로 해석해서 코드에 반영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한 실험을 본인의 시뮬레이션에서 구현해 보고 싶다면 당연히 실험물리학에 대한 지식도 필요하겠죠. 만약 물리학을 좋아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리고 그 중에 특히 전산물리학에 관심이 있다면 그 경우에 전산물리학 전공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네요.

대학원에 가기 전부터 전산물리학을 공부하기에 적합한 자격, 실력, 조건 등을 다 갖추고 입학할 필요는 없지만, 본인이 학위과정을 끝내고 나서 얻고 싶은 능력, 실력 등이 위에 설명한 것과 같다면 도전해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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