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그랑지안?


<br />

우선 이 글을 참고하고 와야
한다



.






http://snowall.tistory.com/5



라그랑지안



(Lagrangian)



이란



,



수학자 라그랑지



(Lagrange)




이름이 붙은 어떤 함수이다



.



라그랑지랑 친하냐고 묻는다면



,



뭐 내가 태어나기 전에 죽은 사람이라
본적도 없는 사람인지라 뭐라 할말이 없다



.



비슷한 놈으로 해밀토니안



(Hamiltonian)




있다



.



유명
가수 “토니 안”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이것 또한 어떤
함수이다



.


이놈을 이해하기 위해서 이해해야
할 개념이 꽤 많다



.
(



사실 나도 다 이해하진 못했다



.)


라그랑지안을 이해하기 전에
우선 함수가 뭔지를 이해해야 한다



.



왜냐하면 라그랑지안은 함수 중에서도
이해하기 어렵다는 범함수



(functional)



이기
때문이다



.


함수란 두 집합을 연결해주는
규칙이다



.



가령



,



두 집합



A,
B



가 있다고 하면



A




어떤 원소



x




불러줬을 때



B




어떤 원소



y




알려주는 것을 함수라 부르고 그것을



f



라는
기호로 쓴다고 하면



,
y=f(x)



라는 식으로 표현한다



.



범함수라고 하는 것은



,



집합



A




적당한 벡터공간이고 집합



B




실수



(Real number)




주어지는 함수들이다



.



예를 들어



,
3



차원 공간에 어떤 벡터



x




있을 때



,




벡터와 특정한 벡터



(0,
0, 1)



의 내적 값을 함수값으로 갖는



,



그런 함수를 범함수라고 부를 수 있겠다



.


이제 본격적으로 라그랑지안에
대해서 얘기를 해 보자



.



범함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으면
그때그때 보충해 나가도록 하겠다



.


물리학자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값 중에 “에너지”라고 부르는 것이 있다



.



에너지에는 두가지 종류가 있는데



,



하나는 운동에너지이고 하나는
위치에너지이다



.



질량에너지라고 부르는 형태의 에너지도
있지만 이것은 사실 위치에너지의 한 형태이기 때문에
굳이 얘기하지 않겠다



.



다들 잘 알다시피



,



이 우주에서 어떤 물리학적인 과정이
일어나고 있을 때



,



그 과정이 일어나는 전체 계가 그 과정이
일어나지 않는 다른 부분들과 전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고 하면



,



그 과정이 일어나는 전체 계의 전체
에너지는 항상 같은 값을 갖는다



.



여기서



,



전체 에너지란 각 부분들의 모든
운동에너지와 모든 위치에너지를 계산해서 단순히 다
합친 값이다



.



여기서



,



바로 탁



!



하고 떠올라야 하는 점은



,



에너지라는 것이 앞에서 설명한 범함수에
해당한다는 점이다



.



운동에너지는 “속도”라든가
“운동량”이라는 벡터를 이용해서 하나의 수를 찾아내는
함수이고



,



위치에너지는
“위치”라고 하는 벡터로부터 하나의 수를 찾아내는
함수이다



.



따라서



,




전체 에너지”라고 하는 값은 “속도”
벡터와 “위치” 벡터로부터 하나의 수를 찾아내는
함수가 된다



.



그럼



,



속도 벡터 공간과 위치 벡터 공간을
합쳐서 하나의 벡터 공간이라고 치고



,



이 벡터 공간에서 하나의 벡터가 주어지면
그에 맞는 실수 값 하나를 찾아내는 함수가 바로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



위치 벡터와 속도 벡터를 합쳐서 하나의
벡터 공간으로 만든 공간의 이름을 위상 공간



(Phase
space)



이라고 부른다



.



우리가



,



어떤 물체의 움직임을 알고 싶으면
어디로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지 알면 충분하기 때문에
위상공간에서 그 물체를 나타내는 점의 움직임을
추적하면 된다



.



라그랑지안이라는 것은 그 움직임을
추적하기 위해 필요한 그 어떤



,



무언가이다



.






,



생각해 보자



.



등속 직선운동을 하고 있는 물체의
움직임은 위상공간에서 어떻게 표현될까



?
6



차원의 적당한 공간을 상상할 수 있는
상상력이 절실한 시점이지만



,



수학적으로 엄밀해지지 말자



.



포기하면 편하다



.



어차피 수학적 엄밀성은 고전역학
교과서를 보면 자세히 설명되어 있으므로 여기서는
굳이 안 따지겠다



.
(



그렇다고 틀린 내용은 아니다



.



단지 엄밀한 논증을 거치지 않을
뿐이다



.)



등속직선운동을
하는 물체의 위치는 계속해서 어디론가 가고 있고



,



속력은 고정되어 있다



.



따라서 공간축 방향에 대해서는 평행하게
움직이고 속도축 방향에 대해서는 수직으로 움직일
것이다



.



도저히
상상이 안가면 공간축



1







,



속도축



1



개만
써서



2



차원
위상 공간을 그려놓고 직접 그려봐도 된다



.



그 다음으로 복잡한 등속 원운동은
어떻게 표현될까



?



이것은 위상공간에서는 타원운동으로
표현된다



.



이런식으로
점점 복잡한 운동에 대해서 위상공간에서 어떻게
움직이는지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상상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



뭔가를 하기 위해서는



,



좀 더 엄밀한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



그렇게 하기 위해서 뭔가를 한번 조금
구체적으로 계산해 보자



.



서울에서 부산까지 가는데



,



우리가 경부고속도로를 맘대로 정하고



,



또한 각 구간별 제한속도까지도 맘대로
정할 수 있다고 하자



.



어떻게 하면 가장 효율적으로 도로를
설계할 수 있을까



?



전설에 의하면



,



박정희 대통령이 대한민국 전도를
보고서



,




자를 서울과 부산 위에 놓고



,



수성사인펜으로 직선을 그어서 현재의
경부고속도로의 설계가 완성되었다는 얘기가 있다



.



굳이 이런 말도 안되는 전설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



상식적으로
직선으로 그어준다면 가장 좋을 것이다



.



그리고 거기에 제한 속도는 안전 운전이
가능한 최고속도로 정해준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



이정도
얘기는 물리학을 싫어하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



하지만 왜 직선이어야 하는지



,



그것은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



강원도 지방을 돌아서 가면 뭔가 손해가
나는 걸까



?



바다를
보면서 가면 안됩니까



?


예를 들어서



,
100kg



의 자동차가 초속



100m/s




속력으로 달려간다고 하는데



,



경부고속도로가 직선으로 가는 경우와
강원도를 거쳐서 가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



일단 고속도로 위에 차는 내차 한대밖에
없기 때문에 길이 막히는 일은 없다고 하자



.



아니



,



상식적으로 봐도



,



멀리 돌아가면 기름이 더 많이 들어가지
않을까



?




멀리 돌아갔는데 기름이 더 적게 들어간다는 상황은



,



웬만해서는 상상하기 힘들다



.



무엇이 기름을 더 많이 들어가게 한
것일까



?




오래 걸렸기 때문일 것 같다



.



가장 기름을 적게 들어가도록 하려면



,



어떤 경로를 선택해야 할까



?





(



다음
글에 계속



…)





(



기름
소모량과



Action



사이의 관계에 대해 생각중입니다



.)



로그 스케일 눈금 읽는 법




그림 :

http://wpcontent.answers.com/wikipedia/en/8/83/LogLogPlot_of_Line.GIF


로그 눈금을 읽고 싶은데,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에는 눈금이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중간쯤 있다고 해서 그냥 0.5 정도로 칠 수도 없다.

이럴때는, 자를 이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서, 위에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의 x좌표를 읽고 싶다고 하자.

A라는 값을 10과 100사이의 거리로 둔다.

B라는 값을 10과 화살표로 표시한 부분 사이의 거리로 둔다. 이 두가지 거리는 자를 이용해서 재면 된다. 자가 없으면 모니터 화면에서 픽셀 수로 측정하든, 어림잡든, 아무튼 같은 단위로 재기만 하면 된다.

그럼 r이라는 값을 r=B/A 라고 정한다.

x좌표의 값은 이제 10^{(1+r)}이 된다.

참 쉽죠?

연습문제 : 위 그래프의 y축은 로그 눈금으로 100000단위만큼씩 떨어져 있다. 이 경우에는 도대체 어떻게 읽어야 할까?


답보기

추가

1과 10 사이에 있는 값을 읽고 싶은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r을 일단 찾아서 계산하면 된다. 여기서 r이 제공하는 것이 로그의 ‘가수’ 부분임을 생각하면 쉽게 알 수 있다. 지표가 0이고 가수가 r인 로그의 원래 값을 찾으면 되므로, 10^r이 답이 된다.

0.1과 1사이에 있는 값이라면 10^{-1+r}이 된다.

그렇다. r앞에 더해주는 값은 ‘지표’ 부분이고(로그값의 정수부분) r은 ‘가수’가 된다.(로그값의 소수부분)

이건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므로 정석을 다시 찾아보자.

우울한 편지



우울한 편지 (by 유재하)

일부러 그랬는지 잊어 버렸는지

가방안 깊숙히 넣어 두었다가

헤어지려고 할 때 그제서야

내게 주려고 쓴 편지를 꺼냈네

집으로 돌아와서 천천히 펴보니

예쁜 종이 위에 써내려간 글씨

한줄 한줄 또 한줄 새기면서

나의 거짓없는 마음을 띄웠네

나를 바라볼 때 눈물 짓나요

마주친 두 눈이 눈물 겹나요

그럼 아무 말도 필요없이 서로를 믿어요

어리숙하다 해도 나약하다 해도

강인하다 해도 지혜롭다 해도

그대는 아는 가요

내겐 아무 관계 없다는 것을

우울한 편지는 이젠

==================

원래는 유재하의 곡이다. 내가 이 곡을 처음 접한 것은 “이윤정”의 솔로 앨범에서였다. 이윤정의 “파라다이스”나 “통제가 안돼”같은 신나는 곡도 있고 “불면증”같이 내 마음에 쏙 드는 곡도 있지만, 가장 가슴 깊이 울리는 곳은 이 곡이더라. 알고보니 이윤정의 곡이 아니라 다른 사람, 유재하의 곡이다. 누구든, 단순한 가사 속에 가슴을 울리는 감정을 담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대단한 것 같다.

수학자는 오덕후들일지도

이 글의 내용은 제목에 함축되어 있다. 뭔 헛소리냐능…

function이라는 수학 용어를 살펴보자. “함수”라는 뜻이다.

functional이라는 수학 용어를 살펴보자. 이 단어의 의미는 “함수라는” 뜻이다.

하지만.


http://en.wikipedia.org/wiki/Functional_%28mathematics%29


수학계에서 이 단어는 명사다. -_-;

vary 는 “변한다”는 뜻이다. 이 단어의 명사형은 variation이다. 물론 그 의미는 “변화”이다. 수학에서 variable이라는 단어를 쓰는데, 변수라는 뜻으로 쓴다.

근데, 이 단어들을 사실 잘 해석해 보면…

“이 집합의 원소들은 사실 함수라능…”

“이 함수를 변화시키는 것은 변수라능…”

…이렇게 해석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주장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물리학자들도 그 영향을 받아서 Observable이라는 단어를 쓴다. 관찰량이라능…-_-;

이 글은 수학/물리학/과학이랑 아무 관련 없는 개그라능…

추가 : ensemble은 이 글과 아무 관련 없다. 오해 없기를 바란다능… 나의 통계역학은 그렇지 않아!

우리는 왜 남을 보고 희망을 가져야 하는걸까

이번 올림픽 관련해서 그다지 글을 많이 쓸 생각은 없지만, 자꾸 잡념이 떠올라서 기록해 둔다.

올림픽도 끝나가고 하면서, 외국에 나가서 선전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대표 선수들을 보며 사람들은 “나도 할 수 있어!”라고 하는 꿈과 희망을 품는다. 그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러면서 동시에 떠오르는 질문이 있다. 왜 선수들을 보면서 희망을 품을 수밖에 없을까? 국가대표 선수들이 부진하더라도 희망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김연아 선수가 금메달이 아니더라도, 메달을 따지 못했더라도, 나는 잘 하면 되는거 아닐까?

희망을 자기 자신의 내면에서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굳이 다른 사람을 보면서 희망을 갖지 않더라도.

재미와 행복

인생이 행복할 것이 보장되어 있다면, 재미는 없었을 것이다.

인생이 성공할 것이 보장되어 있다고 해도, 역시 재미가 없었을 것이다.

성공할 것 같은 것을 성공해 내는 것도, 불가능한 것을 이루어 내는 것도, 가능성의 영역의 일을 현실로 만들고 있기 때문에 할만한 것 아닌가?

“생존” – 살아서 존재함 – 그 자체에 의미를 두지 못하고, 거기에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찾아내려고 하는 생명은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부모는 자식들 때문에 돈을 벌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있기 때문에 도전하고, 궁금한 것이 있기 때문에 공부한다.

이 세상이 꿈이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게 된다. 꿈을 꾸고 있어도 현실은 현실이고, 꿈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로 현실이다. “꿈”이라는 대명사로 요약할 수 있는, 나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는 것은 두렵지 않다. 정말 두려운 건 그걸 갖고 있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

이재율씨의 의미없는 댓글

이재율씨는 자신의 증명이 틀렸다면 자꾸 반례를 들으라고 하는데…

나를 포함해서, 다른 사람들이 지적하는 부분은 “증명 과정에 오류가 있다”인 것이지 “이재율씨의 주장은 거짓이다”가 아니다. 즉,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일 수 있지만 증명 과정에는 오류가 있다는 것이다.

만약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이라면 우린 절대로 반례를 제시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재율씨의 주장이 참이라는 것이 “증명”되는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그의 주장은 이미 참이라고 증명된 “페르마의 마지막 대 정리”이다. 우리는 그 증명이 참이라고 생각하므로 당연히 반례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다시한번 얘기하지만, 수학자들은 이재율씨에게 “증명 과정에 오류가 있다”고 지적했음을 제발 고려해 주기 바란다.

내가 이재율씨에 관해서 쓴 글을 잘 읽어보고, 또한 다른 사람들이 이재율씨의 오류를 지적한 글을 잘 읽어보자. (이재율씨도 마찬가지다.)

논리의 전개 과정이 불분명해서 해당 주장을 믿기 힘들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있지만, 그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그건 당연한 일이다. 어떤 주장이 거짓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은 그 주장이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은 어려움을 갖는 일이다.

어떤 명제 P의 참/거짓을 가리고 싶을 때, 부정하고 싶으면 반례를 1개만 제시하면 된다. 하지만 반례를 제시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것이 “참”이라는 것은 증명되지 않는다. 참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반례가 절대로 나올 수 없음을 증명해야 한다. (비슷한 논리로, 창조론자들의 진화론을 부정하는 증명이 있다. 이건 수학적 논의는 아니므로 여기서는 넘어가자.)

다시한번 말하지만, 자신의 주장이 다른 사람에게 참이라는 것이 받아들여지도록 증명할 책임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 쉽게 말해서, “명제 P는 참이다”를 증명할 책임은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고, “이미 참이라고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명제 Q의 증명에는 오류가 있다”를 증명할 책임도 또한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에게 있다. 물론 이재율씨의 명제는 “이미 참이라고 증명되었다고 생각하는 명제”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는다.

계속해서 수십개의 댓글을 달고 있길래 일단 IP를 차단시키고 해당 댓글을 모두 삭제하였다.

수학자들이 이재율씨를 왜 무시하는지 그 본인은 아직도 모르는가? 지적한 부분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엉뚱한 말만 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쟁 사회에서 살아남기

*다 읽고 다시 읽어보니, 일관성 없는 글이 되었다. 독자들이 이 글을 집중해서 읽다가 지구를 떠나 은하계 저편으로 향하는 글의 방향을 보고 화내지 않길 바라며 글 앞머리에 미리 적어둔다.

오늘, 모 대학의 촉망받던 물리학 교수가 자살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올림픽에서, 1등 할뻔한 우리나라 선수가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유명한 말이 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 경쟁이 심화되었을 때,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사람들은 좌절하게 된다. 좌절한 경우, 어떤 사람들은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누가 그를 죽게 만들었을까? 그 자신인가, 아니면 경쟁을 부추긴 주변 사람들일까? 또는, 경쟁으로 모든것으로 해결하게 만든 이 사회의 책임일까?

죽음은 그 원인이 어디에 있든지간에 개인이 받아들여야 하는 최악의 상황일 것이다. 타의에 의한 죽음이든, 노화에 의한 죽음이든, 스스로에 의한 죽음이든, 그 결과는 다른 사람에게 떠넘길 수가 없다. 경쟁으로만 모든것이 결정되는 사회는 마치 치킨 런 게임과 같다. 치킨 런이란, 누가 더 용감한가를 시험하기 위해서 절벽 끝, 또는 벽을 향해서 질주를 하는데, 절벽의 끝자락에 더 가깝게 멈춘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물론 절벽을 넘어서거나 벽에 처박히면 죽거나 큰 부상을 당할테니 너무 늦게 멈추면 곤란하다. 하지만 극한으로 치닫고 있는 경쟁은 사람들로 하여금 멈추지 못하게 만들고 있다. 날지도 못하면서 절벽 끝으로 달려가고 돌대가리도 아니면서 벽으로 머리를 돌진한다. 이것이 현재의 시대상황인 듯 싶다.

“열심히 하면 먹고살만하지 않을까? 지금 밥을 굶는 사람들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야. 그건 게으른 벌을 받는 거라구”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내 친구중에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많다. 노력해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황을, 그 친구는 이해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그 자신이 그런 상황에 있어본 적이 없고, 설령 그런 상황에 있게 된다 하더라도 아직은 젊기 때문에 부모의 도움을 얻어서 손쉽게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이 커오면서 롤 모델로 삼아온 부모가 그런 상황에 빠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는 그런 상황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겠지.) 그렇게 살면서, 평생 그렇게 어려움이라는 것을 모르고 사는 것도 좋다. 아마 그 친구는 그렇게 잘 풀리는 인생을 살 것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인생이 그렇게 쉽기만 할까? 그 친구야 알아서 잘 살겠지만, 문제는 내 인생이 그렇게 될 것인지는 아무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주제중의 하나는, 어째서 IT업계 종사자들의 최종 테크트리가 테헤란로에서 닭튀김 집 사장으로 귀결되는가이다. 알고보면 당연한 건데, 능력이 비슷한 20대 100명이 같은 회사에 들어갔다고 할 때, 그중 20년 후에 부장급으로 승진할 만한 사람은 10명정도다. 나머지 90명은 그 이하이다. 이것은 능력이 차이가 없다 하더라도 운이 좋았거나, 줄을 잘 섰거나, 이런저런 아주 사소하고 미묘한 차이에 의해서 갈라질 수 있다. 하지만 20년이 지난 그 상황에서 다들 한 가정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일 것이고 어쨌든 부양해야 할 부모님들이 있을 것이다. 그럼 전체적으로, 각 개인마다 어느정도 편차는 있겠지만, 각 사람들이 써야 할 돈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럼, 승진한 10명 빼고 나머지 90명은 부장 밑에서 일할테니 부장보다 적은 월급을 받을 텐데 지출은 부장급이다. 누가 버틸 수 있을까?

그래서 사람들은 창업을 한다. 하지만 자기 사업이라고 해서 그게 잘될 것이라는 보장은 없다. 솔직히 말해서, 뭘 해도 먹고살기 힘들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이다. 물론 일부 복받은 사람들은 그런 걱정이 없겠지만.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어버린 세상이 사람들에게 던지는 진짜 문제는,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라는 관념을 사람들에게 심어준다는 점이다. 그게 진짜 무서운 것이다. 이 명제를 스스로의 절실한 문제점으로 받아들이는 순간,이 세상은 나를 죽이려 하는 것으로 가득 차 있고, 따라서 내가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나는 죽고야 마는 그런 지옥이 된다. 잘 알다시피, 내가 세상을 지옥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이 세상은 진짜 지옥이 된다. 이제 뭘 하더라도 죽음만이 눈앞에 기다리고 있다. 여기서 살아남으려면, 내가 인식하고 있는 문제를 바꿔야 한다. “살아남는 것 자체가 문제이다”라고 받아들이도록 강요하는 이 세상이 문제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문제를 풀고 있다면 그 해답은 똑같을 수밖에 없다. “나는 살아야 하지 않나?” 하지만 그 해답을 구체적으로 구현해 내는 것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자원이 필요하고, 자원은 한정되어 있으며, 모든 사람이 똑같은 자원을 원한다. 자원이 없으면 곧 죽음이다.

죽어가는 사람에게 “넌 더이상 살아남을 희망이 없어. 괜한 희망 품지 말고, 그냥 죽음을 기다리렴” 이라고 말하는 것은 객관적인 말이면서 잔인한 말이다. 물론, “넌 죽지 않을거야. 희망을 갖고 기회를 기다려” 라고 말하는 것 또한 잔인하기는 마찬가지다. 헛된 희망은 쓸데없는 노력을 하게 하여 더 빠른 속도로 힘들어지게 한다. 희망이 없지만 절망할 필요도 없는 적절한 조언이 필요하다.

세상이 1등만 기억하는건 어쩔 수 없다. 경쟁에 참여한 사람 하나하나가 최선을 다한 건 알겠는데, 그렇다고 모든 사람이 경쟁에 참여한 사람 모두를 기억할 수는 없으니까, 그중 중요한 사람 몇명만 찍어서 기억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그럼 가장 잘한 사람 한두명 정도를 기억하는게 쉽지 않을까? 가령, 123번째로 잘한 사람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기엔, 누가 보더라도 설득력이 없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그 경쟁에 참여했던 바로 그중 하나라면 내가 기억해야 할 사람은 바로 나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을 더러운 세상으로 만드는 것은 나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잘 안풀릴 것 같다면, 지금 하는 일이 이미 실패해버렸다면,

더이상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면, 세상이 어두워 보이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이 어둡다고 해서 나까지 어두워진다면 세상은 더욱 어두워질 것이다.

앞에서 얘기했듯이, 헛된 희망은 절망이나 마찬가지로 잔인하다. 어려운 상황에서 희망을 갖는 것은 중요한데, 무작정 희망을 갖는 것보다는 정확한 희망을 갖는 것이 좋다. 지금 상황이 왜 어려운지 파악하고, 어떤 부분이 비관적이고 어떤 부분이 낙관적인지 파악한다. 최악의 상황에서 과연 내가 어디까지 내려가게 될지 생각해 보자. 정확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어두움에 빠져서 세상에 눈을 감아 버리지 말고, 아무리 어두워도 눈을 부릅뜨고 찬찬히 살펴보자. 어쩌면 빠져나갈 구멍이 있을 수도 있다. 안보인다면? 그럼 빠져나갈 구멍을 만들기 위한 삽질이 시작될 뿐이다.

RPG게임에서 레벨을 올리기 위한 삽질 같은건 하루종일 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을 빠져나가기 위한 삽질은 왜 하루종일 못할까?

올림픽에서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실격처리 당한 선수들을 예로 들어보자. 화가 난다. 그 장면을 본 모든 사람들이 화를 내고 있다. 하지만 이 일은 화를 내봐야 금메달은 돌아오지 않는다. 화가 나는건 사실이지만, 일단 잠시 접어두고, 당장 뭘 할 수 있는지 보자. 아무것도 없다. 선수들과 코치들이 정식으로 항의하고 재심이 가능할지, 금메달을 다시 찾아오는 것이 가능한지 검토하고 그렇게 해야 한다. 심판의 오심이 확인되었지만 판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는 공식적인 결론이 난다면, 그때 화를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감정적으로 화를 내봤자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있는 다른 나라는 전혀 감흥이 없을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실격으로 2, 3등에서 1, 2등으로 올라선 나라의 국민들은 오히려 우리나라를 비웃을 것이다. 실격 당했으면 곱게 인정하는 것도 올림픽 정신이라면서. 그럼 그것이 더 억울할 것이다. 진정한 의미에서 “복수”라는 것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4년후 다음번 동계올림픽에서 해당 종목의 금메달을 따내야 할까? 그보다, 금메달이라는 것에 너무 큰 의미를 두지 않는 것이 정말 정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나라가 1등할뻔했는데 실격당해서 금메달을 못딴 것에 화를 낼 것이 아니다. 화를 내야 하는 것은 (만약 실제로 있었다고 한다면) 심판의 오심 그 자체다. 우리나라가 꼴등할뻔 했는데 실격을 당했어도 그것이 오심으로 실격당한 것이라면 똑같이 화를 내야 하고, 4등할 뻔 했는데 중국 선수를 쳤다는 오심으로 실격을 당했어도 오심이라면 화를 내야 한다. 우리나라 선수를 1등하고 있던 다른 나라 선수가 쳐서 그 나라 선수가 실격하고 우리나라가 금메달을 따게 되었더라도, 오심이라면 이에 항의해야 한다. 그것이 비겁하지 않은 올림픽 정신이다.

자. 다시 한국의, 우리나라의 사회 현실로 돌아와서, 내가 절망하고 있는 이유를 살펴보면 내가 먹고살기 힘들기 때문이다. 중요한건 “나만” 먹고살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난 열심히 노력해도 안되고, 다른 사람들은 나만큼 또는 나보다 덜 노력하는데도 잘먹고 잘산다. 이 생각 자체가 틀렸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들 중에는 나보다 열심히 노력한 사람도 있고, 나만큼 노력한 사람도 있고, 나보다 덜 노력한 사람도 있다. 나보다 잘 사는 사람도 있고, 나만큼 사는 사람도 있고, 나보다 못사는 사람도 있다. 각각의 경우의 수만 따져봐도 9가지 경우가 된다. 나는 그중에 단지 나만큼 노력해서 나만큼 사는 사람에 해당할 뿐이다. 절망을 단순히 좌절로 끝낼 것이 아니라, 생각을 해서 진짜 문제점이 뭔지 찾아내야 한다. 정확히,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내는 것은 그 문제에 대한 답을 알아내는 것 만큼이나 중요하다.

언제나 얘기하는 것이지만, 지금 내가 작성한 이런 종류의 글들은 요즘은 공장에서 찍어내듯이 양산되고 있다. 그런 글 읽고 감동하는 것도 지칠때가 되었다. 읽고 느꼈으면 이제 생각하고 움직일 차례다.

도대체 뭘 해야할지 정말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면, 철학책 아무거나 붙들고 읽어보길 권한다. 철학책 중 뭘 읽어야 할지 모르겠으면 “세계 철학사” 책 한권을 골라서 읽는 것이 좋겠다. 철학책은 물리학 교과서나 수학 교재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에게 몇가지 이로운 작용이 있는데, 읽고 있다보면 적어도 인생에 대해 깊이 고찰하게 되거나, 깊이있는 수면을 취할 수 있다는 점이다. 어느쪽이든 그 독자에게 깊은 이익을 주는 것이므로 모두에게 권장한다.

질문은 언제나 환영한다. 다만, 글의 내용과 제목이 왜 안맞는거냐는 질문은 사절한다.

미분기하책 중단, 고체물리책 시작

Chern선생님의 미분기하학 책을 읽다가 “이 책의 수준은 나의 지능을 넘어선다”는 판단이 들어서서 4장까지 읽고 일단 봉인했다. 5장에서 리만 기하학이 나오고 6장에서 리 대수학이 나오는데, 이 시점에 “질량” 만 정의하면 그대로 일반상대성이론이 되는 수준이다. 당연히, 아직 일반 상대성 이론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물리학/수학의 학력이 석사 수준에서 멈춰버린지라…)

학부때 듣지 않았던 고체물리학이나 읽어야겠다. 물리 책은 왜 쉽게 읽히는 걸까… 아무래도 주 전공이라 그런가?

그나저나 토플 공부는 언제 하지…

인터넷 뱅킹 안됨

우리은행, 기업은행 다 안된다.

윈도 XP + IE8에서 안되면 어쩌라고…-_-

아마 내 컴퓨터에서만 안되는 거겠지만, 아무튼 이건 너무하잖아.

프로그램 설치하라고 하는거 전부 설치했는데 자기네들끼리 인식 못해서 에러 나는건 정말 프로그램 만드는 사람들이 대충 만들었다는 증거 아닌가?

물론, 개발자들 개고생하는거 안다. 욕 먹어야 할 주체는 “갑”에 해당하는 은행 보안담당자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일개 고객으로서 일단 화나는건 화나는 거고…

전기요금 오늘 내로 납부해야 하는데, 인터넷 뱅킹이 잘되는 사무실 노트북까지 가려면 그것도 일이다. (게다가 사무실은 전설의 윈도우 Vista + IE8 조합이다. 여기선 잘됨;;)

오픈웹 운동이 빨랑 성공해야 하는데, 짜증난다.